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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 카츠유키-불확실성의 확실성/ 이선영

sosoart 2015. 8. 28. 11:15

이선영 

 

기보 카츠유키 / 불확실성의 확실성

이선영

불확실성의 확실성

 

이선영(미술평론가)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에 3개월 동안 머물러 작업하고 있는 일본의 중견 조각가 기보 카츠유키(Katsuyuki Gibo)는 한국에서의 짧은 체류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시장 하나를 충만하게 채웠다. 한국에서 구한 나무로 깍아 만든 조각상들은 드로잉이나 조각부산물과 같이 결합한다. 결합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특정한 상황을 통해 이야기하는 이 연극적 작품의 주인공은 소년소녀들이다. 소년소녀들은 이 극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배우이기는 하지만, 극적인 행위를 하거나 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 없이 서 있는 그들이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그들이 말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행위의 한 순간을 재현함을 넘어서, 이렇듯 내부로 응축된 모습은 움직이지 않는 조각이 보여주고 말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이다. 뭔가 생각하고 몰두하는 인간상은 정지된 매체인 조각이 전후를 포함한 가장 함축적인 순간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킨다. 그것들은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으로 충만하다. 마치 다 자라지 않은 소년 소녀들이 그 잠재성으로 매력적이듯이 말이다. 

 

 


 

 

 

이러한 성향이 극단화 되면 소년애나 소녀애같은 이상성애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성숙한 어른이기를 거부하는 ‘오타쿠’적인 문화가 강세인 점을 생각하면, 이상과 정상의 관계는 가변적이다. 작품들은 나무 특유의 온기에 더하여 재료를 하나하나 깍아 나간 작가의 온기까지 느껴진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라는 재료와 인간의 관계는 내재적이다. 나무는 인간과 마주 선 존재이며, 차츰 자라나고, 나이테나 옹이들을 통해 시간을 흔적을 내부에 각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각상에서 발견되는 시간의 흔적들은 인물의 상처이기도하고 그만의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 상처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진주의 핵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년과 소녀들은 노화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시간성을 각인한다. 성장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커다란 위험을 동반한 모험이다. 나이테나 나무결, 그리고 옹이들은 나무가 자라고 형성된 시기의 환경과 사건을 각인하고 있다. 생태적 환경과 밀접하게 반응하며 자라는 나무는 조각가의 손을 통해 또 다른 시간이 새겨진다. 

 

기보 카츠유키는 이번 전시에서 조각하고 남은 부스러기들도 함께 설치했다. 공간적 매체인 조각은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간의 차원을 접어 넣는다. 이러한 접어 넣음을 통해 서사의 시간이 펼쳐질 수 있다. 작가는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시간성과 관계되는 방법. 이것이, 내가 조각에 관심을 가지는 큰 이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표현하는 소년과 소녀야 말로 시간의 좌표 속에서 폭풍 성장하는 이들 아닌가. 작품 속 아이 중의 하나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로 다가온다. 아이들은 기성의 존재가 아니라 미지의 과정으로 열려있는 이들이기에, 예술가와 가장 닮은 인간이기도 하다. 예술가-아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배우며, 가득한 호기심으로 놀이하는 자인 것이다. 작품 속의 아이는 소년 또는 소녀지만 그 또래의 인간이 그렇듯 성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 홀로 있고, 아무 말 없이 뭔가에 몰두한다. 모든 것이 모호하지만 3차원 상에 펼쳐진 단단한 조각이라는 형식은 이러한 모호함을 생생하게 구체화한다. 

 

 


 
 



 

오늘날 도처에 빛나는 표면으로 존재하는 가상현실이 과도하게 실감나긴 하지만 결국은 허상인 것과 다르게, 그의 조각은 모호한 인간의 상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조각은 가상화되는 정보사회의 추세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무엇이 있다. 전자가 확실성 속에 불확실성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불확실성 속의 확실성을 보여준다. 불확실함이 확실하다는 역설은 현대과학과 예술이 공유하는 진리이다. 아이에게는 놀이가 몰입의 최고 경험이지만, 수면 또한 그러하다. 아이들은 많이 노는 만큼이나 많이 잔다. 그것이 그들의 성장의 조건이다. 아이들의 세계와 달리,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현대는 발전을 그 사회 자체가 존재할 수 있는 자명한 조건으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성장이 불가능하다. 기보 카츠유키의 작품에는 골똘하게 생각하는 아이, 놀이하는 아이, 자는 아이들이 두루 나타난다. 그들은 순간적인 지각보다는 기억이라는 지속의 시간 속에 잠겨있다. 

