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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조- 오래된 사물과의 대화/ 이선영

sosoart 2016. 6. 27. 11:21


남희조 / 오래된 사물과의 대화

이선영

오래된 사물과의 대화

  

이선영(미술평론가)

  

남희조는 40대 후반에야 뒤늦게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작업의 양이나 질 면에서 청년 시절부터 미술을 전공한 이 못지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 나이쯤에 별로 한 일도 없이 조로현상을 보이는 ‘문화예술인’들에 비한다면, 그녀는 지금 작업의 청년기를 맞아 활활 불타오르고 있으니 부러울 따름이다. 남희조는 까다로운 심사기준을 통과하여 미국에서 예술가로 영주권을 받았으며, 얼마 전에는 동양인 최초로 그리스에 있는 국립 테살로니카 고고학 박물관에서 큰 전시를 열기도 했다. 2015년 석달간 박물관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그 전시의 한 작품처럼 그리스 역사와 문화와의 대화이다. 작품 [In Dialog with Greek History 4](2014)는 한나라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문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기법은 금속판 위에 옻칠이다. 작가는 서양의 기원이라고 말해지는 그리스 문화의 상징과 동양의 기법을 결합한다. 

 

 


 Cylinder Views 2015, Metal


 

작품 [words 4](2014)는 동서양 모두에 존재하는 도자기가 등장하지만 옻칠이라는 기법은 동양에 있다. 고고학 박물관에서의 현대미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은 고대 유물들과 어울림을 꾀하게 했다. 옻칠은 수차례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해야 하기에, 많은 겹과 결을 가지는  사물의 깊이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작가가 많이 사용하는 금속 역시 녹슨 형태를 통해 고색창연한 사물의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적합하다. 그리스어를 잘 모르는 이에게 문자는 소통을 위한 투명한 도구이기 보다는 불투명한 물질성으로 다가온다. 수수께끼 같은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의 능선은 화면을 가르며, 흐르는 선에 떨어지는 빛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난다. 미지의 것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작가가 선택한 소재와 기법의 합작이다. 상품이 단번에 파악되어 빠른 생산/소비주기에 포함되는 것과 달리, 모호하게 드러나는 오래된 사물과의 마주침은 거듭되는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한 사물들에 대한 해석을 단축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숫자가 매겨진 가격이 붙어있기도 한다. 대중매체에서 예술의 신비화, 또는 터무니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선택되는 수사학은 예술 작품의 숫자로의 환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단숨에 읽혀지는 신호로 바꾸는 행위로, 소비사회나 독재체제와 부응하는 소통방식이다. 신호의 수신이라는 단순한 방식은 미지의 대상과의 대화와 거리가 있다. 그러나 경제나 정치의 수동적 소비자와 달리,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대화이다. 그것도 끝없이 이어지는 오랜 대화. 순회전시로도 이어진 테살로니카 고고학 박물관에서의 전시 성공은 내년의 해외 전시들을 앞두게 했는데, 새로이 만날 그 문화들과의 대화를 위해 작가는 해당 지역 연구에 힘쓰고 있다. 밤에는 그 나라에 대한 공부, 낮에는 답사 및 기법 연구 등으로 하루가 짧기만 하다. 세계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사이에 내가 있다. 


나도 너도 아닌 그 사이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대화는 생산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화는 필요하지만 충분히 실행되지는 않는다. 특히 ‘영향에 대한 불안’(해럴드 블룸)이 팽배한 예술분야에서 타자와의 대화는 쉽지 않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에 의하면, 낭만주의 전체를 망라한 계몽주의 이후의 모든 추구 로맨스는 자기 자신을 다시 낳고 자기 자신의 위대한 독창자가 되려는 추구이다. 저자는 낭만적 추구자의 특징을 자기 자신의 비전으로 채울 정신적 공간의 요구로 정의한다. 자기만으로 가득 채워진 그 공간이 타자가 숨을 쉴 수 없는 진공 상태와 다름없음은 분명하다. 그 심리적 바탕은 나르시시즘으로 지적된다. 그것은 ‘자기보존 본능의 자기 본위주의에 대한 리비도적 보충물’(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에 관하여]는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로 구별되며, 리비도는 대상으로 향하기 이전 애초에 자아에 있었다고 한다. 

