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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조각가 5인/ 인선영

sosoart 2013. 12. 6. 11:34

여성 조각가 5인

이선영

김정숙-자연과 언어의 균형과 조화

 

새의 형태와 움직임이 공존하는 ‘비상’(flying form) 연작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991년 75세의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몰두한 김정숙의 대표작이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일정한 두께의 띠가 타래 과자처럼 살짝 꼬여서 만들어진 형태는 날아가는 새의 형상으로 귀결된다. 지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초월을 희구하는 새의 형상은 자연과 조형언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에 기대고 있다. 작품 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그것들은 날아가는 새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비상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표현한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모더니즘의 어법에 충실하다. 이 작품들은 재현주의에 연연하거나 자연이라는 참조대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자연과 언어 간의 적절한 관계를 가진다. 참조대상을 보여주는 것에 연연하는 경우 조형언어는 투명한 창에 머물며, 참조대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자의적인 장식에 머물고 만다. 

 

한국 미술계의 첫 지도를 그려나간 세대인 1917년생의 조각가 김정숙이 통과해왔던 초창기 모더니즘은 대상과 언어 사이의 행복한 교우의 시기로, 돌이켜 보면 예술이 가장 예술다웠던 시기이다. 그때 예술과 자연은 서로를 빛내주었다. 그 이후에 예술이 지양되거나 자연이 지양되는 현대미술의 사태는 형식과 실재의 힘을 잃은 채 고만고만한 탐닉에 빠져들었다. 현실계와의 괴리를 불러오는 추상적 형이상학은 지양되어야겠지만, 예술이 현실과는 다른 어떤 차원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김정숙의 ‘비상’이 요구하는 바는 이 또 다른 차원으로의 비상이다. 지상으로부터 비상하는 새의 실제 자세는 가장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재창조한 비상에는 균형과 조화가 있다. 판이 접혀지거나 휘어져 이루어지는 차원의 변주는 비상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이동을 상징한다. 비상을 통해 선택된 시간은 가속되며, 공간은 독특한 기운으로 채워지고, 조각에 내포된 고된 노동의 과정, 그 양적 축적은 질적으로 비약한다. 

 

박기옥-텍스트로서의 예술작품 

 

박기옥의 작품은 매듭이나 편물 같은 조직이 떠오른다. 그러한 조직을 특징짓는 짜임, 또는 짜임의 풀림이 나무 조각으로 거대하게 확대된 듯하다. 짜임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일련의 모듈을 단위로 삼아서 확장된다. 작품을 이루는 모듈은 짜임의 방식만큼이나 다양하다. 그것은 형태적 재미를 넘어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른 이야기는 다르게 짜여 진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언어적 존재인 인간 또한 짜여 진다. 예술 및 예술가는 짜면서 짜여 진다. 이러한 변모의 과정이 없다면 일반적인 노동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때로는 느슨하고 때로는 촘촘하다. 일련의 짜임은 선택된 방식이 일관되게 관철됨을 말하지만, 그 방식이 기계적이지만은 않다. 짜임들은 빈 공간을 남겨두고 이 간극으로부터 새로운 짜임이 생성될 수 있다. 세계는 구성된 것만큼이나 해체되어 있다. 박기옥의 작품에서 세계는 짜여 지고 풀려지고 접혀지고 펼쳐진다. 짜임이라는 구성 원리로 인해 네가티브 공간을 풍부하게 품고 있으며, 그 부피 또한 무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박기옥의 [짜임] 시리즈는 세계의 구성 원리와 그렇게 형성된 세계의 다양한 질감을 표현한다. 그것은 자연의 현상적 차원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추상이지만, 자연적 질서가 조직되는 원리를 표현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어떤 본질이나 덩어리가 아니라 텍스트가 된다. 세계와 예술을 텍스트로 간주하는 것은 본질주의적 세계관과 달리, 세계의 재현이 아닌 생성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 기존의 세계를 단지 이해하고 읽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고 쓰여 진다. 이 구성적 과정은 예술의 언어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원리를 나타낸다. 작가 또한 작품 앞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최초의 출발이 아니라, 작품과 함께 짜여 지는 익명적 생산자가 된다. 텍스트로서의 작품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식의 예술작품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생산자는 텍스트 자체로 흩어진다.   

  

김효숙-환원 또는 확산하는 동그라미 

 


김효숙, 동그라미3 -1973년작,테라코타,.

 

조각가 김효숙에게 동그라미는 1980년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인간, 자연, 생명, 세계, 사랑, 조화 등을 포괄하는 내용이자 형식이 되었다. 첫 개인전 작가노트에 적혀있듯이 ‘생명의 그릇이고, 생명은 곧 약동하는 리듬 그 자체이기에 어떤 구심점을 찾는 각 부분의 율동적 통합, 조화가 하나의 조형적 동그라미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동그라미는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중심을 에워싼 일련의 주변세계를 만들며 닫혀져 있는 기하학적 도상이 아니다. 만약에 그것이 환원이라면 환원은 또한 확산을 예기한다. 만약에 그것이 하나라면 그것은 하나로부터 파생된 다양함을 암시한다. 동그라미는 삶의 굴곡을 따라 굴러가면서 새로운 동그라미들을 만들어 나간다. 김효숙에겐 그것이 조각이 되었다. 동그라미는 안팎의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경계이다. 이러한 경계는 생명이 그러하듯이 자신만의 항상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닫힘과 열림이라는 이중성은 자연과 예술이 공유하는 소통의 특성이다. 

