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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림 - 인간과 자연 사이의 매개지대/ 이선영

sosoart 2013. 11. 15. 12:16

이우림 / 인간과 자연 사이의 매개지대

이선영

인간과 자연 사이의 매개지대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우림의 그림에는 알아볼만한 도상들이 등장하지만 조금씩 변형되면서 몽환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전시부제 ‘walking on air’가 말해주듯이, 그의 상징적 우주 속 동식물 그리고 인물들은 현실에 뿌리 내리기보다는 약간 떠 있다. 이번 전시의 인물들은 하늘색 피부를 가지고 있어 인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과 입술의 생기 있는 표현은 그 인물을 완전히 인형이라고 보기도 힘들게 한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간들 자체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위에 놓인다. 소년이나 소녀, 여자 또는 어머니, 중성적인 분위기의 남자 등은 완전한 사회인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본격적인 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 잠재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다. 사회가 공적/사적 영역을 구별하면서 진보해온 경향에 따르면, 그들은 사적 영역에 속해 있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의 분업화가 무너지고 있듯이 양 영역은 뒤섞이는데, 특히 소비를 통해서 그렇다. 가족을 비롯한 사적 영역은 현대 이전의 사회처럼 더 이상 생산의 단위가 아니다. 소비를 통해서만 공적 영역에 편입될 수 있는 사적 영역은 그 자체의 한계가 선명하다. 

 

공적 영역이 각박해 질수록 개인이 내밀하게 속하는 원초적 공간인 사적영역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지만, 모순은 가려질 뿐이다. 자명한 듯 존재하는 그것들은 깨지기 쉬운 가상이다.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것들은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이며 주관의 세계에 속한다. 예술 또한 겉으로 보기의 많은 제도화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무상의 노동에 가깝다. 자기 좋아서 하는 행위를 사회적 소통과 유통의 단계까지 고양시키기는 쉽지 않으며, 여기에 현대 예술가들이 처한 어려움이 있다. 예술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중간 지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애쓴다. 예술은 공적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작가를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어쨌든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예술은 대체로 거기에서 심리적 보상을 받기에 지속가능하다. 오늘날 모든 것을 코드화 하여 소(유)통 시키려는 체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삶을 사회화 하기는 힘들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외부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내밀한 삶에의 욕망은 공적 영역에서의 경쟁이 가속화될수록 강해진다. 

 


이우림, 산 책  Oil on Canvas, 228×182cm, 2013

 

작업에만 전념하는 작가의 실존적 상황은 이상적 자연 속에 배치된 아이나 가족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킨다. 이우림의 그림에는 거센 경쟁 속에 있는 공적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안전지대에 대한 유토피아적 갈망이 투사되어 있다. 작품 속 자연적 배경은 원초적 두려움을 주는 숲이 아니라, 윈도 화면에 나오는 나지막한 구릉처럼 부드러운 자연이나 잘 정비된 정원에 가깝다. 때로는 풍류 넘치는 옛 그림이 배경에 섞여 있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허공 속에 드리워진 나무는 하늘하늘한 그림자로 걸려 있다. 등장하는 동물들은 거친 야생성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같이 순하고 예뻐서, 인간에게 선택되고 보호받는다. 초충도처럼 허구 속 자연이 등장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공적 사회의 경쟁과는 거리를 둔다. 그들은 현실로부터 벗어나 각각의 상상 속에 잠겨있다. 이번 전시에서 많이 등장하는 소년은 커다란 눈망울에 붉은 입술, 푸른 빛 얼굴로 마치 살아있는 인형 같은 모습이다. 그를 둘러싼, 또는 그와 함께 있는 양귀비, 앵무새, 강아지 등은 그가 속해 있는 세계의 유희적이고 가상적 특성이 잘 나타난다. 

 

아이가 아닌 성인의 표현에서 작가의 의도는 더욱 명확하다. 땋은 머리에 꽃무늬 옷을 입고 뒤돌아 있는 물위의 여성은 현실의 여성이기 보다는 남성의 환상이 투사된 ‘영원한 여성’이다. 아이와 함께 등장하는 여성 역시 모성이라는 원초적 역할이 부여된다. 그렇다면 성인 남성은 어떨까. 성인 남성은 사회적 역할로부터 완전히 면제될 수 없는 곤란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학생시절부터 인물화를 즐겨 그렸던 작가가 초기에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몽환적인 분위기의 모델로 교체한 것은 현실성을 삭감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남성이지만 몸과 손이 가늘고 비율도 어색한 까까머리 모델은 어느 작품에서나 뭐라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여기에 꽃무늬 패턴이 더해지면 그의 정체성은 더욱 모호해진다. 작가는 모호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물의 포커스를 흔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우림의 작품에서 인간은 빠지지는 않는다. 인간이 무대에 안 나타날 경우에는 그림자로라도 등장시킨다. 작품 속 인물들은 어떤 성이든 연령대이든 현실보다는 상상 속에 산다. 상상은 현실로부터 인간을 보호한다. 

