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이덕용 / 바깥으로의 회귀
이선영
바깥으로의 회귀
이선영(미술평론가)
12월 19일에 춘천의 창작 공간 아르숲에서 오픈하는 이덕용의 ‘게릴라 모듬’ 전에는 작은 소우주들의 향연이 있다. 작가는 [Litttle things] 시리즈에서 온갖 종류의 유리병을 수집하여 그 안에 작은 모형과 오브제들을 넣어 각각의 개성으로 빛나는 우주를 연출했다. 원래 공공예술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전시장에 있는 시간은 별로 안 되고, 전시 기간 중에 전시장 바깥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을 예정이다. 야외설치를 위해 누군가에게 미리 허락을 받거나 예고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게릴라식이다. 작가는 바깥에 작품들을 몰래 갔다 놓고 그것들과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소통하겠다는 생각이다. 분실 및 파손 위험이 크기에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이 최종 작품으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 유리병에 수집품을 넣는 것이나 사진에 수집품을 담는 것이나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할 수 있다. 확대를 통해 작품의 무의식적 요소가 더 강하게 드러날 것이다.
[Litttle things] 시리즈 중에서, 2015
자신의 손이 행했지만, 그것들이 왜 한 한 자리에 모여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은 작가 스스로에게도 끝없는 해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발신자가 정해놓은 하나의 메시지가 아무런 손상 없이 수신자에게 전달되리라는 이상이 있지만, 그러한 투명한 소통에의 이상은 예술로서는 반쪽만의 승리다. 수집된 사물들로 연출되는 이덕용은 최근작품은 가식이 되기 쉬운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편에 선다. 무의식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세계지만, 자세히 보면 각자 다르게 해석될 겹겹의 이야기가 깔려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조각의 기본으로 간주되어온 인체 모델링 작업을 해왔던 그로서는 미시세계로의 급격한 이동이다. 등신대나 그 이상이 거의 손가락 크기 보다도 더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버리고 다른 문법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바꾸는 것은 불안감을 줄 것이다.
모든 새로운 출발에는 불안이 깔려있지만, 그것은 긍정적 긴장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에 설치할 작품이 그토록 작다고 하니 의외다. 평소에 작은 작업을 했더라도 바깥에 ‘전시’될 것들은 커야 하지 않을까. 작은 아이디어를 뻥 튀기고 잘 가다듬어서 상품가치가 높은 멋진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크게 서있는 작품으로 조각가로서의 솜씨를 널리 뽐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고로 조각다운 조각이라 함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기념비적인 형상과 그 변주 아닌가. 그러나 이덕용이 요즘 몰두하는 [Litttle things] 시리즈는 기념비적으로 서있기는커녕, 눈에 잘 안 띄어 깔아뭉개질 수도 있는 취약한 것들이다. 손안에 들어 올만큼 작은 형태들이 유리병들에 담겨 눈에 띄지 않게 세상에 흩뿌려지는 방식은 전형적인 조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조각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알록달록한 색채들은 작은 크기와 맞물려 장식적 효과까지 자아낸다.
전형적인 조각 작업이 열심히 할수록 작업실만 좁아지는 한계를 느낀 이덕용은 창작공간 아르숲 입주를 계기로, 작업 환경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작업, 특히 구체적인 물질을 다루는 조각 작업에는 불가피하게 노동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 노동에 끌려 다니다 보면 작업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그동안의 어떤 작업보다도 놀듯이 재미있게 진행했다. 노동 강도가 너무 세서 뚝뚝 끊길 수도 있는 작업과정은 끝없는 몰입으로 변모했다. 특히 얼마간의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 생산성을 위해 전문적으로 분화된 작업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됐다. [Litttle things] 시리즈는 그림으로 친다면 대작에의 강박 관념 없이 가볍게 수행한 드로잉 같은 작품이다. 이 작업을 위한 사전 드로잉은 존재하지 않는다. 드로잉 같은 방식은 이후의 복잡한 마무리 작업에서 사라지는 발상 단계의 신선한 측면이 오롯이 보존될 수 있다.
그래서 현대미술에서는 드로잉이 그자체로 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하며, 늘 작품의 완성된 뒤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 연구자에게는 ‘완성작’만큼이나 귀중한 가치를 갖곤 한다. 드로잉이 순차적으로 정해진 페이지 위에 생각나는 대로 그려지는 것이듯, 이덕용은 조각적 차원의 드로잉을 위해 유리병을 선택했다. 수집된 병,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이라는 구성요소가 정해진 후, 작가는 그 규칙대로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은 책상 위에서도 할 수 있다. 물론 책상 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책상머리에서 생각만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스튜디오 안에는 이러한 미시세계의 연출을 위해 수집해온 수많은 오브제들이 널려있다. 깔판이나 인조 잔디같이 오밀조밀한 질감을 가지는 건축 모델용 재료들은 기본이고, 작은 생활용품부터 이런저런 자연물까지 종류별로 늘어놓고 화가가 물감을 선택해서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 듯이 그렇게 각자의 색깔로 빛나는 소우주를 건설한다.
