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김범중 / 무한의 테두리
이선영
무한의 테두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장지위에 연필로 수많은 선을 그어서 만들어진 김범중의 작품은 매우 섬세하다. 미세한 것을 표현할 때 흔히 머리카락 굵기랑 비교하듯이, 어떤 관객은 그의 작품들에서 일정 간격으로 배열된 머리카락 샘플 같은 이미지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너무 구체적 이미지라면, 굵기와 밝기와 질감의 차이가 무한한 계열로 펼쳐져 있는 모노크롬 드로잉이라고 해두자. 표면을 도포하는 수많은 선들은 그림의 뼈이자 살이고, 그림의 피하층이자 피부이다. 연필만으로 구현된 김범중의 모노크롬은 시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촉각성과 청각성 같은 다른 감각과도 연결된다. 시각성, 특히 관념적인 시각성이 행하는 것은 환원이다. ‘회화의 조건’같은 모더니즘적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도 회화의 ‘순수성’을 가늠하는 미학적 판결문같이 작용하곤 한다. 그러나 관념적 수사가 동반되는 추상적 환원은 미술을 결코 풍부하게 하지 않았다. 미술을 자율적이지도 자유롭게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뭐라도 갖다 붙일 수 있는 텅 빈 서판같은 것이 되었을 뿐이다.
2015년 12월 전시전경(담갤러리)
새로움에 역사라는 명목까지 더해진 모더니즘적 수사학에 남은 것은 이해관계와 맞물린 권력뿐이다. 화면의 평면성을 확인하는 그리드 구조, 흑백 톤으로만 이루어진 금욕적인 색조, 무한한 반복과 차이로 이루어진 수행성 같은 면모는 김범중의 작품을 모노크롬 회화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회화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로의 ‘환원’은 확장을 위한 최소한의 단초 역할을 한다는 차이가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이리저리 임의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안에 촘촘히 접어 넣은 것과 관련된다. 거기에는 시간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의 작품은 관념적 시각성에 대응하는 육체적 청각성의 감각이 두드러진다. 김범중의 모노크롬에는 흑백 사진 뿐 아니라, 피아노의 흑백 건반, 하얀 종이 위의 음표나 글자들, 밤하늘에 하얗게 빛나는 별 같이 다양한 연상의 고리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그것은 관념적 시각성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공(共)감각으로의 확장이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드나 소용돌이 구조 자체에 확장의 방향성이 감지된다. 전자는 수직 수평으로, 후자는 나선형으로 확장된다. 하나는 무기적인 것이 다른 하나는 유기적인 것이 연상된다. 일련의 단위를 이루는 그리드 구조 같은 보이지 않는 틀 속에 하나씩 쟁여져 응집된 물질-에너지는 풀려나와 풀어헤쳐질 기회를 기다린다. 연필을 가늘게 갈아 드로잉 한 모노톤의 화면은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다. 선들은 마치 별들의 궤도처럼 자기가 가야할 방향을 알고 있다. 작가가 그어놓은 잠재적인 수직/수평선의 한 칸에 자리하는 선의 뭉치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가진다. 한자리에 있어도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각각은 자기만의 궤도로 운동한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은 각각의 정류(定流) 상태를 조명한다. 그의 작품은 수도자가 경전을 읊듯, 서예가가 문자를 쓰듯, 연주자의 손이 익히 아는 곡을 연주하듯, 물고기나 새가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여 나아갈 곳을 감지하듯, 그렇게 확고하게 행해진 것이다.
Moon 장지에 연필 160 x 120cm 2015
시간 속에 행해진 행위는 공간 속에 흔적을 남긴다. 일정한 크기의 공간인 화면에는 시간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어떤 작가는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주어진 공간 속에 숫자를 차례로 기록하기도 했지만, 조형언어는 숫자라는 코드보다는 더 풍부할 수 있다. 물론 풍부한 만큼 모호할 수 있다. 김범중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이 가시화되어 있다. 이에 비한다면 보이는 것/공간/정지는 유한성으로 묶어질 수 있다. 평상시에 우리는 시간이 아니라 시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비가시적인 시간이 질적이라면, 가시적인 시계는 양적이다. 하나하나 손으로 행해진 산물은 무심한 시간의 기록과도 차이가 있다. 실물을 보면 연필에 의해 긁혀진 종이의 섬유들이 일어나 있을 정도다. 닥지의 섬유질이 마찰에 의해 표면을 벗어난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흔적들로 인해 매우 촉각적이다. 특히 더 많은 연필 흔적들이 각인되는 그리드 경계부분은 거칠거칠하다. 미세한 그림들은 필촉 보다는 환영을 강조하면서 그 너머의 세계를 보라고 권하지만, 그의 작품은 미세함과 촉각성이 함께 한다.