 

1973년에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동그라미3]에서 인물은 마치 바가지탈을 쓴 것같이 동글동글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리고 있다. 알, 또는 알 안에 접혀져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는 이미 알 밖의 세계를 상상한다. 접혀진 채 존재하는 잠재적 배아는 어떤 조건 속에서 남김없이 펼쳐지며 현실화될 것이다. 동그라미는 최초의 시작이자 그 시작이 귀결될 어떤 종점을 예시한다. 그러나 종점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린다. 김효숙이 작품의 원형으로 삼는 동그라미는 근대에 성립된 직선적이고 상승지향적인 시간-역사관이 아니라, 동양에도 친숙한 순환적 세계관과 관련된다. 돌고 도는 그러나 원점으로의 단순한 회귀나 반복은 아닌 영원회귀의 과정 속에 자연과 예술, 그리고 삶이 있다. 영원회귀의 사상이 예시하듯, 다시 회귀하는 것만이 필연성이 있다. 예술 또한 이렇게 다시 회귀할 수 있는 힘을 통해 한갓된 장식이 아니라, 필연으로 고양 된다. 그것은 개별과 특수가 아닌, 일반과 보편을 향한다. 

 

김경옥-여성과 생명, 그리고 예술 

 

김경옥의 작품에는 통통한 여성이 등장한다. 지나치게 말라빠진 여성상이 이상형이 되어있는 시체 애호증의 사회에서 이 풍만한 여성들은 자연적인 풍요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표면 아래 피가 도는 듯한 따뜻한 살의 느낌이 살아있다. 도톰한 손과 발은 반쪽으로 나뉜 세상에서 나머지 반쪽에 의존하는 나약한 여성상이 아니라, 그자체로 세상의 총체성을 품은 듯 넉넉하다. 그녀들은 어머니처럼 강인해 보이지만, 지배적인 가부장 문화가 그렇듯이 타자를 억압하지 않는다. 원시시대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한 작은 여성상들처럼, 이 생명 충만한 여성상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적인 속성을 견지한다. 그러나 여성조각상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 속에 설치됨으로서 여성을 자연, 또는 본질로 환원한다는 오해를 피해간다. 그녀들은 창밖의 눈 쌓인 골목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책상 앞에 팔을 괴고 앉아 신을 묵상하며, 자신만의 보물창고를 공개한다. 

 

작품 속 그녀들은 풍요로운 자연의 속성을 버리지 않은 채, 현대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 여성이 풍요로운 자연의 상징으로, 문화의 반대편에 서게 됨으로서 얻은 영광만큼이나 추락이 선명하다. 자연은 문화에 의해 예찬되기도 했지만, 착취되기도 했던 것이다. 생명을 낳고 돌보는 기능은 그녀들을 자연에 묶어두곤 하였다. 페미니즘 예술사가들의 자세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창조력이 예술작품의 생산으로 고양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으며, 아직도 재생산의 문제는 여성을 사적 영역에 발목 잡는 가장 큰 ‘자연적’이고 ‘본질적’ 요소이다. 그러나 자연이 배제된 문화, 여성이 배제된 사회, 개인이 배제된 공적 영역은 인간 뿐 아니라 예술에도 치명적임은, 그러한 분리들에 기초한 근대사회에 대한 반성을 통해 비로소 드러났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복귀된 여성-자연은 현대사회의 선정성 및 도착성과 결합하면서, 기괴함과 비천함 일색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생명의 이면인 죽음을 극대화한다. 문명 속에 맥락화 된 김경옥의 여성상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어법으로 여성과 생명, 그리고 문화의 관계를 표현한다.

 

최은경-이 세상 유일의 책 

 


최은경, Books and Animals

 

2000년부터 시작된 최은경의 책 작업은 책의 상징성을 우주적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세상은 책이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책들은 읽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감으로 느끼는 환경이다. 최은경의 책들은 단순히 인류 지식의 보고라는 상징을 넘어서, 상징적 우주를 이룬다. 설치라는 형식으로 배열된 거대한 책들은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된다. 이 상징적 우주에 작가는 자신이 책에서 얻은 것을 구구절절이 새겨 넣지 않는다. 그것은 책의 안팎에 관련된 문화사적 의미를 숙고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상징계에 대한 메타적 비평이다. 개인에 앞서서 사회와 언어의 규칙을 제공하는 상징계는 긍정적인 만큼이나 부정적이다. 작가는 책들이 아름다운 세상만큼이나 그렇지 못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그래서 작가는 책 안의 문자를 지워버리곤 한다. 역설은 책에 새겨진 문자 자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책은 이전 시대의 구술문화를 이어받는 문자문화의 정수이다. 책의 문자성(literacy)은 구술문화의 원형의 반복에 기초하는 상투성 그리고 그 토대가 되는 공동체 대신에, 새로움과 진보, 그리고 이를 추동하는 개인을 앞세웠다. 구술성에서 문자성으로의 전환 이후의 역사는 명과 암을 함께 한다. 문자로 채워진 책들은 사본이 되어서 재현의 전형을 지배적 질서를 재생산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세상이 계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처음 배우는 곳이 책으로 의미가 전수 전달되는 학교이다. 최은경의 책은 사본이 아니라 이 세상 유일의 책이다. 작품은 책에서 문자를 지워버리는 위반의 장이 되었다. 2004년부터는 야생동물도 가세했다. 동물은 책으로 집약되는 문화의 상징과 대별되는 존재, 즉 야생의 편에 속한 듯 하지만, 최은경의 작품은 그러한 단순한 분류에 기대지 않는다. 야생동물에도 치타 같은 탐욕스런 육식동물이 있는가하면, 깊은 산속의 초식동물인 하얀 사슴(엘크)도 있다. 미러 스테인레스 스틸을 이용한 작품들은 사본적 특성을 가지는 책의 부정적 측면 뿐 아니라, 반성과 각성을 일깨우는 긍정적 속성을 가진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