마치 초현실주의자의 자동기술법처럼, 오브제들은 ‘손에 닿는 대로’ 선택되어 잘려진 병에 들어가 각각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덕용의 새로운 작업이 다소간 무작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초현실주의자들의 발견된 오브제나 꼴라주, 자동기술법이 완전한 무의식의 결과는 아니듯이--초현실주의자들의 프로이트에 대한 짝사랑과 달리, 프로이트는 그들의 작품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그의 작품도 얼마간 그의 취향이나 조각가로서의 훈련 등이 배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업의 시작은 ‘우연적’이었다. 유럽에 갔을 때 사온 작은 모형을 수년간 작업 테이블의 한켠에 붙여 놓았다가 불현 듯 선택한 것이다. 무의식의 창고에 뒤죽박죽 쌓여있는 사물들은 어느 순간 각별하게 다가오고 작품으로 길어 올려 진다. 전혀 새로운 것이 당장에 작품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피상적인 소재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소재주의에 불과한 한 100개가 넘는 세계들로 증식될 수도 없다. 내 곁에 있다가 나의 일부가 된 후 그것들은 나로부터 나온다.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이 나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민낯이며 맨몸이다. 그게 아니라면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바깥에서의 전시는 작가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발견적 가치를 준다. 작가는 ‘무심히 길을 걷다 문득 날 올려다보는 손톱만한 인간을 발견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하는 생각을 했다. 가령 거리의 볼라르같은 구조물 위에 어떤 작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은 놀라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갑작스런 만남을,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질 해석의 순환 고리를 야기한다. 선재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없다. 설령 그것이 있다 해도 다양한 맥락에 의해 달리 말해질 것이다. 그것은 화이트 큐브라는 중성적 공간이 아니라, 삶의 굴곡 면을 따라 배치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릴라 모듬, 야외 설치 전경
제23회 일본 나요로 대학부 눈조각대회
그러나 풍자적 성향이 있는 작품 맥락으로 보자면, 이 작은 작품들은 삶의 자리에 미미한 위치를 차지할 뿐인 예술계 또한 빗대는 것은 아닐까. 이덕용의 [Litttle things] 시리즈는 모두들 주목해야 하는 큰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라, 각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빛을 발하는 반(反)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작가는 삶에서부터 수집해온 것들을 다시 삶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것들은 마치 그가 ‘세계 여행을 겸하는 맛에’ 수년 동안 참여해온 눈 조각 대회의 작품들처럼, 한시적인 시공간만을 점유하고 사진으로만 남은 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예술이라는,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미술작품도 세상 속으로 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술사에는 남김없이 소통되고 사라짐을 꿈꾸었던 진정한 영웅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술은 대가없는 선물과 같은 것, 의미를 주고받는 과정 외에 뭔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꼬이기 시작한다.
[Litttle things] 시리즈의 면면을 보면, 규모만 작아졌지 그가 이전 작업과 전혀 다른 것을 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인체 모델링에 기초한 그의 이전 작업도 (연극적)상황 속에 놓여 일련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고,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인체)이 있었으며, 다채로운 색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 작품과의 지속성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생각이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조각을 좀 더 가벼운 매체로 변주시키겠다는 의지다. 초기 작업에는 이중성에 주목했지만, 이번 프로젝트처럼 작은 규모로 더 많은 상황을 연출해볼 수 있는 실험을 통해 이중성을 넘어 다중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각각의 세계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나란히 이어지며, 어느 한군데에 방점이 찍혀있지는 않다. 시작과 끝이, 중심과 주변이 불분명한 상대적인 우주이다. 상대적인 우주는 평등을 떠올리니 훌륭한 관념이지만, 그것이 당장 내 앞에 마주선 인간의 경우에 적용된다면 괴로울 것이다.
감정구름, 사진, 2009
감정포장, 납, 철, 2010
이덕용은 초창기 작업부터 겉보기와는 다른 인간적 상황에 대한 탐구를 해왔다. 그의 초기 작업인 [감정구름](2008-2009)은 사람의 감정이 시시때때 바뀌는 상황을 구름으로 표현했다. 무엇인가를 가리는 구름, 변화무쌍한 형태를 가지는 구름, 비로든 눈으로든 변할 수 있는 축축한 구름은 감정 덩어리를 닮았다. 작품 [품다](2012)는 그렇게 지나가는 구름을 담고 싶어 만든 것이다. 하트 모양의 빈 틀은 그곳을 지나칠 감정-구름을 잠시나마 잡아둘 것이다. 감정-구름의 머무름은 포토 존으로 잘 활용되곤 했던 그의 작품처럼, 찰칵 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감정포장](2010)의 단계로 가면, 경쾌하고 유희적인 요소가 다소간 풍자적이 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체를 납으로 싸서 리본으로 포장한 것처럼 연출했다. 너(나)에게 보내는 나(너)의 모습은 철저히 포장되어 있다. 그것은 상대에게 있어 보이려고 하는 갖가지 위장술이 인간관계부터 사회적 관계까지 편재하는 현실을 풍자한다.
