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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 그림의 뜻 - (65)천년왕국의 평화를 꿈꾸다

sosoart 2014. 8. 10. 22:15

최열 그림의 뜻 

 

(65)천년왕국의 평화를 꿈꾸다

최열

강남 아침저녁 평온함 일렁이고

한들한들 촌색시 따르는 정이 있어

때때로 비를 쫓아 앞산 넘을 제

세속의 기운 씻겨내니 산빛도 해맑아라


江南朝暮帶昇平

細逐村娥若有情

時時隨雨前山渡

洗出塵埃氣太淸


-최산두(崔山斗),「밥짓는 연기[炊煙]」,『신재집(新齋集)』



강희언, 북궐조무도, 1770년대 후반, 종이, 26.5×21.5cm, 개인 소장



당대 예원의 총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강희언(姜熙彦, 1738-1784이전)이 그린 <북궐조무(北闕朝霧)>를 보고서 그림 옆 빈칸에 다음 같은 말을 써넣었다.


“오경(五更)에 파루(罷漏) 치길 기다리다 신발에 서리가 가득 찼네. 저런 말 하는 사람이 어찌 그림의 묘미를 알겠는가. 표암(豹菴)”


그 언제던가, 새벽녘 안개를 뚫고 광화문 네거리의 <고종황제 칭경 기념비각> 앞에 모이던 날이었다. 그곳엔 김세중(金世中,

1928-1986)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우뚝했고 눈 돌려 북쪽을 보면 천년왕국의 궁궐을 파괴한 뒤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 <백악관(白堊館)>이 공포스레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침략자가 우리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풍경이 무척 싫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조만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고 선포한 직후여서 조금이나마 위안 삼고 있던 때였다.

그때까지 광화문 길은 다니기 싫은 곳이었다. 총독부 건물의 위협만이 아니라 워낙 불시 검문이 심해서였다. 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고 지나갈 때면 이순신 장군 동상이며 광화문과 그 앞 해태상도 아름다운 데다 그 무엇보다도 널찍한 길 중앙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그렇게도 보기 좋을 수가 없는 길이기도 했다.


지금 이 길은 세종로(世宗路)라고 부르는데 그 보기 좋던 은행나무를 모두 파낸 뒤 바닥에 돌을 깔아 놓았다. 그 복판에다 가는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는데 의자에 앉은 모습이 실내여야 하는데도 길바닥에 내친 꼴이라 비바람, 눈보라를 흠씬 맞아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 세종로란 이름은 엉뚱한 바가 있다. 1946년 미 군정이 가져다 붙인 이름인데 이건 율곡로(栗谷路)란 이름과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역사에 무지한 자의 독선에 불과한 선택이었다. 지금 저 세종로는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수도 한양을 이룩한 이성계의 육조대로이므로 의당 태조로(太祖路)라고 바꿔 불러야 한다. 율곡로는 연고 없는 이름이므로 폐기가 당연하고 그 대신 세종로라고 바꾸는 게좋겠다. 물론 나는 태조를 보좌하여 조선을 개국한 신하 정도전을 생각하여 저 율곡로를 삼봉로(三峰路)라 하거나 임진왜란을 극복한 전쟁영웅이자 국가재조 군주인 광해왕을 생각하여 광해로(光海路)쯤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논란이 많을 터이니 대충 세종로라고 하자는 것일 뿐이다.


지금 세종로라 부르는 이 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길이다.

육백 년 동안 너비 50m였던 것을 너비 100m로 넓힌 때는 1966년이라고 한다. 50이건 100이건 이보다 넓은 길은 예전 여의도 5.16 광장이라 불렀던 길밖에 없었다. 또 이 길은 처음에 육조대로(六曹大路) 또는 주작대로(朱雀大路)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일제가 강점한 뒤로 광화문통이라고 바꿔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는 육조대로 양옆에 즐비했던 관청을 철거하고 광화문도 옆으로 치워버린 채 그 길에서 총독부가 주관하는 온갖 행사를 벌여 그야말로 총독부 광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시절 숱한 사람들이 그 ‘제국의 열병로’가 되어버린 육조 앞길에 서면 심훈(沈薰, 1901-1936)처럼 “가슴이 미어질 듯” 어쩔 줄 모르곤 했다.


나는 평생 이 길을 지나다녔다. 문득 가슴 미어지는 슬픔을 맛 본 적도, 설레는 기쁨을 누린 적도 있지만, 지금처럼 아득한 적은 없었다. 나라빚이 일천조 원을 훌쩍 넘겨버린 정부, 관료공화국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오늘, 부국강병과 천 년의 평화는 일장춘몽이 었던가, 내가 상경한 지 무려 30년이 넘는데도 시골생활 생각하며 문득 평화를 꿈꾸는 건 누구 탓일까. 그러므로 세종로 복판에 서서 기묘사학사의 한 사람인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어른의 <밥짓는 연기>를 그저 하릴없이 읊조릴 뿐이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