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깡통/ 곽재구

sosoart 2014. 6. 14. 01:19

 

 

 

깡통/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시집『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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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아이슬란드는 25년 전까지만 해도 국영방송사 하나뿐이었고, 목요일은 방송이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방송사도 3개로 늘어나 목요일 개점휴업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 시의 발표 무렵인 1990년에 이미 그 사정이 바뀐 셈인데 시인은 그 나라의 ‘세심한 문화정책’을 부럽게 생각하면서 우리의 텔레비전 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드라마의 내용도 24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다.

 

 TV는 그동안 많이 진화하였으나 아직도 고약한 물건이다. 다채로운 IT기술의 발달로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바보상자니 깡통이니 하고 일축하기엔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고 막강하다. 숱한 여론조사 결과 TV는 언제나 가장 많은 여가시간을 우리와 함께한 쾌락의 정원이었다. 날마다 진보하길 원하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TV는 세상의 부조리를 읽는 유력한 참고서인 동시에 수단이며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양가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전제하고 TV와 문화예술을 생각한다.

 

 문화가 삶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란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수시로 망각되고, 주변화 되고 도외시되었다. 물론 강력한 이유가 있다. 어떤 문화적 형식과 내용도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문화의 종합선물세트격인 TV가 종편까지 가세해 저렴하고도 손쉽게 그 갈증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형식이 다양성을 띠지 못하고 하나로 수렴되는 현상이 안타깝다. 그리고 종편과는 다른 공중파에 대한 양식 있는 시청자의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일부 프로의 종편 따라 하기에 급급한 구성과 내용은 실망스럽다.

 

 ‘문화융성위원회’가 제정 시행중인 ‘문화가 있는 날’이 6개월째다. 그 내용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하루 전국의 주요 영화?스포츠?공연?미술관?박물관?고궁 등의 관람에 무료 또는 할인의 혜택을 주는 것인데, 공연 전시문화에만 한정한 비교적 손 안대고 코푸는 수월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한 달에 하루 ‘깡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지만,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부정적인 요소도 간과할 수 없다.

 

 정부의 문화콘텐츠에서 문학과 인문학이 찬밥신세인 것도 불만이다. 사물과 현상을 폭 넓고 깊게 사유하도록 돕는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이 TV에서 사라지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여전히 대중들을 단순하게 길들이고 깡통 앞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래서 ‘도와주세요!’란 단순한 ‘예능적’ 퍼포먼스에 홀딱 넘어가길 바라는 심보는 아니었을까. 대중적인 ‘재미’를 위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포기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겠다.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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