예술은 가장 솔직한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지만, 내용/형식의 이원구조가 있는 예술은 위장술이 펼쳐지기에 이상적인 장이기도 한 것이다. [상대적인 상대](2014-2015) 시리즈는 맨몸 형태의 인체에 옷을 그리거나, 옷을 입은 인체를 피부색으로 칠하는 등, 보이는 것과 다른 인간의 면면을 표현했다. 얼굴 표정 또한 이중적이다. [생존법](2014-2015) 시리즈에서 원판은 무표정인데 채색이 웃는 모습, 반대로 원판은 웃는 모습인데 채색이 무표정한 모습 등,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표현했다. 같은 방식은 회화에서도 실험되었는데, 작품 [이덕용 지각권법](2015) 시리즈는 뒤에서 불빛을 비추면 다른 표정이 나오도록 고안된 것이다. 거기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처럼 한 얼굴에 두 모습이 있다. 작가는 얼굴을 그린 갱지의 이면에 또 다른 표정을 그려 넣었다. 그래서 빛을 비추면 안경 벗은 사람이 안경을 쓰기도 하고, 회사원이 피에로가 되기도 한다.
품다, 스텐레스스틸, 2012
무제, 합성수지 가변설치, 2013
물론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작품 [생존확인사살](2015)처럼 자살 시도로 얼룩진 손목을 부여잡아 주는 따뜻한 손이 겹쳐지기도 한다. 그리고 설치 작품 [무제](2013)처럼, 인종차별주의를 경고하기 위해 백인의 두상과 흑인의 두상을 마주하고, 피부색을 바꿔 넣기도 했다. 특히 동양화의 진채를 떠올리는, 앞뒤로 그리는 회화작업은 이중성이 한 몸의 두 얼굴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가면 뒤에 본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면이 얼굴이다. 표면 뒤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과 바로 연동되는 이면이다. 그의 미묘한 조각술은 하나의 덩어리에 이중 코드화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문화에서 동일성보다 차이가 선호되듯, 다름이 진정한 다름이라면 좋을 것인데, 본질은 하나이면서 달라 보인다는 것이 괴리감을 준다. 유희의 단계를 넘어선 피곤한 위장술이 서로의 관계를 겉돌게 하고, 최소한의 필요를 뺀 접촉을 금기시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 삶에는 서로 만나기 위해 안달이다가, 서로 피하기 위한 안달인 상황이 펼쳐지곤 한다. 원격 소통의 시대에 그마져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난점이라면 난점이다. 그래서 작가는 타자를 피해 자신에게 몰두한다. 그래서 자신과의 싸움을 [덕용 戰](2011)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스타일로 변주할 수 있기에 위장을 암시하는 머리카락을 생략하고 맨머리로 허공과 싸운다. 상대의 미운 면은 나의 미운 면이기도 하다. 인간은 타자에게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창은 수없이 많이 뚫렸지만, 거기에서도 인간은 집요하게 자신만을 바라본다. 그래서 자기 분석적인 작품은 무겁고 우울해지곤 한다. 이덕용의 작품은 표층과 심층이 다른 세계에 대한 분석적 요소가 있지만, 지나치게 무겁진 않다. 물젖은 솜처럼 아래로 푹 가라앉기 보다는 풍선처럼 떠오르려 한다. 귀들로 머리카락을 대신한 작품 [千耳 덕용](2012)은 천수보살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상대적인 상대 시리즈, 합성수지 나무, 2015
생존법 시리즈, 합성수지, 나무, 2015
千耳덕용, 합성수지, 2012
인체를 중심에 놓는 (서양)조각에서 신을 반향 하는 인간이 주체/객체라는 이원적 구조 속에서 고통--그러나 이상적 관념에 바탕 하는 그 세계관은 초월과 극복의 역사, 즉 진보를 낳기도 한다--받는다면, 동양에서 신은 자연에 편재한다. 무신론이나 신의 부재라기보다는 신이 편재하는 동양적 세계관은 ‘진보적’이지 않지만 평화롭다. 피 흘리는 예수상과 달리 보살상의 미소에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덕용은 진공의 우주 속에서 유아독존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타자의 소리를 들으려 한다. 그에게 타자는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 것이다. [천이덕용]의 머리통에 돋아난 것은 메두사처럼 자신을 보는 상대를 돌로 굳혀버리는 그런 머리카락이 아니다. 자신이 보는 자신과 타자가 보는 자신과의 괴리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기애가 강한 부류들은 타자를 물화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그렇게 변모한다. 이덕용의 작품에서 귀는 한 두개가 아니라 여러 개로, 다성적으로 들려오는 우주의 소리에 귀를 열겠다는 자세다. 최근의 [Litttle things] 시리즈는 그러한 태도가 시각화 된 것이다.
출전; 춘천 창작 공간 아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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