사방팔방으로 확장되는 이미지들이 귀로 들려온다면 촉각적일 것이다. 음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작가는 음질의 해상도가 뛰어나면 음의 질감이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음은 차갑거나 따뜻하고, 어떤 음은 거칠거나 부드럽고, 어떤 음은 딱딱하거나 푹신푹신하다. 어떤 음은 심연으로 가라앉거나 공중으로 붕 뜨고, 어떤 음은 돌돌 말려거나 쫙 펼쳐져 있다. 현대사회는 음을 음원이라는 코드로 단순화시키려 하지만, 그렇게 환원될 수 없는 소리의 세계가 있다. 김범중은 추상적 코드가 아니라, 실재계에 있는 소리를 가시화 하려 한다. 작가가 집중하는 부분은 몸과 물질이 직접 만나는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그리드 구조 자체가 텍스추어를 주는데, 그의 작품에는 그리드 안에 또 다른 텍스추어들이 자리한다. 일어난 섬유질들은 마치 피부를 그렇게 긁혔을 때와 같은 강도로 이미지를 각인한다. 피부라면 그것은 상처다. 상처는 아물 틈도 없이 일정 시공간을 반복적으로 쇄도하다가 치유되지 않은 채 봉인된다.
Flatrum 장지에 연필 160 x 112cm 2015
상처/치유란 현대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정도로 널리 통용되는 개념--대체로 타자에게 준 상처 보다는 자기가 입은 상처만을 생각하는--이지만, 원래 그것이 원초적인 상처인 한 치유란 것도 불가능하다. ‘탄생 자체가 트라우마’(프로이트) 라면, 상처란 죽음에 이르러야 치유가 되는 것 아닌가.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인정하는,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태도만이 그나마 치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아닐까. 오늘날 ‘생업’이 아닌 예술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은 매 순간 그러한 죽음을 감지한다. 어두운 경계면으로 사라지는 선들의 반복이 있는 김범중의 작업에는 죽음을 끌어안는 태도가 있다. 밝음이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듯, 죽음 사이에 삶이 있다. 삶이 유한하다면 죽음은 무한하다. 두 무한 사이에 유한이 끼어있다. 화면이라는 일정한 표면을 충만하게(또는 허무하게) 채우는 것(또는 비우는 것)은 각기 분할된 영역 안을 순환하는 궤적들에 내재된 강도와 밀도다.
그것은 작가가 투여한 에너지가 종이와 연필이라는 물질과 반응한 결과물로서, 그 자체로 작가의 현존과 부재를 증거 한다. 그것이 행해진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듯이 말이다. 정밀한 명암의 계열은 주어진 자리에서 충만하게 맥동 친다. 칸칸이 나누어 놓은 것에 미세한 차이들을 부여하는 작가는 물질마다 다른 진동계수를 가짐을 강조한다. 외적인 질서와 균질함은 차이를 견인하기 위한 장치이다. 현실은 겉보기의 다양함과 달리, 기계가 돌아가는 단조로운 소리만 들려온다.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현실과 다른 소리를 원한다. 그의 그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시간이 다가오는 소리, 그리고 멀어지는 소리들이다.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쌓여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는 것 같은 변화를 야기한다. 변화가 일어나는 경계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확정지을 수 없다. 밤이 낮이 되는 순간을, 무지개 색의 경계면을 확정지을 수 있는가.