 

초록빛 자연이나 꽃 패턴 등은 인물들을 감싼다. 그것들은 인물을 보호하면서도 타자와 소통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꽃무늬는 2차원 패턴을 넘어서 공간으로 자라나는 듯하다. 꽃무늬 천을 두른 인물이 달마시안이나 자작나무 같은 동식물과 함께 있는 이전 작품은 인공과 자연에서 발견될 수 있는 패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알려준다. 자연 속에서 이런 무늬는 보호색의 기능을 수행하며, 인물이 걸칠 경우 몸통 부분을 평면화 하면서 가상성을 강조한다. 지속적으로 나오는 꽃무늬 패턴에 대해, 작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감싸 안는 포대기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 가득한 가족애 역시 개인을 보호하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동화같이 완전한 허구나 상상은 아니다. 그것은 분리된 영역의 한편에 속해 있기 보다는 그 경계 위에 있다. 그래서 깔끔하게 그려진 자연이나 인간에게는 깨질 것 같은 불안감이 서려있다. 작품 속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양귀비처럼 도취가 있다면, 도취에서 깨어날 현실도 존재한다. 각성된 현실은 더욱 가혹할 것이다. 그림이라는 상상의 세계로 산책하려는 작가의 줄기찬 의지는 그 뒤편에 남겨진 현실 또한 생각하게 한다. 현실은 배제된 채 등장하는 것이다.

 

 

이우림,산 책  Oil on Canvas, 228×182cm, 2013

 

초록빛 자연이 등장하는 작품들의 제목은 [산책]으로 붙여졌다. 소풍가기 좋게 그려진 자연에는 신윤복의 그림 같은 옛 그림이 섞여 있다. 놀이하는 한량들을 그린 옛 그림은 산책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한국화와 서양화, 그리고 시대의 차이가 선명하지만, 양자는 감성 면에서 일치하며, 이물감 없이 어우러진다. 그것들은 지금 여기로부터 떨어져 있는 안전하고 쾌적한 세계, 놀이의 공간처럼 따로 잡아둔 세계이다. 가혹한 현실과 무관한 이 세계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은 자연을 대상화, 도구화시키는 이성과 노동의 힘이었다. 주어진 자연을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맞게 개조해나간 인간은 문명, 즉 인간적 세계를 건립했지만, 그것은 득만큼이나 실이 많은 모순적 과정이었다. 인간은 자연 대신에 문명에 의해 억압받기도 한다. 이우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결코 위협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욕망에 맞춰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지만, 확고함은 결여되어 있다. 유토피아 풍의 자연은 무대처럼 얇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가상성이 그의 그림의 현실성이다. 

 

아름답지만 쉽게 깨질 것 같은 그 가상세계는 어린 시절의 환상 같은 위상을 가진다. 동물은 인간과 달리 이러한 중간지대가 없다. 동물은 자연과 직접 대면해 있지만, 인간과 자연 또는 현실 사이에는 매개지대가 존재한다. 이 매개지대에서 문화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동물보다 취약하게 태어나는 인간을 오히려 강하게 했고 자연을 지배하는 문명을 이루게 하였다. 자연(현실)과 직접 직면하게 하지 않는 매개지대는 인간을 보호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그 지대에 계속 머물려한다면 그는 ‘피터 팬 콤플렉스’에 빠진 환자로 취급될 것이다. 생산 활동을 하는 성숙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 잠시 속하는 그 시공간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으며, 문명화 될수록 그 시간은 길어진다. 그것은 동물에 비해 아동기를 엄청나게 길게 누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우월한 입지를 가능하게 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놀이하며 배운다. 예술이 이 중간지대에 속함은 분명하다. 필립 아리에스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길어진 아동기가 인간문명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진화론적인 차원에서 인간이 어린아이처럼 됨으로서 생겨난 이익을 분석한다. 

