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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김종구/ 잃어버린 형태를 찾아서- 이선영

sosoart 2014. 8. 10. 22:19

이선영 

 

김종구 / 잃어버린 형태를 찾아서

이선영

잃어버린 형태를 찾아서

 

2014 오늘의 작가 김종구 전 (6.13-7.31, 김종영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형태를 잃어버렸어요! - 쇳가루 산수화’라 붙은 김종구 전의 전시부제는 촉망되는 조각가에게 주로 주어졌던 ‘오늘의 작가’ 전이 전형적인 조각 전시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전에 통 쇠를 그라인더로 갈아 인체를 만들던 조각적 형태는 쇳가루로 그린 산수화로 변했다. 육박전에 가까운 노동이 요구되는 작업에서 관조적인 ‘산수화’로 변모했지만, 이 전시에서의 스케일을 보면 작업 강도가 약화된 것은 아니다. 쇳덩어리는 보다 분자적인 형태가 되어 이합집산하면서 새로운 형상으로 거듭난다. 견고함보다는 가변성이 두드러지며, 허의 공간도 적극적으로 품는 것은 자연의 형태보다는 자연의 과정에 더 충실하다. 뭉쳐있었던 형태는 산과 물, 그리고 글자에 내재된 겹겹의 결과 골을 따라 펼쳐지고 있으며, 공간은 더욱 충만하게 확장되어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잃어버린 형태’는 보다 다양한 요소와 접속할 수 있는 포괄적 장(場)으로 거듭나게 된다.

 

 

 쇳가루 6000자 독백, 가변설치, 쇳가루 광목 PV접착제, 2014 [부분03]

 

제 1전시실의 [쇳가루 6,000자의 독백]은 광목 위에 접착제를 이용하여 고정시킨 녹슨 쇳가루가 만들어내는 풍경과 글자가 장관이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 의지에 의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고, 중력과 산화작용이라는 물리적 과정이 더해져야 한다. 강고한 재료와 대면하여 그 저항을 이겨내고 감추어진 형태를 찾아내려는 조각가의 영웅적인 노력보다는, 변화와 소멸을 포함한 자연적 과정을 작품으로 품는 것이다. 고정시키기는 했지만 지금도 색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브라운의 계열의 색조는 셀 수도 없고 명확히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주어진 한계에 충실한 미적 범주는 숭고한 것으로 변했다. 독백이라는 형식에 내재된 자폐적 우울함, 녹이 슨 채 죽죽 흘러내리는 형상들은 비극적 느낌을 준다. 이러한 묵직함은 비록 가루이기는 하지만 금속이라는 재료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그는 작품이 가지는 실제의 물리적 무게를 시각적으로는 경감시키려고 했다. 

 

980x270cm크기의 대형 캔버스 4개에 녹슨 쇳가루로 형상화된 풍경과 글자는 바닥에서 일정 높이로 띄워놓았고, 전시장 벽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 그것이 육중한 철벽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 도포된 쇳가루라는 점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관객은 쓰여 진 글자의 녹이 뒷면으로 배어져 나온 얼룩들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연금술적 과정에 의해 마술적으로 뚝딱 나온 것이 아니라, 제작 과정이 추적된다. 덩어리(실체)에서 가루(과정)로 방점을 찍은 마당에, 육중한 벽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예술을 지리멸렬하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필연성 없는 무거움이라 할 때, 다소간 불안정해 보이는 형식은 의미심장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쇳가루가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형상 자체는 비극적, 따라서 묵직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녹물의 흔적들은 다 쏟아낸 눈물이 후련함을 주는 것 같은 카타르시스 또한 있다. 

 

 

 쇳가루 6000자 독백, 가변설치, 쇳가루 광목 PV접착제, 2014 [부분02]

 

아래로 향한 움직임은 쇠락과 부패를 연상시키지만, 그 역시 세상의 근본 원리인 운동의 측면이다. 김종구의 작품에서 잠재적인 운동은 중력의 방향을 가시화한다. 제임스 글릭은 중력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의 전기 [아이작 뉴턴]에서, 중력을 생명자체의 원리들과 같은 반열에 놓으면서, 이러한 활성적 원리들만이 운동의 지속성과 다양성, 태양과 지구의 항상적인 가열 등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원리들만이 우리와 죽음 사이에 있다. 만약 이런 원리들이 없다면 ‘부패, 발생, 증식 그리고 생명이 모두 멈출 것이다’(뉴턴) 김종구의 작품에서 녹이 슨 채 아래로의 줄줄 흘러가는 방향은 모든 수직적 존재의 쓰러짐, 즉 죽음을 떠올리지만, 생명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이며 죽음 때문에 생명은 그다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김종구의 작품은 쇠퇴와 죽음을 고려하지 않고 영원함을 구가하려는 미학적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둔다. 

