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백지혜 / 현실만큼이나 상상이 필요한 재현
이선영
현실만큼이나 상상이 필요한 재현
이선영(미술평론가)
전통 가옥 구조가 남아있는 공간에서 열리는 백지혜 전은 마치 그러한 공간에서 나고 자랐을법한 아이와 소녀들이 등장 한다.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가 그 중성적인 배경과 대조되는 형태로 작품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일상, 또는 얼마 전까지 일상이 영위되었던 공간 속 그림은 원래 있던 붙박이 가구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그것은 설치미술이 아닌 그림이면서도 장소특정적이다. 작가는 그림에 여백을 충분히 주어서 마치 그림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과 이어지는 것 같은 환영을 제공한다. 그래서 아이는 실제와 환영이 복합된 공간에서 나오고, 그 공간에 머물고, 다시 그 공간을 통하여 저편으로 사라질 듯하다. 백지혜의 그림에는 환경과의 단절이 아닌 연결, 더 나아가 주어진 환경과의 완전한 동화가 있다. 관객에게 요구하는 바도 교감이다. 그러한 공감이 없다면 백지혜의 그림은 지금은 천연기념물처럼 돼 버린 전통기법으로 잘 그려진 그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바람불던날 109x51cm 비단에채색 2010
화면 속 천진하고 고운 아이들이 실재하는 인물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아이들의 세계 역시 현대사회의 논리에 따라 온통 왜곡되었음을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렇다. 분명히 우리 곁에 피고지고 있었을 자연 역시 자극적인 스펙터클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눈에는 그냥 지나쳐 왔던 것들이다. 애기사과, 수국 등, 작품 속 식물들은 우리 동네에도 피고 지던 꽃들이라는데, 필자는 그것들을 본 기억이 없다. 그 야생화들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면 식물도감을 찾아봐야 할 정도로 낯설다. 이제 전통, 자연, 순수 등은 발굴과 조명의 대상이지 자명하게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융복합의 시대’에 예술 자체도 곧 그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있다. 그것들을 애써 발굴하고 조명해도 별로 표도 안날 정도로 자극적인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현재, 그것을 자신의 미션으로 삼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 한명인 백지혜는 자연 그자체인 아이가 자연과 교감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자연과 교감하는 아이는 아마도 자신의 모습이 투사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 모델을 가지는 타자이면서도 동일자이고, 지금 지각되는 것이면서도 과거의 기억이다. 아이가 자연인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그림은 단순한 자연의 결과가 아니라 철저한 기법 연마의 결과이다. 기법이라는 것은 마땅히 표현할 거리가 없는 작가들이 매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명확한 표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전래된 것이든 창안한 것이든 기법이란 작가의 메시지를 증폭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 1975년생인 작가는 2002년 첫 개인전 이후, 동양화과를 나오고도 채색화와 재료기법을 더 연구하기 위해 진채를 또 전공하고, 초상화 모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 조선시대 중기 초상화를 모사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이 후 전통 초상화 기법을 살려 인물화와 화조화 작업을 병행했다. 이번 전시에도 인물화와 꽃그림이 출품된다. 인물과 꽃은 한 화면에서 교감하고 때로는 무늬가 되어 인물을 장식한다.
봄눈 74x132cm 비단에채색 2010
예고부터 박사까지의 긴 학업과정이 한 치의 소실됨도 없이 온전히 보존된 것 같은 성실한 그림들이다. 작가도 그림을 그렸겠지만, 그림도 작가를 그렸을 것 같은 긴 배움의 시간이 있다. 백지혜의 그림에는 조연도 있지만 화면의 주인공은 아이다. 아이에게 아늑한 보호와 보살핌을 제공하는 이는 화면 바깥에, 그러나 아이와 가까이 있을 것이다. 비단 위에 그려진 은은한 채색은 그들의 오동통하고 투명한 피부를 그대로 살려낸다. 빈 배경을 포함하여, 더불어 등장하는 자연도 따스하고 부드럽다. 햇볕이 잘 드는 마당, 미풍, 신록...심지어 작품 [첫 눈](2015)에 나타나 있듯, 눈발이 흩날릴 때조차도 그림은 화사함과 온기를 잃지 않는다. 꽃과 인물화에 집중해왔던 작업 경력을 생각해 볼 때, 꽃과 함께 있는 여자아이들은 일상만큼이나 설정이다. 또는 선택된 일상이다.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아이가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티 없이 자랄 수 있다는 것, 또는 자라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기 보다는 거대한 희망사항인 것이다.
