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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비극적인 삶의 무대 / 이선영

sosoart 2014. 3. 15. 16:03

희비극적인 삶의 무대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명훈의 ‘OPTIMIST x 1440rpm’ 전은 자신을 대변하는 캐릭터를 통해 스스로를 관찰하고 대변하며, 이를 통해 공감의 수사학을 시도한다. 전시부제에 나타나있듯이 그는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하며, 그 뒤에 붙은 ‘1440rpm’은 24시간의 분당 회전수(24시간을 분으로 쪼갠 것)이다. 이 전시는 ‘낙관주의자(행동하는 긍정주의자)’인 자신의 일기와 같은 위상을 가진다. 일기이긴 하지만 캐릭터라는 응축된 도상이 주인공인 만큼, 상황설정 또한 상징적이다. 거기에는 이야기가 있지만, 섬세한 문학적 서사보다는 극적 상황의 단면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돌이나 금속 같은 육중한 재료를 다루지만, 표현방식은 기호적이다. 거친 물질을 다루고 있지만 인터넷과 더불어 성장했던 세대답게, 조각의 기본 질서인 인간 역시 기호화되어 있다. 마치 기호들이 3차원적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모습이다. 이모티콘처럼 몇 가지 정해진 표정이 있고 연극적 상황 설정과 부속물을 통해 이야기한다. 인물의 상황을 나타내는 부속물 역시 오브제를 활용한 것이 아니라,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개조심]

 

정교한 비행기부터 이마에 붙은 반창고까지 쇠나 돌 같은 견고한 소재로 일일이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통적인 조각보다는 연극성에 치중한 작품에는 기성품--그의 이전 작품에는 기성품이 활용되기도 했다--을 사용해도 될 법하지만, 작가는 전형적인 조각의 재료로 견고한 물성을 통한 통일성을 꾀했다. 오브제가 현실의 연장임을 강조한다면 조각은 환영의 속성을 강조한다. 조각은 현실과 구분되는 어떤 영역에 서있다. 그러나 환영 또한 현실이 될 수 있다. 환영이라는 매개를 거칠 수밖에 없는 현실은 현대로 올수록 더욱 모호해져간다. 이런 저런 캐릭터들과 성장했을 그 세대에겐 기호들 역시 생명력은 물론이거니와 구체적인 물성을 가진다. 인간은 기호화되고, 기호는 다시 물질화 된다. 그 물질이 다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기호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은 희미한 알리바이에 머문다. 일상문화에서도 캐릭터는 차원 수를 달리하면서 편재한다. 편재하는 기호들은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간편하면서도 보편적인 소통력을 확보하며, 몸이라는 버거운 물질을 과도하게 활성화된 인터페이스 저편에 남겨 놓는다. 

 

이명훈이 창안한 공개 일기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캐릭터처럼 2등신이다. 동그란 얼굴을 감싸는 후드티를 입은 듯한 인물의 얼굴은 검은색 돌(오석)로 만들어져 그 위의 선적인 표현이 어떤 압축된 표정도 쉽게 읽도록 한다. 때로 얼굴은 분홍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피가 도는 따스한 느낌을 살린다. 동글한 얼굴 실루엣이 눈사람이나 오뚜기, 또는 고양이 같은 인상을 준다. 웃고 있기는 하지만 밝게 보이지 않는 모호한 웃음과 깨진 이빨을 가진 악동은 개인사로부터 추출된 부분이다. 작가의 분신과 다름없기에, 특정한 이름이 없는 그 캐릭터는 귀엽지만 의지가 강고한, 어리숙해 보이지만 만만치 않은, 여리지만 독립적인, 순진하면서도 고집스런, 우호적이면서도 냉소적인 면모가 있다. 이러한 양가적 캐릭터는 현실을 블랙 코메디로 간주하는 작가의 생각과 조응한다. 그의 캐릭터에는 비극적 상황도 희극적으로 대처하는 찰리 채플린이나 동키호테 같은 모습이 발견된다. 

 

작품 [번개 기다리기 X 1440rpm]는 우산을 세우고 번개를 기다리는 무모한 장난을 치고 있다. 작품 [개 조심 X 1440rpm]에서는 개처럼 엎드린 작가의 분신이 자신을 건드리지 말 것을 유머러스하게 경고한다. 여러 색의 돌로 모든 것을 만들었고 창문 부분은 얇게 조각하여 LED가 투사되도록 했다. 수직 절벽을 암시하는 거친 돌 위에 캐릭터가 쉬고 있는 작품 [나 잘하고 있는 거냐ㅋ X 1440rpm]에서는 작업하며 살아온 인생을 잠시 뒤돌아본다. 작품 [그래도..웃자 X 1440rpm]에서는 이마에 반창고 붙인 채 씩 웃고 있는 캐릭터를 통해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하는 현대인을 상처 아물 날 없는 권투선수에 비유한다. 작품 [꿈에 X 1440rpm]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비행기를 통해 비상하고자 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눈사람같은 동글동글한 캐릭터는 구멍 뚫리거나 녹아내리는 모습으로 고독하고 슬픈 상황을 표현하기도 한다. 작품 [스물아홉 그리고 서른 X 1440rpm]에서는 서른을 앞두고 성충으로 변태를 준비하는 애벌레 같은 모습으로 분한다. 

