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깡통/ 곽재구

sosoart 2014. 1. 28. 19:30

 

 

 

깡통/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시집『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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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20여 년 전만 해도 아이슬란드에는 국영TV 하나뿐이었고 목요일은 방송이 없는 나라였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어 채널이 3개로 늘어났지만 목요일에 내보내는 프로그램은 모두 문화예술 관련 콘텐츠로 편성되어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오랜 습관대로 목요일엔 TV를 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오로라'의 나라 아이슬란드는 세계에서 서점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이에 시인은 아이슬란드의 ‘세심한 문화정책’을 부러워하며 우리의 텔레비전 문화와 막장 드라마를 비판하고 있다.

 

 TV는 바보상자니 깡통이니 하는 손가락질을 받아오면서도 진화를 거듭하며 여전히 우리 삶에서 막강한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인터넷과 다채로운 IT기술의 발달로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숱한 여론조사 결과 TV는 언제나 가장 많은 여가시간을 우리와 함께하는 쾌락의 정원이었다. 날마다 진보하길 원하고 고급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도 TV는 세상의 부조리를 읽는 유력한 수단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다. 시인이 불안해하는 '찌그러진 깡통'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양가적 속성을 지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문화이며, 문화가 삶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란 인식도 이제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수시로 망각되고, 주변화 되고 도외시되었다. 물론 강력한 이유가 있다. 어떤 문화적 형식과 내용도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먹고살 수 있어야 사람다움의 가치를 돌아볼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종합선물세트격인 TV가 저렴하고도 수월하게 그 갈증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에서 지적한 바처럼 문화적 형식이 다양성을 띠지 못하고 하나로 수렴되는 현상은 안타깝다.

 

 그렇다고 아이슬란드처럼 정부가 나서서 아예 일주일에 하루 텔레비전 플러그를 뽑게 하고 대신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기도록 배려하는 것은 마땅할까? 아무래도 우리 실정으로는 거리가 느껴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관제 폭력처럼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융성을 국정 4대 목표중 하나로 내세운 정부는 그 일환으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하여 전국 국?공립 문화시설의 무료 개방 등 생활 속 문화 확산을 실천키로 했다. 비록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의 저렴하고 소극적인 정책이긴 하지만, 국민 모두가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권순진

 

 

Nice To Meet You - Yanni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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