민들레 홀씨를 날리는 아이가 있는 작품 [바람 불던 날](2010), 그리고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을 잡으려 양팔을 뻗는 아이가 있는 [봄 눈](2010)은 다른 영원한 봄의 세계 같은 유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있다. 아이는 어느새 커서 숙녀티를 내지만, 자연과 교감하는 그녀의 태생적 감성이 변하지는 않는다. 작품 [사춘기](2015)에서, 꽃의 가지를 잡아서 코앞에 대고 있는 여학생의 옆모습은 그 또래의 현실이 과도하게 이고지고 있을 고뇌를 봄눈 녹이듯 날려버린다. 꽃은 자연 뿐 아니라 장식을 통해서도 등장한다. 작품 [손 안 에 머무르다](2015)에서, 꽃목걸이를 바라보는 아이의 머리에 꽂힌 도라지 모양의 핀, 그리고 작품 [스쳐 가는 여름](2015)에서 옷과 양산에 새겨 있는 꽃무늬들이 그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이 곱다. 그것은 반투명한 얇은 비단 뒤에서 발색하고 앞에서 세밀하게 그린 기법과 무관하지 않다.
스쳐가는여름 84x108cm 2015
여기에다 배접지를 붙이면 색은 더욱 화사해질 것이다. 연희동 작업실에서 본 작업 과정 중 인상적인 것은 얇은 비단 천이 마치 수틀에 끼워 넣은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종이나 캔버스 천처럼 표면 위에서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수놓듯이 표면과 이면이 연동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발색이란 2차원적 표면을 뛰어넘는 또 다른 차원을 주요한 변수로 포함시킨 결과가 아닐까. 어쨌든 예술에서 자연스러움은 자연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다. 자연은 방법을 통해 접근되어질 뿐이다. 비단에 그린 것은 예술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숨 쉬던 것들이다. 가령 한복에 그려진 문양을 생각해 보자. 요란스럽지 않게 화사한 모습은 한복의 분위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백지혜의 방식인 비단에 그리기는 섬세한 비단에 무늬를 넣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배접하듯이 안감을 대면 그려진 무늬는 우리 앞에 더 가까이 당겨질 것이다.
한복 무늬까지는 아니지만, 백지혜는 갤러리에 걸리는 그림 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이 소통되기를 연구해 온 작가다. 비단에 천연 재료의 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은 색의 깊이를 잘 드러낸다. 색감을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 인물보다 먼저 그린 것은 꽃이었다. 색 했을 때,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꽃일 것이다. 그래서 화가들을 그렇게도 꽃을 많이 그리곤 한다. 꽃은 2006년의 개인전 ‘쉬어가다’와 ‘5월의 정원’에서 대거 등장했다. 전통 화조화로 마당과 동네 어귀의 꽃들을 그린 그림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우리 주변의 꽃으로 한국의 색을 알리자’는 기획으로 [꽃이 핀다]는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손에 담긴 이야기’ 전을 계기로 다시 인물화로 돌아왔다. 꽃만으로는 작가가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충분히 만들 수 없어서였다. 꽃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의미는 인간을 통해서 더 잘 전달된다.
손안에머무르다 45x56.5cm 비단에채색 2015
손안에머무르다(부분)
의미란 곧 인간적인 의미이다. 그래서 의미를 벗어나고 싶은 예술을 하고자 할 때 인간은 곧잘 배제되곤 한다. 물론 누보로망을 비롯한 현대 예술의 탈 인간주의적 경향은 의미를 인간(정확히는 ‘휴머니즘’)에 한정시키지 않으려는 더 큰 야망을 가졌지만, 그 결과가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대개 물화된 현실로 귀결되곤 했다. 무의미한 세계를 동어반복적으로 외치는 현대예술은 자학적인 면이 있다. 백지혜에게 인물화는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는 장르였고, 여성인 자신과 친숙한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이다. 물론 아이들은 2002년 첫 개인전부터 등장하는 소재였지만, 최근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기억을 소환하는데 방점이 찍혀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여자아이들이고, 점차 나이대도 높아져 궁극적으로는 중년인 자신을 포함하여 여성의 생애주기를 모두 포함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일그러지지 않은 반듯한 모습으로 재현될 여성의 일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요즘 작품에서, 어린 나이를 선호하는 것은 그들이 순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델들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복 입은 여학생도 등장하게 된다. 여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꽃을 불러들이며, 인물화와 화조화를 결합시킬 수 있게 한다. 작가에 의하면 여성인물화는 억압된 장르다. 여성은 모자상의 일부로, 예쁘고 단정한 모습으로만 재현되어왔다. 여성은 꽃처럼 아름답게 대상화되어 왔던 것이다. 대상화된 여성들은 자신을 타자화 시키는데도 익숙하다. 여성들 역시 남성적, 가부장적 시선, 그 욕망에 가득한 응시를 통해 여과된 여성의 모습들에 에워싸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백지혜의 작품 속 여자아이들도 예쁘다. 그러나 미인 또는 미래의 미인으로서 예쁜 것은 아니다. 또한 그녀들은 해맑다. 그러나 남성에 의해 조형화되어야 할 백지상태로서의 해맑음은 아니다. ‘주체’로서는 대상이 되어야할 수동적 존재들이 스스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사춘기 54x70cm 비단에채색 2015
그자체로 함구하고 있는 자연이나 현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에는 교란적 요소가 있다. 현대의 작품이 괴로운 실존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치게 어두운 면이 있듯이, 백지혜의 작품도 지나치게 밝은 면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아니어도 어두운 그림은 많이 그려진다고 말하며, 그림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가 꽃이나 아이들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만약에 세계를 정/반/합의 관계로 본다면 백지혜의 작품은 정(正)에 해당된다. 현대의 갤러리와 미술관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반(反)에 관련된 것들이다. 반(反)이 왜곡된 현실을 교정하는 건강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현실에 대한 동어반복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둡고 비판적인 예술은 그렇게도 기존의 현실과 친화적인 것이다. 그것은 ‘밝은’ 현실이 예술에게 내어준 작은 해방구에 만족하면서 맘껏 자신의 어둠을 발산하고 해소한다. 정(正)은 너무도 희귀해졌다. 부정이 만연한 분위기 속에서, 정은 긍정되어야 할 가치로 다가온다.
