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대하여 / 복효근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 시집『마늘촛불』(애지,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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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운전을 할 때 마주 오는 차의 전조등 불빛이 직접 눈에 닿으면 눈부심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국도나 지방도 등의 가로등이 없는 도로에서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요즘은 터널에 불을 환하게 밝혀 그런 일이 적지만 주간에 갑자기 어두운 터널로 들어설 때에도 현혹현상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영화관 같은 캄캄한 곳에 갑자기 들어서면 처음엔 주변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한발 앞으로 나아가기도 저어되어 갈피를 잡지 못해 주춤거린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차차 주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와 반대로 줄곧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에도 눈부심을 느끼는데 물론 금세 눈부심은 사라지고 눈은 정상기능으로 복귀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외부의 자극에 감각이 익숙해지는 순응이라 하겠는데 일시적으로 현혹된 눈이 원래대로 회복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순응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을 때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의 차이가 크다. 전자의 ‘암순응’이 완료되기까지는 4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해, 후자의 ‘명순응’ 즉 눈부심이 사라지기까지는 1~2분이면 족하다.
나도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들어간 깜깜한 극장에서 엄마가 잠시 내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던 다정한 손을 기억하고 있다. 극장 밖을 나올 때도 역시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내 눈을 잠깐 가렸었는데, 순간 엄마라는 완벽한 우산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안도했다. 시인이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을 보고선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을 환기해낸 것은 엄청난 서정의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러한 동작은 폐기처분 되었거나 추억의 저 곳간 속에나 처박혀있는 것이어서 좀처럼 인출되기 어려운 품목이기 때문이다. 순응이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순순히 잘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내 눈앞의 이 야릇한 모멸감과 열패감도 슬픔의 일종이라면 누군가 잠시 내 눈을 가려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이 현상 자체가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더 큰 슬픔을 가리는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일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도 이유일 수 있겠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작은 어둠에 지나지 않으며, 반드시 어둠은 옅어질 것이고 슬픔 또한 걷혀지리라 믿는다. 삶의 캄캄한 막장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내 눈 잠시 가려주던 그 손 기억하는 것만으로 세상의 빛이 살아있음을 예감하는 것이니.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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