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 / 변화하는 정체성
이선영
변화하는 정체성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영호, 폴 리, 하건주’ 전은 마치 세 명의 작가가 하는 그룹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세 명은 본명과 예명이 총 동원된 한 작가이다. 폴 리(Paul Lee)는 분신들을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면서 자신의 다양한 면을 표현하고자 한다. 얼굴, 악기, 코끼리, 집 등이 등장하는 작품들 역시 한 사람이 했다고 보기에는 다른 불연속적 지점들이 있다. 사회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존중해주지도 않으면서도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하나의 틀로 찍어내면서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서열을 만드는 교육적 과정이 정체성을 만드는 전형적 과정이라면, 작가란 그러한 정체성과 길항작용을 하는 자이다. 그러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할수록 정체성은 불확실해 진다. 특히 예술가가 그렇다. 작가란 매번 자신이 몰입하는 작품에 따라 정체성이 다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굳이 폴 리에게 일관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는 자신이라는 정체성일 것이다. 변화하는 과정만이 유일하다는 어떤 자연철학처럼 말이다.
폴 리, [Chez Paul], 2015년.
폴리_Paper backpack_종이_2014
셋으로 호명된 작가는 다면적인 정체성, 그리고 변신하는 작가를 상징한다. 경영학과에서 미술로 전공이 바뀐 때부터, 그리고 재료와 형식을 계속 바꾸어 가면서 작업해온 과정들이 그러하다. 먼저 ‘하건주’의 작품을 보자. 파리들이 모여 오리 실루엣을 이루는 이미지 앞에 있는 개구리를 표현한 작품은 파리-->개구리-->오리라는 생물학적 먹이 사슬을 생각할 때 혼란을 야기한다. 개미들이 모여 코끼리 실루엣을 이루는 작품에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듯한 상황이 펼쳐진다. 개미는 코끼리라는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건주의 작품은 역설과 불확실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이영호(본명)는 종이로 구겨진 얼굴을 보여준다. 한 장의 종이는 어떻게 접히는가에 따라서 실로 다양한 표정을 만든다. 연속된 면이 아니라 틈이 특유의 표정을 만든다. 접기는 하나와 여럿이 다른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구겨진 표정’이라는 일상어가 있듯이 얼굴에는 씁쓰름함 표정이 읽혀지기도 한다.
작업하면서 마흔을 넘긴 시기, 세상은 씁쓸함을 더 많이 안겨 주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작업하는 것과 무관하게, 세상이 예술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기는 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청년기의 순진하고도 벅찬 기대가 한풀 꺽였음직한 그 나이 대는 삶과 예술이 뒤엉키는 보다 본격적인 국면에 직면하는 시기이다. 얼굴 작품과 연관 지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어린애가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종이 집이다. 작은 집은 나무라는 재료로부터 만들어진 누런 종이의 특유의 따뜻한 느낌이 살아있다. 집이란 자아의 연장으로, 외계로부터 자아를 보호한다. 또한 집은 바깥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전진 기지 같은 곳이다. 개인은 이렇게 주/객체 사이의 완충지대를 필요하며, 놀이나 예술 또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취약한 재료로 만들어진 집은 종이얼굴의 연장이자, 바깥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아이의 초심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을 반영되어 있다.
하건주_Irony_종이에 펜_2013
하건주_Eleph Ant_종이에 펜_2013
이영호_표정들(부분)_종이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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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는 초창기 축음기를 종이로 재현했다. 마치 나팔꽃 무리처럼 또는 축음기 박물관의 소장품처럼 나팔관을 앞세운 여러 가지 모양의 스피커가 있다. 종이 집에 실제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듯이, 이 작품도 다른 것과의 접속이 가능하다. 스마트 폰을 작품 일부에 올려놓으면 소리가 재생된다. 디지털 기기는 자신의 기능을 내부로 숨기고 밑밑한 표면만을 보여주는 반면, 아나로그 기기는 기능이 입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근대에는 기능주의적 아름다움이 찬미되기도 했다. 통화기능 버튼에 전화기 이미지의 기호가 딱 이듯, 소리를 시각화시키는데 나팔관 모양은 적절할 것이다. 종이 스피커 외에 그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사물들의 목록에는 라디오, 바이올린, 배낭 등이 있는데, 그 모두가 전형적인 아나로그 방식의 물건이다. 그렇지만 아나로그 기기는 이제 고물상이나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종이 축음기는 디지털 시대에 아나로그적 감성을 일깨운다.