Eigen Frequency 장지에 연필 160 x 112cm 2015
김범중의 작품에서 소리들은 미묘한 경계면을 오고가며 끊어질 듯 이어진다. 소리들, 그리고 그 소리가 통과하는 시간성은 가늘게 깍은 연필로 힘 있게 그은 소리들이 무한히 축적된 결과물이기 때문은 아닐까. 관객은 레코드판에 침을 올려놓고 작가가 평평한 판에 새겨놓은 음을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이퀼라이저처럼 공간에 퍼져나가는 시간의 이미지를 기록한다. 음향기기의 지표는 코드에 불과하지만 손의 흔적은 코드를 벗어난다. 들뢰즈가 베이컨의 회화론에서 말했듯이, 자판을 두들기는 손가락은 코드와 관련되지만 붓(김범중의 경우엔 필기구)을 잡은 손은 탈코드화 되어 있다. 20014-2015년에 제작된 작품들은 그리드 구조 외에 방추 형태들이 여러 중심들에 근접하고 멀어지는 형상도 발견된다. 거기에는 수직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시공간/소리가 있는가하면, 회오리치는 시공간/소리도 있다.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들은 다양한 파장을 만든다. 김범중의 작품은 그러한 파장들을 지진계처럼 기록한다. 있음/없음, 옳음/그름 사이의 수많은 계열들을 양단간의 두 가지 항으로 줄어들어 들고 있는 사회에서. 예술은 실재에 내재한 무한한 차이의 계열을 복구시키려 한다. 그의 작품은 흑과 백이 아니라 그 사이 펼쳐져 있는 수많은 단계들이 음미할 만 하다. 시점도 종점도 중요치 않으며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차이가 중요할 뿐이다. 차이에의 지향이 있는 예술은 아무리 차분해 보여도 사회와 대립된다. 물론 예술을 지배적 사회와 대립시키는 것도 그러한 거친 이항대립의 소산일 것이다. 현실정치를 보면 그러한 이항대립이 얼마나 체제 유지적인지 체감할 수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은 안정적으로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장치다. 합(合)을 예상하고 있는 정(正)에 대한 반(反), 정해진 수순에 따른 야합, 정치가들이 늘 되뇌이는 ‘국민’이 접하는 뉴스에 매일 나오는 메시지인 것이다.
Stereodium 장지에 연필 160 x 120cm 2015
이러한 서사를 반복할 때, 예술 또한 진부한 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적 편의를 위해 단순한 논리로 환원된 예술에 관한 담론들은 예술에 대한 영원한 오해를 낳게 한다. 그러나 예술은 현실과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현실과 화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술은 현실과 차이가 있는, 현실과 평행한 우주를 이룬다. 예술을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예술을 행하는 이만이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은 과학과도 다른 차원에서 이해받기 힘들다. 이항대립에 근거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비한다면, 차라리 독재 체제는 취약하다. 현실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서로 반대되어 보이는 듯한 두 개의 항이며, 그러한 점에서 두 항은 연속적이다. 중요한 것은 불연속, 단층의 지점을 가늠하는 것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불연속의 지점들은 수많은 선의 교차로 더욱 어둡게 형상화된 부분이다. 한 오라기의 빛도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강항 중력을 가지는 블랙홀처럼 어둡고, 종이와 연필의 앙금이 많이 남아있는 부분이다. 거기에서 나오고 사라지는 선들은 연속적이다.