 

지속의 느낌을 외연화 하는 것은 조각의 잔여물을 조각상 주변에 펼쳐 놓는 것이다. 작품 [몽유병]에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목조상 주변에 톱밥을 쌓아놓았다, 여자아이는 톱밥으로부터 자라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또는 반대로 단단한 덩어리가 가루로 갈려져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어떤 전능한 존재가 시간을 자유로이 앞으로, 뒤로 돌릴 수 있다면, 형태와 해체는 반대의 극점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본질의 다른 국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주의 먼지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었듯이 모든 존재는 다시 먼지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조각가가 물질적 덩어리에서 잠재적 형상을 발견하듯이, 설치미술가는 재료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현실 공간 속에 펼쳐 놓는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공간에 그림자를 떨구는 릴리프 드로잉을 비롯하여, 조각과 회화 사이의 게임도 보여준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작품은 이미지가 그려진 면들을 3차원 상에서 조합하여 그림자를 가진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고, 종이에 그려진 드로잉은 근처의 조각상과 심리적인 연결망을 가지기도 한다. 

 

 

 

 


 

 

기보 카츠유키의 작품에서 불확실함의 확실함이라는 생각은 재료, 형식, 소재 등에 두루 나타나 있다. 그가 이 전시에서 사용한 나무는 반드시 그 지역에서 구한 것이어야 한다는 작가의 원칙에 의해 한국의 지인을 통해 어렵사리 구한 것이지만, 희망사항과 달리 한국산 소나무가 아니라 미국산 소나무라고 한다. 일본인이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한국에도 많이 심게 했던 미국산 소나무에는 단순한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미국, 일본, 한국의 역사가 착종된 결과물이다. 그가 조각을 시작하던 시기에 애용했던 석재를 현재의 목재로 바꾼 것은 어떤 토양에서 자라는 유기적인 재료라는 의미가 컸지만, 유기적이라는 말을 순수함과 등치시키기에 우리는 너무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다. 나무라는 재료는 조각과 한 세트로 활용된 드로잉에서 종이와 연필이라는 재료로 부연된다. 어쨌든 그는 변화된 상황을 작품에 최대한 반영하려 했고, 그의 주변의 현실, 가령 청주 스튜디오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놀이에 주목하게 된다. 

 

작품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소녀상 주변에 깔린 톱밥은 나선형을 이룬다. 이 소용돌이는 놀이하고 있는 아이의 점차 가속되는 몰입, 또는 확장되어가는 즐거움, 또는 곧 사춘기를 맞을 아이의 혼란스러운 육체적, 심리적 과정을 형상화하는 듯하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성장과 변화란 혼란스럽고도 짜릿하며, 아이와 예술가로 대변될 수 있는 과정 중의 주체를 관통한다. 땅과 바다도 그러한 변화무쌍한 현실계의 이미지이며, 기보 카츠유키의 작품에서 풍부하게 등장한다. 땅이 목조각에 투사되었다면 바다는 드로잉으로 구현되며 땅 뒤에 배치되곤 한다. 전시제목과 같은 제목의 작품 [바다라는 이름의 소년](2013)은 뒤편에 아스라한 필치로 그려진 바다 앞에 서 있다. 나무가 시간의 흐름인 나이테를 각인하듯이, 소년은 자라면서 수많은 바다를 건넌다. 바다를 한 번 건널 때 마다 그의 정체성은 재구조화 될 것이다. 지금도 그는 바다를 건너온 소년의 심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그 속에서 작업하고 전시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올 때 톱 하나만을 들고 왔다고 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재료나 도구가 더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곤란함과 불편함을 도전과 변화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어떠한 결핍이 중요한 전환이 되어주는 사건은 예술에서 빈번히 벌어지곤 한다. 육체적, 정신적 성장은 시간의 축을 따라가지만 동시에 도약하고 비약한다. 바다라는 거대한 실재는 그러한 불연속의 지점들을 가리킨다. [바다라는 이름의 소년]은 바다처럼 불연속적인 지점이 많은 과정 중의 주체를 말한다. 잡목을 압축시켜 만든 나무테이블 위에 놓인 소년의 목각상은 조립된 물건과도 다른 유기적 개체를 강조한다. 같은 나무지만 하나는 물건이고 다른 하나는 유기체로 다가온다. 그런데 소년의 모습은 어딘지 이국적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조카를 모델로 했는데, 그 아이는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양쪽 혈통의 장점만을 합친 듯 예쁘장하다. 