백지혜의 지향이 담긴 작품들은 사실이면서 당위이다. 현실이면서 허구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작가의 경력에서 찾아진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자신의 주변을 그려왔지만, 동시에 전통에 대한 학습과정에서 초상화 모사를 해왔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옛 그림을 모사하고 때로는 훼손된 문화재를 복구하는 작업은 그림에서 그림, 기법에서 기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모델에서 모델로 전사되는 시뮬라크르는 현실에 우선권을 주는 재현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기법은 그대로 전수되기도 하지만 당면한 현실에 의해 변형되기도 한다. 그것은 변형을 위한 변형이 아니라, 현실과 근접하려는 예술의 욕망이 낳은 변형이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은 다른 차원이며 재현은 시대의 관습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관습이고 역사인 한 바뀔 수 있다. 사라진 관습을 복구, 또는 재해석하는 것은 자연적 과정이 아닌 인위적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건비밀인데 95x36cm 비단에채색 2005
작가는 십 수 년 간 그러한 노력을 해왔고,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될 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별천지나 기괴한 것만 추구하던 현대의 작가들이 일상적 현실의 가치를 뒤늦게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려 했을 때 그들이 어법이 너무 거칠어서 아무 쓸모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한 자신의 솜씨가 정작 풀 한포기 하나 제대로 표현하는데도 서툴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점만 지적해 두기로 하자. 백지혜의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곱디고운 모래 같은 느낌이 거칠고 선정적이며 단절적으로 다가오는 현대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신기해 보이는 이유다. 옛 초상화를 모사하고, 방송 드라마 작업에서 옛 초상화의 형식에 실물모델(배우)의 얼굴을 대입시키며 작가 주변의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들은 그림이란 것이 작가가 느끼는 현실만큼이나 상징적 언어임을 알려준다.
언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표현하게 해주지만, 어느 순간 불충분할 수 있다. 굳이 표현하려는 자만이 기존 언어의 불충분함을 느낀다. 언어는 표현을 담기만 하는 무기력한 틀이 아니다. 예술은 언어적 실험이 일어나는 장이다. 실험은 과격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이루어진다. 아홉 식구 대가족이 한 동네에서만 35년 살았던 작가의 이력은 그러한 실험이 매우 찬찬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작가는 일상이긴 하지만 이제는 보편적일 수 없는 그러한 일상을 살아왔다. 백지혜의 그림은 빛바랜 옛 사진첩에서 꺼낸 이미지 같으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숨 쉬는 생생한 색을 입고 현전하는 엇갈린 시공간 감각이 있다. 그것은 현재이면서도 기억이다. 작가는 지금도 끝없이 사라지고 있는 기억을 그린다. 사라지는 현재를 기록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달리, 기억하고 싶은 현실은 생생해야 한다.
쉬어가다 125x80cm 비단에채색 2015
백지혜의 작품에서 기억과 생생함은 그렇게 연결된다. 물론 백지혜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작가이기에 사진이나 컴퓨터 같은 매체적 경험을 반영한다. 현실을 재현하는 대표적인 매체가 된 사진조차 대상을 제대로 재현하고 작가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장치들의 동원과 작가의 선택을 기다린다. 사실에 충실한다 해도 그것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인 것이다. 재현은 상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상은 현실화될 것을 요구한다. 오히려 대놓고 환상적인 작품이 더 고정된 방법론을 고수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기법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작가는 모델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하루 종일 놀아주고 백장 가까운 사진에서 한두 장을 건진다. 배경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 또한 선택을 기다린다. 이러한 기본적인 과정을 최종적으로 완성시켜주는 것이 진채에 의한 색감이다. 실제의 색감을 작가는 전통 재료로 비단에 채색하는 방식에서 찾았다.