 

 


Synesthesia, 2015, Wood and Metal


 

타자에게서 자신만을 읽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기애적 성향과 현대의 개인주의와는 잘 어울린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와의 거리 또한 매우 가깝다. 예술가에게 성인군자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지만, 자기애의 극점에서 타자를 도구화하는 일이 예술계에도 비일비재함은 자기만을 외치는 작품들이 왜 그리도 천편일률적인가에 대한 답이 된다. 그들의 독백에는 한결같은 대사들이 발견된다. 나와 그들, 이상과 현실, 소외와 소통, 상처와 치유 등등...여기에서 예술은 나란 존재를 발신자로 하는 진부한 계몽의 영역이 되었다. 자기만의 소굴에서 자기만을 외쳐대다가 모두 비슷해진다는 역설, 그리고 모두 비슷해지기에 블루 오션이었던 예술계 역시 레드 오션이 되었다는 사실만 지적해 두기로 하자. 남희조의 방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대화이다. 가령 그녀의 작품에는 기둥 형상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여기와 저기를 잇는다. 작품 [cylinder view](2015)는 고고학 박물관이 있는 장소의 오래된 성곽이 있는 도시를 담았다. 


둥글게 돌아가며 보면 성에서 바다 끝까지 이어지는 풍경이 자리잡고 있다. 그 작품은 그리스에 많은 석조 원기둥과 동시에 동양의 두루마리를 연상시킨다. 기둥을 펼쳤을 때 한 폭의 동양화처럼 일련의 풍경이 완성된다. 동양화처럼 흐르는 선과 녹이 슨 고풍스러운 표면이 근처에 놓여있는 그리스의 옛 항아리들과 이물감 없이 어울린다. 작품 [synthesia 3](2015)는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같은 우리의 장승과 비슷하다. 수직적 기둥이라는 형식은 아래와 위를 이어준다. 그리고 남성/여성으로 설정된 마주하는 두 형태는 리드미컬하게 구부러진 금속선에 의해 수평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녹슨 금속선은 심장 모양으로 꼬여있다. 나의 심장, 또는 너의 심장이 아니라, 그사이에 심장이 뛰고 있다. 뛰는 심장만이 둘을 잇는 가교가 되어준다. 박물관의 많은 석조관들 사이에 세워진 작품 [vital from of tree](2015)는 원기둥에서 나오는 철선들과 열매처럼 매달려 있는 작은 도기들이 마치 나무같은 구성 요소들을 갖춘다. 인류의 상상력에서 기둥이나 나무는 지하-지상-천상의 연결 기능을 가진 보편적 상징이었다. 


미지의 세계와의 이어짐은 신비롭다. 신화나 종교같은 상징적 우주에 살던 이들은 그러한 신비로운 의미망에 속해 있었다. 남희조의 작품은 타자와 대화하기 위해 이러한 연결망 외에, 자기를 비울 것을 요구한다. 금속선과 색 있는 전기선으로 구의 모양을 형상화한 작품 [freedom from avarice 2](2013)는 텅 빈 마음을 표현한다. 서양의 유물 한가운데 속이 텅 빈 형상을 본 이들은 거기에서 동양의 공사상을 연상할지 모른다. 수레바퀴의 살을 다 떼어내고 나무로 된 밥솥 뚜껑에 동양화를 그려넣은 작품 [cycle of nature](2012) 역시 비어 있는데,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순환과 공사상’을 표현한다. 자신을 비워내어 홀가분해진 이는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물결치고 굽이치는’ 역동적 흐름을 표현한 작품 [exuberant rondos](2013)는 서로 다른 것이 마주한 것 같기도 하고, 하나가 둘로 나뉜 것 같기도 하다. 둘 사이의 간극과 틈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서양의 얼굴 구조에 부처의 미소가 섞여있는 [figure](2014) 시리즈는 대화하기 위해 마주한 타자의 얼굴들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


출처: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