천년 은행나무의 말씀/ 김영선
무겁고 화급할 때 그 부처님 찾아가면
그저 놓으라고만 하시더니
천태산 영국사 부처님도 하냥 같은 말씀이시라
본전도 못한 어설픈 장사꾼처럼
터덕터덕 내려오다 마주한
천년 은행나무,
멀거니 한참을 올려다보고 섰는 나에게
눈주름살 같은 가지 가만가만 흔들어 하시는 말씀,
견뎌라,
사랑도 견디고 이별도 견디고 외로움도 견디고
오금에 바람 드는 참혹한 계절도 견뎌라
밑 드러난 쌀통처럼 무거운 간난도 견뎌라
죽어도 용서 못할 어금니 서린 배신과
구멍 뚫린 양말처럼 허전한 불신도 견디고
구린내 피우고도 우뭉 떨었던
생각할수록 화끈거리는 양심도 견뎌라
어깨너머로 글 깨우친 종놈의
뜨거운 가슴 같은 분노도 꾹 누르고
싸리나무 같은 가슴에 서럽게 묻혔던
가을 배꽃처럼 피어나는 꿈도 견뎌라
들판의 농부가 작은 등판으로 온 뙤약볕을 견디듯
가느다란 외등이 눈보라 치는 겨울밤을 견디듯
너의 평생이 나의 천년 아니겠느냐
- 시 모음집『천년 은행나무도 운다』(시와에세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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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이 있다. 계간 문예지「시에」주간 양문규 시인이 대표인 전국 문화예술인 등으로 구성된 단체로 2009년부터 매년 영동의 영국사 천태산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3호) 밑에서 시제(詩祭)를 지내왔다. ‘고귀한 생명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나아가 자신과 이웃, 대자연의 뭇 생명을 지켜내고 가꾸는 것을 소명으로’ 올해도 제5회 시제를 10월20일(일)에 갖는다. 이 시는 그 행사의 하나로 출간한 330명의 합동시집 ‘천년 은행나무도 운다’에 실린 작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단체는 그동안 문화재청 시범사업기관으로 선정돼 작품집 발간, 천년 은행나무 생명스테이 운영, 은행나무문학상 시상 등의 사업을 펼쳤으나 올해는 지원이 끊겨 시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시집을 발간하고 시화전을 여는 등 행사를 치루고 있다. 양문규 대표는 “천년 넘게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에 맞서 꿋꿋하게 고귀함을 이어온 은행나무처럼 굳은 정신과 신념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노래하며 천태산 문학공간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시절이 수상하고 자신의 삶이 혼돈스러울 때면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산사를 찾는다. 절집 가운데도 유달리 영험이 짙게 서린 곳이 있다.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말의 땀을 흘린다는 밀양의 표충비, 소 울음소리로 크게 운다는 영국사 은행나무 등이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곳을 찾는다고 마음이 확 바뀌거나 똑 부러진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긴 세월 생명을 품어온 거목 앞에서 그저 자연에 순응하며 ‘견뎌라’란 말씀만 되풀이 듣는다.
영국사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들어온 고려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천일기도를 한 끝에 난이 평정되었다고 해서 ‘나라를 평안케 하는 절’이란 뜻의 영국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국사 은행나무는 그 세월과 함께 한 신목이다. 천년 세월을 넘어 아직도 해마다 은행이 세 가마니 가량 열리는데다 가지 한 가닥이 늘어져 땅에 닿았다가 거기서 다시 순이 돋아 또 한 그루의 새끼나무로 대를 잇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이야말로 모든 시련 꿋꿋이 다 견딘 다음에 찾아온 놀라운 생명의 우주적 은총 아니겠느냐.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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