하건주의 작품이 인식론상의 게임에 치중한다면, 이영호는 정체성의 문제를 캐고 있으며, 폴 리는 아나로그에서 디지털로 변모하는 혁명적 시기의 문화에 대해 비평한다. 각자의 작품에는 서로 다른 극점들이 전제되어 있지만, 그 관계가 가변적일 수 있음을 공통적으로 말한다. 하건주의 작품에서 마치 깨알 같은 글자처럼 보이는 단위들이 이미지를 만드는 칼리그램 스타일의 작품들은 텍스트에 대한 그의 오래된 관심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보는 것과 읽는 것, 그리고 보는 것과 읽는 것 모두에 내재된 상대적 관점을 말한다. 이영호의 작품에서 자아나 자아의 연장은 하나가 어떻게 접히고 펼치는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다. 세상은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가해지는 힘에 따라 다르게 주름이 잡힐 뿐이다. 폴 리의 작품은 마치 모든 인류가 디지털이라는 신대륙으로 다 이주해온 것처럼 떠들어지는 시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적 차원을 말한다.
폴리_Paper Horn_종이,와이어_2014
폴리_Paper Horn_플라스틱 파이프, 종이_2015
물론 그 인간은 확고한 주체성이나 정체성이라는 근대 시기에 제조되고 강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점차 코드를 위한 코드만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는 디지털 문명에 코드를 만드는 것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만드는가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위해 호출한 인간적 차원이다. 굴뚝 산업이 없다면 디지털 문명도 없다. 그것은 본래부터 언어적 존재였던 인간이 활용하는 언어의 최신 버전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주체나 객체에 대한 사고를 전면적으로 바꾼 큰 변화이지만 말이다. 6월에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된 작품 [사람! 들?]은 전선줄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구부려 만든 인간 형태들이다. 하나의 재료로 변주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종이 얼굴 작품과 같은 맥락이다. 3차원 공간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선적 조각이라는 점에서 2000년대 초기의 작업과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전의 [문인조각]이 좌대 위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엄연한 조각이었다면, 다수의 구성요소들을 환경에 배열하는 요즘 작품은 연극적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기념비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망을 통해 말한다. 3차원상의 공간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아나로그적 방식의 작업이지만, 인간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여러 인간적 상황이 표현된 이 작품들은 기계의 부속품에 주로 쓰이는 비인간적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너무 가벼워서 중력마저도 초월한다. 전선을 잘라 만든 길쭉한 인간들은 바닥이 아닌 벽을 걸어 다니는 것 같다. 전선은 어떤 규격에 의해 만들어진 공산품일 것이고 일정한 길이로 똑똑 잘려 하나의 개체로 만들어진다. 신을 닮았던 대지에 우뚝 선 인간이라는 조각적 원형은 중력 및 대지로부터 탈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살과 피로 채워진 육체성을 상실했고 정신이나 영혼이 머무를 만한 그릇도 되지 못한다. 폴 리에게 자연 내부를 비워내는 작업은 차츰차츰 진행되어 왔다. 그는 이전 작품에서 육중한 나무통의 속을 파내거나, 나무의 실루엣만 빛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영호_Meditation-Aura_철, HQI 조명_2005
고유의 질이 껍데기로, 표면이 코드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폴 리의 작품에서 무게 및 질을 상실한 인간은 비극적이지도 희극적이지도 않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힘의 실체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자연인가, 신인가, 예술가인가, 자본인가. 존재 조건의 변화에 따른 존재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인간이 최소화 된 만큼 환경은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온다. 전시장의 파티션은 마치 광장과도 같이 펼쳐져 있다. 탁 트인 공간 속에서 인간들은 각자 홀로 존재한다. 화이트 큐브의 부속품의 하나인 파티션은 무중력적인 공간 속에서 떠도는 인간들을 위한 일시적인 대지가 된다. 이러한 일시적인 판 위에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지고 배치되어 있는 것들은 그 무엇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수 없으며, 상호작용 역시 일시적이다. 전선줄로 만든 인간들은 점차 코드화 되고 있는 인간, 즉 자신을 끄는 중심과 나름대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자체의 무게와 질을 상실한 존재에 대해 말한다.
출전; 울산북구 예술창작소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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