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최영욱
옛적 남해로 젖혀들던
그때도 그러했으리라 믿으며
백사장에 스미듯 다 잊고들 살다보니
또 그러했으리라 믿으며
나루는 그랬다
섬진나루는 그랬다
건넬 수도 마중할 수도
없던 그 시절
잊었던가 잊어야만 했던가
나루도 사공도
그 어깨에 걸머졌던 짓눌림마저도
옛적으로 불리는 강
어느 적수가
부는 젓대소리에
강은
밤새
저리도 앓아 쌌는가
- 시집『평사리 봄밤』(고요아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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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섬진강 시인’하면 먼저 김용택 시인을 떠올린다. 시인이 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고, 섬진강 연작시로 더욱 알려진 분이라 그 별칭은 아주 자연스럽고 지당한 노릇일 수 있다. 하지만 섬진강은 조영남의 노랫말처럼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질러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란 사실을 환기한다면 한쪽으로 편향된 지나친 각인은 자칫 섬진강의 유장한 흐름을 잘라먹거나 왜곡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붙박이 평사리문학관장 최영욱 시인 역시 섬진강의 큰 줄기를 담고 있는 하동에서 태어나 ‘옛적 남해로 젖혀들던 그때’부터 시방까지 줄곧 섬진강을 지켜온 섬진강 시인이라 할만하다. 그의 시집 「평사리 봄밤」에는 온통 섬진강과 지리산 그리고 악양의 정기들로 넘실댄다. 태생적 토박이일 뿐 아니라 시의 모태 또한 그곳이다. 그 자연과 생명에 엎드려 스스로를 끝없이 낮추어가며 섬진강처럼 살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나쁜 남자’라고 자처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사람에게나 자연에게나 늘 주기 보다는 받는 것이 더 많고, 그들에게 받은 상처보다 입힌 상처가 훨씬 많기에 스스로를 ‘나쁜 놈’이라 여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섬진강에 합당한 시인일는지 모르겠다. 모든 생명을 품고서 자신이 길러낸 양식으로 뭇 생명들의 끈을 이어주는 섬진강과 악양의 넉넉함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평사리 주민이기 때문이다.
섬진강의 ‘섬’은 두꺼비 섬(蟾)이다. 본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고려 초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떼 지어 올라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혼비백산 달아났다는 전설 이후로 붙여진 이름이다. ‘나루도 사공도/ 그 어깨에 걸머졌던 짓눌림마저도/ 옛적으로 불리는 강’은 지금도 몸집을 불려 깊고 길게 흐르고 있다. 지난 세월 가뭄과 수도 없이 퍼부어댄 큰비에도 둘레의 풍광과 속살은 전혀 떠내려가지 않았다.
대금소리와 참 잘 어울릴 것 같은 섬진강 풍광은 조금 눅눅했고 유속도 빨라지긴 했지만 ‘어느 적수가/ 부는 젓대소리에/ 강은/ 밤새/ 저리도 앓아 쌌는가’ 주술처럼 시인의 노래가 함께 들리는 듯했다.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을 ’파르티잔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다 걷진 못했지만 단박에 속이 정갈해졌다. 저 강도 이내 말갛게 흐를 것이다. 공연히 들쑤시고 건들지만 않으면 일만 년 전 그 강처럼 유장하게 유창하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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