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민병도
사는 일 힘겨울 땐
동그라미를 그려보자
아직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리
물소리에 길을 묻고
지는 꽃에 때를 물어
마침내 처음 그 자리
홀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여,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 시집『내 안의 빈집』(목언예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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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면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조언을 흔히 한다. 요즘은 ‘인생, 그 뭐 있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말은 과욕을 버리고 자족하면서 살자는 뜻이라기보다는 왠지 적당히 눈 감고 대충 즐기면서 살자는 뉘앙스가 더 짙게 풍긴다. 그런 친구에게 힘들 때 동그라미를 그려보라면 ‘놀고 있네’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있어, 비워서 저를 채우는 빈 들을 만날 것’이라 넌지시 일러준대도 선뜻 따라나설 것 같지는 않다.
공동체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성 가운데 하나가 ‘원만한 성품’이다. 교육 현장에서도 회사 조직에서도 ‘원만’을 가르치고 요구하지만, 실은 둘레와 조직과의 마찰이나 갈등 없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별 탈 없이 조용히 지내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부르곤 했다. 채근담에서는 ‘원만’에 반하는 사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성품이 조급한 사람은 불과 같아서 무엇이든 만나면 태워버리고, 인정이 없는 사람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죽이며,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고집이 센 사람은 고인 물이나 썩은 나무와 같아서 생기가 이미 없으니 큰 공로를 세우거나 복을 오래도록 누리기 어렵다.”
청와대는 이번 한은 총재에 이주열씨를 내정하면서 "판단력과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었으며, 합리적이고 겸손하여 조직 내 신망이 두터워 발탁했다"고 했다. 그동안 물망에 오른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발탁된 데에는 아마 새로운 절차인 청문회 관문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70년대 후반 후암동 독신자 숙소에서 한솥밥을 먹어본 사람으로서, 내가 본 그는 소신과 유연성을 겸비했으면서도 호락호락 원만하지만은 않은 민주적 강단도 아울러 지닌 사람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 경제를 위해 담대한 ‘동그라미’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임을 믿으며 기대하는 바 크다.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은 마음을 둥글게 여미어 보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통 큰 담대함을 스스로 깨우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었다. ‘못다 부른 노래도, 끓는 피도 재워야’하는걸 보면 얼마간의 제동이나 단념도 물론 필요하겠다. 자연에 몸과 생각을 맡기고 허허롭게 동심으로 한 바퀴 돌아 처음 동그라미를 시작할 때의 그 점에 마침내 당도하면 크고 둥근 '텅빈 충만'의 세계 하나를 갖는다.
‘먼 길을 돌아올수록 넓어지는 영토’의 동그라미는 밀실인 동시에 광장이다. ‘세상은 안과 밖으로 제 몸을 나누지만’ 환하게 소통되는 그 광장의 그림은 또렷해도 경계가 없다. 그것은 영혼의 영역이며 사랑의 영토이기도 하다. 삶을 들여다보려면 삶 바깥으로 나오고, 사랑을 보려거든 사랑 밖으로 나오라. 자맥질하는 이 생명의 계절 ‘사는 일 힘에 부치면 낯선 길을 떠나보자’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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