김범중의 작품에는 불연속과 연속이 교차하는 지점들이 있다. 불연속의 지점에서는 비약과 도약이 가능하다. 오늘날 새로운 개념의 역사와 과학, 철학은 이러한 불연속의 지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예술과 가까이 있다. 표면에서 들려있는 실오라기 같은 것은 이미 차원의 변주를 암시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는 들려있는 것보다 더 많이 눌려있는 물질의 궤적이 있다. 양적으로는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어두운 경계면들로부터 질적인 변화가 야기된다. 화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분절화 시키는 그리드 구조는 체계라기보다는 합류점이나 상호접면이다. 빛마저도 빠져 나올 수 없을 만큼 진한 그 거칠거칠한 영역은 가장 밀도가 있으면서도 무(無)이자 공(空)의 영역처럼 다가온다. 무와 공은 죽음만큼이나 무한을 떠올린다. 선들로 채워진 그 어두운 영역은 무한을 테두리 지으려는 불가능한 몸짓들의 축적이다. 그러나 그 영역은 특히 기호를 다루는 예술가들의 깊은 관심사였다. 기호의 현전은 지시대상의 부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Sonodium 장지에 연필 55 x 45cm 2015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나를 절망케 하는 두 심연을 만났다. 그것은 무와 공이다’라는 말라르메의 말은 인용하면서, 말라르메가 무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라르메는 그것의 비밀스런 생명력과 힘, 신비를 시적 임무에 대한 명상과 그 성취 속에서 맛보았다고 평가한다. 말라르메는 부재 속에서 현존을 포착했고 또한 힘을 포착했다. 마치 허무 속에서 기이한 긍정의 능력을 얻듯이 말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말라르메가 언어에 관하여 한 모든 언급은 사물을 부재하게 하는 말의 능력, 부재 가운데 사물들을 다시 나타나게 하고, 순수한 부재가 긍정되는 곳에 위치한다. ‘Stereodium-presence & absence’라는 부제가 붙은 김범중의 2015년 개인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시화시키는 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한다. 종이 표면과 연필 입자의 앙금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의 화면은 중력이나 자기 장 같은 보이지 않는 물리적 힘에 의해 배열되는 듯한 입자가 감지된다.
가령 발표 작품 중 하나인 [달]은 지구와 중력관계로 묶여 있다. 보이지 않는 힘은 과학만큼이나 마술을 연상시킨다. 가장 보편적인 예로 중력을 들 수 있다. 중력을 발견한 것은 최초의 과학자이자 최후의 마술사로 평가되곤 하는 뉴턴이다. 막스 야머는 [공간개념-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에서, 근대물리학이 공간을 연속적이고 등방적이며 균질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공간의 물리적 성질은 공간 안에 있는 물체들에게 경계나 한계를 정해주며, 이 물체들이 무한히 커지거나 작아지지 못하도록 한다. 절대공간에 대한 정의는 일정한 간격들로 나뉜 김범중의 평면을 연상케 한다.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절대공간은 그 본성 때문에 어떤 외적인 것과도 관계하지 않으며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같다’고 말했다. 절대공간과 시간이 현존함으로서 명료성과 엄밀성, 확실성과 명확성이 보장된다. 브로노프스키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뉴턴의 절대 공간이라는 가정은 ‘어느 곳에서나 우리 부근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평평하고 무한하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지적한다.
Stereodium 부분
즉 뉴턴은 마치 우주전체가 평면공간인 것처럼, 한 손에 자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시계를 들고 이곳과 마찬가지로 모든 곳이 평면인 것처럼 공간의 지도를 작성 하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공간은 매우 엄격한 물리학 법칙인 것 같지만, 뉴턴조차도 생애 말년에 가서는 신이나 신의 속성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된다. 우주가 정교한 시계라면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켰을 제 1 동자(prime mover)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글릭은 뉴턴의 전기 [아이작 뉴턴]에서 뉴턴은 신을 의무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해의 기틀로서 믿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과학자에게 세계는 ‘극도의 단순성과 모든 비율의 조화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이 구조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힘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뉴턴은 신학, 연금술, 역사 같은 분야에도 관심을 두었다. 제임스 글릭은 연금술사들이 원기왕성하고 살아있는 힘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마법사들은 과학자들의 전형을 제공했다.
제임스 글릭에 의하면, 과학자-연금술사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맨 처음 입자들을 응집시킨 것은 무엇인가’. ‘불활성 원자들이 서로 들러붙게 해서 수정 식물과 동물을 생성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같은 문제였다. 오늘날 예술가들도 과학자들만큼이나 보편적인 원인을 알기 원한다. 그러나 보편적 힘에 대한 가정이 기계적 결정론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뉴턴은 결정론자가 아니었지만 그 후계자들은 결정론을 신봉했다. 시작과 다른 결과에 대한 역설은 예술사에서도 무수히 반복되곤 한다. 그리드 구조로 나타나는 등방적인 공간, 입자와 허공,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끌려 들어가는 선들, 우주가 탄생, 또는 소멸하는 듯한 장대한 광경 등이 있는 김범중의 작품에는 신비와 합리가 공존한다. 신비와 합리와의 공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아이작 뉴턴같은 부류에서 전형적이다. 시간, 중력 등,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려는 노력이 있는 작품의 해석을 위해 필요한 사람은 뉴턴일 것이다.