백지혜는 자연과 일상과 예술을 한데 모은다. 그것도 매우 담담하고 은은한 방식으로. 그러나 백지혜의 작품에서 허구와 상상의 몫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허구와 상상의 측면은, 그녀의 그림이 지금은 희귀해진 전통기법에 의해 그려졌다든가 작품 속 인물이 너무 밝고 긍정적이라든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위아래로, 또는 좌우로 여유 있는 공간의 처리방식에서 찾아진다. 물론 동양화과를 다녔으니 여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화면 속 공간은 클로즈업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공간 속 흩날리는 꽃잎들은 식물과 인물을 연결시켜준다. 꽃나무는 자기의 일부를 각질처럼 떨어뜨리며 화면 속 인물이나 관객의 후각에 가 닿으려 한다. 그러한 방식은 시뮬라크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 원자론자인 루크레티우스는 대상에서 끊임없이 유출되는 시뮬라크르들의 존재를 말했다고 전한다.
꽃단장 41x51cm 비단에채색 2010
그에 의하면, 물체들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종의 얇은 막들이 공기 중에서 사방으로 흩날린다. 이것들이 바로 시뮬라크르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볼 수 있다. 냄새, 연기, 열기 등은 대상들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며, 가장 위 표면에 있는 원소들은 그 만큼 더 빨리 떨어져 나갈 수 있다. 모든 집적체의 정확하고 미세한 모사물이 존재를 가정한 원자론자들의 상상은 격세유전적으로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현대와 조응하는 면이 있다.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모사는 결국 기원의 문제조차 흐릿하게 하면서 원본과 복제의 구분에 근거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무너뜨린다. 그림은 오랫동안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주체 앞에 마주 선 거울은 투명하지 않다. 그것은 조각난 신체를 가상으로 봉합하는 장치이다. 봉합부분이 터지면 분열이 야기된다. 그것을 다시 온전히 봉합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섬세한 장치가 요구된다.
백지혜의 경우에는 화면 밖에 또 다른 거울을 설정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여자아이들의 관심사인 자신의 외모는 화면 밖 보이지 않는 거울에 맞춰진 시선에 의해 암시되곤 한다. 가령, 좌우로 긴 작품 [꽃단장](2007)에서, 아이는 왼편으로 치우쳐 있고 시선도 왼쪽 밖을 향해 있다. 그림으로서는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구도 이지만, 작가는 사각 프레임을 넘어 화면 밖의 공간과의 연결을 꾀한다. 이 작품의 바깥에는 거울이 있다.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거울로서의 회화는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거울에 의해서만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작품 [이건 비밀인데](2005)를 보면, 귀엣말을 하는 여학생들이 오른쪽으로 심하게 몰려 있지만, 왼쪽의 여백은 그녀들의 감성에 색감을 부여한다. 얼룩 진 그림자로 처리된 신록을 바라보는 여학생이 있는 [쉬어가다](2015)도 그렇다. 여기에서 여백은 인물들이 서 있는 자연 또는 현실적 공간인 만큼이나 상상적 공간으로 제시된다.
꽃단장 69x44cm 비단에채색 2007
재현에 필요한 것은 현실만큼이나 상상인 것이다. 현실과 상상은 서로를 요구한다. 백지혜의 작품에서 여백은 아이와 여학생의 상상이 글로 씌여져야 할, 또는 관객이 써 넣어야할 빈 서판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인물화를 통해 담고자 했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남아있다. 백지혜에게 그림이라는 거울은 현실적인 만큼이나 상상적이다. 거울은 총체적인 모습이 아닌, 불완전하게 잘려진 단편을 반영할 뿐인 상상적인 장치다.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움직임은 불가피하게 재현의 경계를 맞딱뜨리게 한다. 그림은 이곳과 저곳을 매개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족적이라면 연결을 위한 완벽한 플랫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의 옛 그림이 존재하는 방식 역시 근대에 성립된 분과로서의 예술과는 차이가 있었다. 미술작품이 보여지는 대상으로 한정된 것은 서구에 있어서도 짧은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오늘날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있는 관습이다. 일상으로부터 영감 받은 작품들은 일상에서도 소통되어야 한다. 그것은 출판이나 방송 등 미술제도 바깥으로의 확장성을 가지는 백지혜의 방향성과 닿아있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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