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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나무에 새겨진 신비한 그림과 글자 속으로 1]

sosoart 2013. 11. 28. 11:37
[돌과 나무에 새겨진 신비한 그림과 글자 속으로 1]
작성자문화재청
작성일2013-11-25조회수373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

 

 

오랜 세월 동안 돌과 나무는 인간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다. 큰 바위나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안녕을 빌었다. 삶이 거칠고 험했기에 그 마음은 더욱 절실했다. 돌과 나무를 찾아가는 여행길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서 시작한다.
반구대 가는 길은 한 폭의 그림이다. 오밀조밀한 산이 겹겹이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을 감싸듯 펼쳐져 있다. 그 일부인 연로(硯路)는 반고서원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벼랑길로 너비가 2.5m가 채 되지 않는다. 연로 개수기(改修記)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연로는 '벼룻길'이라는 뜻으로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이라 풀이하고 있다.

눈맛이 좋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반구대 암각화에 이른다. 태화강 상류 서쪽 기슭의 '건너각단'이라는 암벽에 있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이다. 대부분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한살이와 연관이 있다. 사람 얼굴을 비롯해 사냥하는 사람들, 활·작살·그물, 다양한 고래, 호랑이·멧돼지·사슴 같은 짐승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새끼를 밴 호랑이, 교미하는 멧돼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사슴 등이 그렇다.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도 있다.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의 모습도 그렸으며, 그물이나 배도 표현했다. 대부분 다산과 풍요로운 생업, 안전한 사냥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당시 생활상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과 점으로 동물과 사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특징을 실감나게 그려낸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당대 생활과 풍습을 알려주는 바위그림으로 평가된다.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돌아나오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반고서원유허비(울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3호)도 있다. 귀양살이하러 왔다가 이곳 반구대에 올라 시를 지었던 고려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를 기리는 빗돌이다. 이 때문에 반구대를 '포은대'라 하기도 한다.
울산 암각화박물관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을 소개하는 한편으로 암각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실물 모형을 통해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수 있으니 먼저 들러보는 게 좋겠다.

 


- 울주 천전리 각석
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등 기하학적 문양

 

울주 천전리 각석은 태화강 상류 물줄기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다. 여기를 걸어가는 길도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만큼이나 멋지다. 걷는 내내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온통 바위로 이뤄진 골짜기를 풍성한 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다. 대곡천이 대곡천인 까닭을 물소리를 들으니 알겠다. 각석에 있는 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등 기하학적 문양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천전리 서석(書石)'이라고, 신라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800자 남짓 명문도 남아 있다. 법흥왕 때 씌어진 글자들로 이를 보면 당시 신라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와 더불어 조상들의 생활모습과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 암각화다.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의 모습이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돼 있다. 반구대 암각화와 견줘가며 감상하면 재미 더할 수 있다.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이 담겨 있는 그림들은 특정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더욱 뜻깊다.
여기 새겨져 있는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신라시대 여러 글자들은 특별히 천전리 서석이라 한다.
쇠붙이나 돌에 새긴 글(금석문)들은 종이에 남겨진 문헌 기록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그 시대 생생한 시간의 나이테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서석은 아래쪽에 있고 각석은 주로 위쪽에 있다. 여기 그림과 글들은 반구대 암각화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서 맨눈으로 볼 수있다.
각석으로 건너가기 전 골짜기 바위에는 공룡 발자국 화석(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6호)도 남아있다.

 

 

- 포항 냉수리 신라비
'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과 상속에 관한 내용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는 나이가 대략 550년으로 짐작된다. 조선 세조때 단종복위운동이 들통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죽은(竹隱) 이지대(1369~1459)가 여기로 들어오면서 갖고 와 연못가에 심은 나무라 한다. 이지대를 기리는 유허비도 함께 서 있다.

옛날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나무를 우러름의 대상으로 삼고 신성시했다. 구량리 은행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를 해코지하면 해를 입는다고 믿어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나무 밑둥 구멍에 대고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이 정성들여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나무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냐에 따라 입혀지는 의미와 해석이 달라진다. 구량리 들판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아왔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264호)는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사무소 뜰에 있다. 진흥왕 때인 524년 세워졌다고 짐작되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보다 적어도 21년 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신라비로 인정받았었다.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至都盧) 갈문왕(지증왕)이 나왔고 그래서 지증왕 4년(503년)에 세워졌다고 짐작된다. 하지만 2009년 발견된 같은 포항의 중성리 신라비(보물 제1758호)가 마찬가지 재산 문제를 다루면서 신사년(辛巳年)이라 적고 있어 최고(最古) 지위를 잃게 됐다. 여기 신사년은 냉수리 신라비보다 이태 앞선 501년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쨌거나 냉수리 신라비에는 네모꼴 화강암의 앞·위·뒤 3면에 231자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재산과 상속에 관한 것이다. 지증왕을 비롯한 6부 출신 귀족 7명이 앞선 두 임금이 재산 소유를 인정한 결정사항을 다시 확인하는 한편, 절거리가 죽은 뒤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상속하고, 다른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여러 귀족이 참여한 가운데 처리했는데, 이는 왕권이 확립되기 이전에 왕의 권한이 미미했던 신라의 실상을 알려준다. 국가에서 세운 빗돌로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준다. 바위가 이전에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문자를 만나면서 그 성격이 바뀌어 왕과 나라의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