 

거듭해서 흘러내린 쇳가루의의 밀도는 균질하지 않고, 어떤 지역에서는 마치 산이나 해저, 이름 모를 행성의 지형처럼 도톰하다. 쇳가루는 또 다른 덩어리를 형성한다. 거기에는 심층과 표층 양차원에서 고정되지 않은 지표면 같은 물성이 있다. 그것은 그자체로 동떨어진 형태가 아니라, 흐름과 변화라는 맥락 속에 있는 형태이다. 화면 위에는 글자도 보이는데, 인공적인 모든 것을 자연의 과정으로 무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모래로 그려진 만다라를 나중에 다 흩어지게 하는 듯, 존재와 무(無) 사이의 전환이 있다. 3000자씩 두 개의 면으로 나누어 쓴 독백은 한글로 쓰여 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개인적 필체에 쇳가루라는 물성이 더해져 가독성은 없다. 그의 필적은 속도감 있고 날카롭다. 그것은 읽을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다.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중간 중간 지워진 자국도 있는 그것은 작가의 비망록의 일부인데, 명백히 드러내면서도 은폐된 모습이 해석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 쌍이 수직의 흐름을 보여준다면, 글자들은 수평방향의 율동적 흐름이다. 그러나 글자 역시 붓글씨처럼 바닥에 놓고 수직의 방향에서 중력을 이용하여 쓴다는 점, 그리고 또 다른 한 쌍의 풍경에서 관객은 스펙터클하게 펼쳐진 풍경을 좌우로 거닐면서 보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김종구의 작품에서 수직/수평은 곧잘 호환적이다. 그것들은 수직이든 수평이든 이상적인 예술작품이 그러하듯이 막힘없이 흘러가려 한다. 캔버스라는 유한한 틀은 무한한 흐름을 한정짓는 유일한 요소이다. 시작과 끝은 없고 과정만이 있는 캔버스는 더 계속될 수도 있는 화면을 잘라낸다. 제 2전시실의 [하얀 공간]은 녹물로 뒤덮인 건축적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하얀 방이 나온다. 하얀 바닥에 쇳가루로 붓글씨같이 쓰여 진 글자는 바닥에 설치된 CCTV에 의해 산수화처럼 연출된다. 수평과 수직 사이의 차원의 변주는 글자라는 미시우주에서 풍경이라는 거시우주로 변화시킨다. 

 


 하얀공간, 가변설치, 쇳가루 광목 PV접착제 Projector CCTV카메라, 2014 [부분03]

 

통 쇠 조각을 접고 쇳가루 산수화를 시작하던 무렵 김종구는 ‘나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큰 것과 작은 것을 잴 수 있을까?’를 물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과정 속 여러 측면을 성찰함으로서 가능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시리즈가 [Mobile Landscape]이다. 공간 안에 들어선 관객의 발까지 가세한 장면은 여러 차원의 변주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시점의 전환을 가능케 한 기술적 장치에 힘입어 관객은 산수화의 하얀 여백이라는 이상적 공간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쇳가루 산수화’란 이물감을 준다. 다른 전시실의 작품에서는 자석에 붙은 쇳가루처럼 쭈뼛 한 돌기를 세운 산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긴장감이 있다. 불확실한 실체의 시커먼 덩어리들은 뭔가 분진이 가득할 것 같은 탄광촌의 석탄 더미, 무엇보다도 쇳가루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행했을 거친 기계적 공정을 떠올린다. 그것은 자연을 닮고 싶지만, 결코 자연일 수 없는 예술의 면모이다. 

 

제 3전시실의 [무거운 그림과 한 사람]은 가로로 길게 펼쳐진 두루마리 속 산수와 오래 되서 녹슬고 울룩불룩해진 판을 앞에 둔 훼손된 인체 입상이 있는 작품이다. 앞에 놓여 진 너덜너덜한 판들은 그 물성을 벗고 저편의 산수화처럼 무한 공간 속에서 가볍게 떠있을 수 있을까. 여기와 저기 사이의 간극만큼 어떠한 이동이 필요하다. 이동은 순조롭지 않았을 것이다. 통 쇠 조각가에서 쇳가루 산수화가로 변신은 작품과 몸이 파손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결과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글자들은 실존적 사건 이후에 작품의 근본적 변화를 야기했던 성찰적 면모를 예시한다. 인간과 주체를 중심에 놓고 자연을 대상화하는 세계관이 그 생산적 시기를 지나 그 폐해를 드러내고 있는 시점에서, 작가는 인간 주체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서 흩뿌린다. 가루들은 글자도 되고 산수도 되지만 변모의 과정 중에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의 작품은 확대라는 또 다른 차원이 있는데, 이 확대를 통해 무의식적 과정이 드러난다. 

