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사/ 이원규
네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한 그루 연리목이야
야하다는 말 알지?
봄날 맨 처음의 꽃 큰개불알풀
연보랏빛을 오래 들여다보는 엎드려 자세가 너무 야해
바지 아랫도리가 터져 불알이 빠지도록
100mm 접사렌즈로 보는 세상은 오직 너뿐이야
숲치마를 들추고 변산바람꽃의 성기를 남몰래 들여다보듯이
야해야만
떨리는 나뭇가지가 다른 가지에게
충혈된 눈동자가 눈동자에게
불안한 영혼이 영혼에게
비로소 접 붙는거야
우리는 지구의 둥근 우리에 갇힌 한집살이 씨짐승
흰 뼛가루 합장될 때까지
봄밤의 섬진강도 너무 야해서 흐르고
말씀의 찰거머리도 너무 야해서 자꾸 네 혀를 빠는 거야
- 계간『주변인과 문학』2013년 겨울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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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는 무위자연 가운데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면서 소유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들어간 '낙장불입'의 지리산 시인이다. 처음 몇 년은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상에 등 돌린 채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고 한다. 다만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주석에 힙 입어 필요한 몇 가지를 마련했다. 21세기를 사는 시인인지라 노트북은 있어야겠고 지금은 그의 브랜드가 된 오토바이크와 뒤늦게 장만한 카메라가 그것이다.
덕분에 지리산과 그 둘레의 이곳저곳을 속속들이 누비며 돌아다닐 수 있었겠다. 물과 구름과 바람, 꽃과 나무와 자연스레 ‘절친’이 되었다. 어떠한 흐름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니 그리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란 나옹선사의 시가 절로 가슴에 와 박혔다. 비로소 도연명이 그러했듯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조화를 분명한 신념으로 각인하였다. 도연명이 꿈꾸었던 무릉도원을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조금씩 싹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생활은 시가 되어 지극히 순리적이고 자연적이며 따뜻한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인류애와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접사'는 그런 자연과의 친화를 주조하여 빚어낸 풍경으로 카메라와 부속장비를 갖추고 피사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야 얻어낼 수 있는 표정이다. 자연히 무릎도 꿇고 배를 땅에 붙여 엎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촉수가 가닿으면 이미 ‘연리목’이 되었고 ‘엎드려 자세’로 아랫도리의 불알에 압박이 가해질 땐 ‘큰개불알풀’과의 야한 ‘화간’도 성립되었다. 비록 ‘접사렌즈’가 중매선 형국이지만 자연과 내가 은밀한 내통으로 하나 되어 짜릿한 영혼의 결합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의 둥근 우리에 갇힌 한집살이 씨짐승'임을 깨닫는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큰개불알풀’은 여름에 열리는 열매의 모양이 개의 불알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이 좀 거시기 하다 해서 야생화 전문가들이 억지로 ‘봄까치꽃’이라는 예명을 붙여주기도 했지만 꼭 그리할 것까진 없지 않을까. 양지쪽에 피어나 양지꽃, 노루귀를 닮아서 노루귀, 돌돌 말려 피어난다고 해서 꽃마리이듯이 큰개불알풀이란 민망한 이름도 그리해서 얻은 이름일 따름이다. 큰개불알이 있다면 사이즈가 그보다 더 작은 토종 개불알도 물론 있다. ‘큰개불알풀’과 그냥 ‘개불알풀’ 그리고 ‘변산바람꽃’ 이 모두는 한반도의 봄소식을 맨 먼저 알리는 진객들이다.
설을 쇠고 나면 곧장 입춘이다. 절기란 늘 실제보다 좀 앞서는 듯싶지만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며 살라는 지혜의 메시지 아니겠는가. '入春大吉'과 '建陽多慶'의 소망마저 외면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입춘첩을 대문이나 대들보 등에 써 붙이면 ‘굿 한번 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시인은 아주 낮고 작고 여리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가까이 오고 있는 봄을 온몸으로 맞으며 이번 설날부터 미리 봄을 살자고 권유한다.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 야생화들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시인의 접사렌즈는 이들 봄의 얼굴들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순진
The Child With The Star - Isao Sa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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