Memories of You 부분
사각형이나 타원형으로 이루어진 일정한 단위구조를 채우는 선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만들어내는 궤적, 또는 궤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궤도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지만 결코 반복되거나 정확히 예측될 수 없다. [아이작 뉴턴]에 의하면 뉴턴은 태양계의 중심이 정확히 태양이 아니며, 오히려 요동하는 공통의 중력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행성 궤도는 정확히 타원이 아니었고, 동일하게 반복되는 타원도 아니다. ‘태양은 공전할 때마다 새로운 궤도를 그리는데, 모든 행성 운동의 합에 따라 좌우 된다’ 즉 동시에 많은 운동의 원인을 고려하고 쉽게 계산할 수 있는 정확한 법칙으로 운동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절대시공간의 개념은 닫혀있는 듯 하지만 열려있다. 균질적인 패턴과 방법론으로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김범중의 작품 또한 근대과학이 열어둔 보편성에 닿아있다. 작가에게 한 장의 그림은 당기고 미는 보편적인 힘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우주이다. 그것은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이다.
작가는 시공간의 한 토막에 무한한 주름을 접어 넣는다. 이렇게 확대된 시공간은 충만과 연속의 효과를 준다. 김범중의 모노크롬 드로잉은 시간의 흐름을 지각하게 해준다. 예술에서의 시간은 소외된 노동에서와 같은 단조로운 선율과 달리, 불연속의 지점이 산재하는 작가의 시간은 다성적(polyponic)이다. 문자와 달리 조형언어는 단선적 진행이 아니라, 시간적 복수성을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도 정신분열증을 연상시킬 만큼 그 연결망이 복잡하다. 현대문학도 의식의 흐름의 수법을 통해서 단선성을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즉각적인 소비를 원하는 대중문화 영역은 단선성이 지배한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현대 작가를 인용한다. ‘그녀는 현 순간을 가두어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것이 이해에 의해 완전하고 밝고 깊게 빛날 때까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그것을 완전히 채워놓고 싶었다’ 이러한 소설은 계속적인 현재로 제시된다.
Memories of You 장지에 연필 120 x 160cm 2015
[시간과 소설]은 ‘시간의 홈(time-coulisses)’(토마스 만)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더블린의 하루가 [오딧세이]에서의 긴 세월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하루 동안의 생활에 해당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시간의 홈’은 한 가족의 생활 속에 전 인류사를 나타낸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사람들을 ‘눈으로는 공간적 형태로 보고, 마음으로는 시간적 형성물로’ 본다. 사랑하는 사람 또한 그렇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란 이름은 내게 있어서 하나의 집단적 이름이었다....그녀는 항상 다른 아르베르티느로서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내 입술을 그녀의 뺨까지 가져가는 이 짧은 시간에 나는 열사람의 아르베르티느를 보았다’ 김범중의 작품은 눈앞에 떠 있는 달에 대한 지각부터 ‘당신에 대한 기억’에 이르기 까지, 추상적 화면이라는 현재적 시제를 취하는 내적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과 닿아있다. 그의 작품에서 겉으로 보이는 엄밀함은 그러한 자유로움을 위한 장치가 아닐까.
김범중에게 자유로움은 소리의 특징인 유동성으로 나타난다. [시간과 소설]에 의하면, 이때 ‘과거는 현재 위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생각’(버지니아 울프)되며, ‘지난날의 현재들을 과거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미드)이다. 김범중의 작품은 입자들이 매순간 다른 힘에 반응하듯이,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소리에 대한 비유 또한 그러한 유동성과 관련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시선은 그 자체로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레비나스)고 본다. 데리다에 의하면 레비나스는 소리를 빛 위에 위치시킨다. 생각은 ‘빛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소리와 유사한 요소 속에서’(레비나스) 이루어진다. 소리의 조형적인 물질화를 행하는 색깔이나 형태 보다는, 소리와 신체적인 것의 진동과 관계되는 청각은 우리로 하여금 신체의 내적 진동을 지각하게 하고, 현재와 비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어떤 기억을 활성화한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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