 

 

무거운 그림과 그 사람, 가변설치, 쇳가루 PV접착제 석고, 2014

 

‘쇳가루 산수화’는 지상에 우뚝 서 있는 인간을 기본으로 하는 조각의 문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보다 가까워지려는 과정이 강조된다. 그러나 산수의 바탕이 되는 것은 정제된 재료로 만들어진 글자, 즉 가장 인공적인 발명품의 조합이다. 대상과 기호는 하나가 되길 원하지만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이다. 김종구가 대상과 기호를 중첩시키는 방식은 차원의 간극에서의 조작에 의한다. 차이와 체계를 가지는 문자의 열은 자못 자유롭게 펼쳐진 풍경처럼 연출된다. 문자와 이미지는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고, 상호작용의 미로로 엮인다. 거기에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중첩이라는 상상력, 산수 또는 지형도처럼 펼쳐진 세계의 표면을 이루는 것이 문자라는 것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상상력이 있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신의 책으로서의 자연’이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고를 소개한다. 이러한 자연의 책은 갈릴레오나 뉴턴 같은 과학자들에게는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었지만, 예술가에게는 비망록같은 좀 더 친근한 언어로 쓰여 있을 것이다. 

 

자연이란 ‘단지 신적 존재와 신적 능력의 반영일 뿐 아니라, 신이 직접 쓴 책’(쿠자누스)을 의미한다. 카시러가 말하는 상징적 사유에 의하면, 세계는 신적 상형문자나 성스러운 기호로서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연에 투영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을 이해한다. 대우주는 소우주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진다. 우주는 삼라만상을 포괄하지만 이 삼라만상을 아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우주는 인간을 한 부분으로 품지만, 인간은 그 우주의 원리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와의 관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불릴 수도 있고 가장 작은 것으로 불릴 수도 있다. 김종구의 작품에서 인체로서 나타나는 인간이라는 중심은 미묘한 변화를 겪었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대우주와 소우주를 교차시켰던 인간이라는 중심이 변화하는 과정을 고고학적 방식으로 추적한 바 있다. 자연과 단어는 끊임없이 서로 교차하면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 유일의 거대한 텍스트를 형성해주지만, 세계 내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세계의 일부를 형성했던 언어는 점차 자율화된다. 

 

 

쇳가루 6000자 독백, 가변설치, 쇳가루 광목 PV접착제, 2014 [부분04]

 

미셀 푸코에 의하면 언어의 첫 번째 존재이유였던 사물과의 근원적 유사성을 상실하자마자 제 언어는 분화되었고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근대적 사고를 특징짓는 것은 언어와 세계의 깊고 가까운 관계의 붕괴이다. 사물과 말은 서로 분리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눈은 보는 것으로, 오직 보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미술의 언어 또한 같은 길을 밟았다. 그러나 시각성만을 향해 ‘자율적으로’ 진화해온 조형언어는 모더니즘 이후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기존의 인간중심주의만큼이나 부자연스럽고 오류가 많은 사고였다. 도구적 이성을 통한 자연으로 부터의 거리두기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중간하게 매달려 있는 인간’(장 그르니에)을 더욱 고독하게 했고, 마침내 존재의 불행을 낳았다. 통 쇠를 깍아 만든 인체나 그 가루로 만든 풍경이나 작품에 흐르는 비극적 정서는 일관적이다. 장 그르니에는 [존재의 불행]에서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처한 환경에는 더 이상 인간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서로를 가로막는 막이 쳐졌다. 장 그르니에에 의하면 자연이란 이제 다른 것들보다 좀 더 큰 하나의 기계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대우주가 아니다. 이 기계 자체는 더 이상 고전주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기계설계자나 기계 운전자를 상기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건넬 수도 그가 우리에게 답할 수도 없다. 허공에 남겨진 인간은 어떤 변화를 요구했다. 그것은 근저로부터 재구성될 필요가 있었다. 김종구에게 인간이라는 중요한 형태를 깍고 남은 가루는 이러한 재구성에 재활용되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관객의 몸-지각에 총체적으로 호소하는 촉각적 무대, 일점 원근법을 상대화시키는 변화무쌍한 관점의 이동, 존재가 아닌 과정으로의 변화는 근대의 자율적 조형언어 이전, 또는 이후를 향한다. ‘형태를 잃어버린 후’ 스스로를 칭한 ‘전(前) 조각가’라는 명칭은 기호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의 보다 원초적이며 실재적인 방식에 가까워짐을 예시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 MU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