 


 [나 잘하고 있는거냐 ㅋ]

 

아이 같은 모습의 주인공은 성장을 거부하고 성인 사회의 게임원칙에 대항한 자기만의 게임원칙을 관철시키려 한다. 둥근 얼굴을 한 겹 더 감싸는 의상은 보호막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막,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중간 지대이다. 예술의 기능과도 유사한 이 보호막 안에서 쓰라린 현실원칙은 차단되고 쾌락원칙, 즉 환상과 망상, 희망과 욕망이 그 한계를 모른 채 활성화 된다. 비현실성은 단지 비현실에 탐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형시키기 위한 거리두기의 결과이다. 현실을 지배하는 원칙은 온갖 의무사항과 금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쾌락원칙이 지배하는 예술은 고유의 상징적 우주를 건설하고 그 안에 거주하면서 ‘마치--같은’이라는 비유법을 구사하면서 세상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한다. 작품 속 재미있는 상황 설정은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보다 더 고풍스런 희극적 인물인 동키호테를 떠오르게 한다. 

 

‘허구를 가장하여 타인과 완전히 단절된 기상천외한 인물’인 동키호테의 ‘오류는 궁극적으로 진실에 공헌’(마르트 로베르)한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리얼리스트적인 방식과 대조되는, 동키호테의 방식이라 할 만한 예술의 기법을 정의한다. 리얼리스트의 방식이 세계를 정면으로 공격한다면, 동키호테로 대변되는 환상적 방식은 도피나 토라짐을 통해서 싸움을 교묘히 피한다. 외향적이기 보다는 내향적인 그는 세상을 향해 뛰어들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물론 작가는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로 간주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은 세상은 낙관적일 수 없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명훈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의 작품에는 멀리보기, 즉 타인은 물론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관자적 시선이 있다. 캐릭터라는 대역을 설정한다는 것은 작가가 삶을 연극무대와 같은 거리감을 두고 관찰함을 뜻한다. 

 

 

 [그래도 웃자]

 

조각 작품이라는 견고한 상징적 우주 속에서 활동하는 악동 캐릭터는 ‘타인에게 고통이나 해악을 끼치지 않는 일종의 과오’(아리스토텔레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희극적이다. 이명훈의 작품은 캐릭터라는 전형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 희극적인 요소가 있다.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 희극의 의미에 관한 시론]에서 비극이 되풀이 될 수 없는 유일한 성격과 상황을 암시한다면, 희극은 우리가 이전에 만났고, 앞으로도 살다보면 다시 만나게 될 성격들을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삶을 흉내 내는 놀이 속에서 작가는 상황의 반복을 통해 웃음을 끌어낸다. 베르그송은 사건들 속에 기계적인 어떤 질서를 부여하면서도 그것들에 그럴듯한 삶의 모습을 지니게 하는 것, 즉 반복은 고전주의 코메디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새로운 상황에 처한 동일한 사람들 사이에서건 또는 똑같은 상황에 있는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건, 한 장면이 되풀이되도록 사건을 꾸미는 것이다. 거리를 둔 모방은 희극의 주요 요소이다.

 

유일한 개체라고 할 수 있는 비극적 인물에 비한다면, 꼭두각시같이 무언가에 조종되는 희극적 인물은 단순화된 모조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희극은 깊은 공감보다는 외적인 관찰에 의거한다. 베르그송은 희극적 유형에서 ‘생명적인 것에 심어진 기계적인 것’을 찾아낸다. 유연한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생동적인 것에 반대되는 경직된 것, 기성적인 것, 기계적인 것 그리고 주의에 반대되는 방심, 요컨대 자유스러운 활동성에 대립되는 자동주의, 이것이 결국 웃음이 강조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결점이라는 것이 베르그송의 결론이다. 전시부제는 물론 모든 작품 제목에 포함된, 하루를 나타내는 코드인 ‘1440rpm’은 생명을 억압하는 사회의 자동적 규칙을 강조한다. 이항대립 속의 역설은 이명훈의 작품의 재미적 요소를 주는 효과이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기계의 어떤 중간지대에서 활동하는 캐릭터들은 사회의 자동화된 규칙 속에서 허둥대는 희비극적인 인물들이다. 거기에는 희극이라기도 비극이라기도 할 수 없는 역설적 세계에 대처하는 작가의 자세가 표현되어 있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