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벽지가 벗겨진 벽은 / 이성복

sosoart 2013. 11. 16. 20:03

 

 

 

벽지가 벗겨진 벽은 / 이성복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 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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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입이 없는 것들」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 이후 10년 만에 펴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지나친 갈망과 절망 사이에서 울컥거렸고,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급하게 번갈아 밟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와 불화한 세월이 길고도 깊었다.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으면서,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돌아나올 수도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다.’ 시집에 있는 ‘시인의 말’이다.

 

 시의 독이 온몸으로 퍼져가길 바라는 심정이라니. 이성복 시인은 “성질 못된 사람이 맺힌 게 있어서 글도 잘 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시를 잘 쓰기 위해 ‘오만 호들갑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람이었다. 남보다 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제 몸에 상처를 내는 것도 불사한 시인이었다. 자해공갈단처럼 제 몸의 흉물스런 상처를 드러내보이면서까지 벽이 숨기고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벽지가 벗겨진 벽’은 낭자한 상처와 얼룩의 칠갑일 것인데 나는 오래 전 형이하학의 느낌으로 시를 읽었다.

 

 장열하게 죽고 싶었으나 굶어 죽긴 싫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덕지덕지 벽지 덧방 친 허름한 가게 하나 세를 얻었던 것인데, '벽지가 벗겨진 벽'은 그때 마다 찰과상을 입은 세입자가 떠났을 것이고, 그 자리에 미심쩍은 희망으로 새 벽지가 한 겹 다시 발렸다. 지난 벽지의 '군데군데 못 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은 어쩌면 전사자의 혈흔일지 모르겠다. 벽지가 몇 번 바뀌는 동안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은 아랑곳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입자야 꼬꾸라지든 말든 벽을 친 건물주는 꼬박꼬박 월세를 챙겨갔을 것이다.

 

 세입자는 임대차계약서의 특약대로 일체의 시설비는 인정받지 못했음으로 대책 없이 내몰렸다. 그러나 철근콘크리트조의 내구성만큼이나 오래 완강했지만 저 못 한 방에 빗금이 생겼다.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대엔 일 년 넘게 문을 닫아건 점포가 있었고, 군데군데 임대문의 현수막이 찢겨진 채 나부꼈다. 이쯤 되면 건물주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태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네 전체가 등창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으로 돌림병을 앓고 또 번지고 있었다.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 그곳에 새로 바른 핑크빛 벽지는 얼마 못가 꽃무늬 벽지로 다시 바뀌었다. 연신 두드리는 불황의 매를 버틸 장사는 없었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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