 

오키나와에서 태어났지만, 향후 국적 선택의 문제로 하와이로 이주한 아이는 점차 성장하면서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큰 화두로 삼게 될 것이다.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유년기를 보낸 고향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에 뚜렷하게 새겨질 것이다. 기보 카츠유키의 작품이 반드시 그 장소에서 생겨난 돌이나 나무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은, 본질과 존재가 흐릿해져 가는 시대에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러나 좋은 의미로든 아니든 유목은 현재의 보편적 조건이 되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 자체가 방황과 방랑으로 점철된 유목이다. 소년상에 남성인 작가가 순조롭게 투사될 수 있다면, 소녀상은 좀 더 복합적으로 다가온다. 남성작가에게 다 자라지 않은 여자, 즉 소녀처럼 미스테리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소녀는 소년의 타자다. 작가는 ‘소녀상은 무구, 약함, 잔혹 감, 호기심, 귀여움, 위태로움 등 여러 가지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이미지’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 소녀상들이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만화에서 순수한 소녀는 약자의 전형이지만, 비열한 강자를 대상으로 싸우면서 성장 한다고 지적한다. 남성 작가의 투사인 소년이 멜랑콜리하거나 사색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소녀는 알 수 없는 놀이, 또는 부조리한 게임에 몰두하는 귀여운 괴물처럼 나타난다. 어른은 이러한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의 내부에 있던 타자는 상징계로 대변될 수 있는 사회적 체계에 길들여지고 합리화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 속 타자를 어른으로 승화시키기 보다는 다시 불러낸다. 그것은 어른-정상의 상태를 거스르는 퇴행이 아니라, 어른-정상의 상태를 상대화시키는 역행이다. 전시장속 아이들은 그렇게 작가가 불러낸 타자들이다. 종이나 나무에 구현된 타자들은 유령 같은 면모도 있다. 그들은 유령처럼 여기저기를 넘나들고, 뒷모습이나 그림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타자 특유의 수수께끼 속에 잠겨 있지만, 우리가 서서히 잊어버린 것들을 회귀시키는 전령사들이다. 벽에 걸린 부조들은 검은 배경에 인물형상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그의 드로잉에서도 마찬가지다. 

 

흑/백, 음/양으로 대조된 바탕과 형상의 관계는 뭔가에 몰입 중인 인물을 강조한다. 어둠 속 그들은 환하게 빛난다. 한편 주변의 어둠은 인물의 행위나 생각이 어떤 목적이나 명백함보다는 불확실함을 표현한다. 검정 사각형 안에 한명씩 안치되어 있는 부조에서 검은 바탕은 하얀 얼굴의 실루엣을 도드라지게 하면서 그들은 각자의 내면에 깊이 침잠한 모습을 강조한다. 종이에 그린 드로잉도 마찬가지다. 가령, 종이 위에 드로잉 한 작품 [어획물]은 그 앞쪽에 설치된 소녀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이고, [흙의 소리]는 지면에 뺨을 대고 귀를 기울이는 소녀의 모습인데, 그 모두 확실치 않는 상황과 대면한다. 거기에는 소년은 안중에도 없는 소녀나 들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소녀가 있다. 벽에 붕 띄워 붙여 놓은 작은 소녀상 뒤로 떨어지는 그림자는 구체적 자리가 아닌 추상적 공간에  떠 있는 인간존재를 가시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그림자는 가상 보다는 실재를 강조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육체와 물질의 증거인 것이다. 기보 카츠유키에게 조각과 인간은 그러한 실재이다.    

 

출전; 청주예술창작스튜디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