 

클라이브 브롬홀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서 어린 시절을 연장하고 사회적 협동을 하게 됨으로서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동물학자는 성인남성을 침팬지와 비교하는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해부학적 특징, 즉 털이 거의 없고, 피부가 얇고 얼굴의 굴곡이 적고, 머리가 큰 몸은 아기 침팬지에 더욱 가깝다고 분석한다. 브롬홀에 의하면 약 600만 년 전 유인원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처음으로 직립보행을 시작한 우리 조상들의 해부학적 특징이 변화한 것은 성장속도를 조절하는 유전자의 변형 때문이다. 이를 통해 어렸을 때에만 존재하던 특징들이 성장이 끝난 다음에도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인간은 유아기의 발달과정을 빨리 마치지 않고 오히려 이 과정 속에 정상보다 훨씬 더 오래 머물다가 멈춰버린다. 즉 인간은 유아화된 동물인 셈이다. 인간은 평생 동안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육체 속에 갇힌 유인원, 즉 영원한 아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인류가 새로이 갖게 된 해부학적 특징들이 처음에는 인간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다. 

 


이우림,산 책 Oil on Canvas, 145.5×112cm, 2012

 

브롬홀은 우리 조상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원한 유아상태로 퇴행한 것일까를 물으면서, 인간이 영원한 아기로 변화한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사랑과 협동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타자의 도움이 절실한 인간의 유아화는 개체로서는 취약하지만 집단적으로는 사랑과 협동을 통해 마침내 문명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우림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중간지대는 인간의 유아화에 내포된 진화론적 의미를 환기시킨다. 그의 작품 속 인체는 인류가 진화과정에서 유아화 되었음을 보여주는 특징들로 가득하다. 아이와 여성은 물론, 패턴을 두르고 있는 중성적 남성 역시 성인기까지 이어진 유아적 특징들과 관련된다. 동물학자가 꼽은, 인간의 몸 중에서 특별히 유아적인 부분은 굴곡이 적은 얼굴, 크고 둥그런 두개골, 높은 이마, 작은 귀, 커다란 입술, 섬세한 뼈, 매끈하고 털이 없는 피부 등이다. 눈의 안쪽 가장자리에 선명한 몽고 주름 역시 유아기의 특징이다.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같은 새로운 생물학적 관점에 의하면, 아이 같은 세계는 퇴행이 아니라 위대함으로 역전 될 수 있다. 유아기는 특정시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브롬홀의 책 서문을 쓴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어린 시절이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무덤까지 연장되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어린 시절이 연장됨으로서 인류의 공격성이 줄어들고, 협동성이 증가했으며, 기본적인 번식 시스템으로서 사랑과 결혼을 선호하는 감정상태가 만들어졌고, 언제나 호기심을 잃지 않고 언제나 의문을 품는 거대한 뇌가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이 예술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아이 같은 천진함이 예술적 천재의 조건으로 회자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우림의 작품에서 꽃무늬나 초록색 천에 감싸여 있고, 어머니에 안겨 있는 천진한 어린아이는 가상적이고 잠재적인 공간, 즉 인간을 인간으로 성장시켜주는 제 2의 모태를 보여준다. 예술을 창조하고 즐기는 인간의 능력을 인간의 손 뿐 아니라, 아기-엄마 관계의 연장으로 보는 피터 풀러는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에서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코트의 가설인 ‘잠재적인 공간’을 현대 이후의 대안적 미학으로 소개한다. 위니코트는 모자관계에 전제된 아이의 의존성에서 문화와 예술을 가능케 하는 ‘가상(illusion)의 순간’을 발견한다. 아이는 점차 이 잠재적 공간을 벗어나 가혹한 현실원칙을 각성하게 되지만, 잠재적 공간은 어미 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재생산된다. 

 

문화, 예술, 종교 등이 다 직접적인 현실원칙과 대면해야 하는 인간에게 아늑한 보호의 지대를 제공한다. 위니코트에 의하면 내면적 현실과 외부의 삶이 모두 그에 이바지 하는 잠재적인 공간에서 아이는 상징들을 활용한다. 아이는 하나의 문화적인 삶으로 화하는 모든 것을 활용함으로서 잠재적인 공간을 꽉 채운다. 인간에게는 이와 같이 도전받지 않는 중간 영역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원래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존재했던 이 잠재적인 공간은 아이와 가족 사이에서, 개인과 사회 혹은 세계 사이에서 관념적으로 재생된다. 위니코트는 이 중간의 영역을 현실의 원칙이 가하는 쓰라림으로부터 구원받도록 하는 문화적 체험의 장이라고 본다. 그리고 여기에 미적 차원 또한 존재한다. 이를 통해 현실원칙의 쓰라림은 완화되고 인간의 창조력이 고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무의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돈으로 등치시키는 현대사회는 마르쿠제가 ‘현존하는 현실 내의 다른 현실’ 이라고 명명했던 미적 차원이나 공유된 상징적 우주를 소멸시켜 나간다. 편재하는 즉물적 현실에 거슬러 가상적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은 그만큼 힘들지만 필요한 것이 되었다. 

 

출전;  FN ART GALLERY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