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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의 공간 유희/ 김성호

sosoart 2016. 8. 11. 20:29
변주의 공간 유희

김성호(미술평론가)



I. 자라나는 조각
조각가 계낙영은 1970년대에 ‘나무’라는 단단한 재료를, 흐물흐물 풀어 헤쳐지는 운무(雲霧)처럼, 혹은 하늘거리는 포목(布木)처럼 때론 굴곡이 가득한 피혁(皮革)처럼 연성체의 무엇으로 변화시켜 내는 일에 골몰해 왔다. 단단한 나무의 몸통을 깎아서 위와 같은 유연한 형태들로 표현하고자 했던 시도들은 그로 하여금 나무를 종잇장처럼 납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유형의 기술들을 구사하게 만듦으로써 휘어지고 늘어진 추상표현주의적 조각의 여러 가능성을 탐구하게 만들었다.   


조각가 계낙영

1975년 《앙데팡당(independant)전》 출품작에서처럼, 3.6m의 사각 기둥을 깎아서 휘어진 얇은 판재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얇디얇은 조각체를 남겨 두기 위해서 전체 몸통으로부터 베어 내고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977년의 개인전 당시의 다른 작품들도 다르지 않다. 평론가 이일의 평처럼, 그것은 ‘자라는 생명체’와 같은 기품이 있는 조각이었다. 
그가 나무 조각을 버리고 돌 조각으로 전환한 것은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85년의 일이다. 작품 보관이 용이한, 견고하고도 영구적인 소재의 필요성으로 인해 시작했던 신중한 모험이었지만, 이내 1986년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을 수상하고, 《제1회 서울현대조각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1986)하게 되면서 그의 조심스러운 전환은 획기적인 사건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자나 후자나 동일하게 〈돌로부터〉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시각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리적 특성과 정반대의 물성을 가진 돌이라는 표현 매체에 접합시킨 작품”이라고 계낙영이 자신의 ‘작가 노트(1988)’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작업은 경직된 돌이라는 재료로 천이나 가죽 등의 유연한 재료의 물질성과 속성을 유감없이 가시화시킨다.    
그의 돌 조각을 ‘무한히 증식해 나가는 곡선적 리듬’이라든가 ‘자라나는 나무’로 비유하는 이일의 비평이나, ‘덩어리(양괴)와 여기에서 뽑아 올린 면의 연장이 가져오는 조화’와 같은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는 윤진섭의 비평은 동일하게 조각 몸체의 생육과 성장의 과정을 은연 중 암시한다. 가히 ‘자라나는 조각’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II. 착시와 눈속임 형상
그의 ‘자라나는 조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속성은, 그간 우리가 전통적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언어가 유발하는 ‘눈속임(trompe-l'œil)’의 효과와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조각이 천착하는 눈속임 효과라는 것은 모방(mimesis)이라는 구상적 환영에 국한된 것이 아닌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횡단하는 가운데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조각은 구상을 추구하든, 추상을 지향하든, 조각의 본체가 여러 파편들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전일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의 작품은 피상적으로는 마치 파편들의 결합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돌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작품 〈궁석(弓石)〉(1987-1995)의 경우, 피상적으로는 조각의 몸체가 3등분이 된 조각체들을 완성해서 서로 끼워 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게 보이는 눈속임 효과일 뿐 실제로는 전체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조각의 몸체에 그어진 홈과 같은 선은 몸체들의 결합이 만드는 만남과 접촉의 경계선이 아니라 그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환영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즉 조각의 몸체에 그어진 선들과 틈새는 ‘눈속임 형상’인 것이다.  
이러한 조형 언어들은 그의 모든 작업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최근작인 〈공간유희〉(2010-) 시리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마치 판재를 네모반듯하게 깎아 내 틈을 비워 내고 그 사이에 뾰족한 물체나 물결 모양의 조각들을 따로 만들어 퍼즐 조각처럼 끼워 넣은 것처럼 보이는 작업들은 모두가 하나의 돌덩어리로부터 비롯된 형상이다. 그러니까 마치 하드보드지로 된 패키지(package)의 전개도처럼 보이는 선의 흔적들은 실상 전체상을 위해서 존재할 뿐 아무런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위장의 조형 요소들인 것이다. 


계낙영, 공간유희, 92x63x20cm, 화강석, 2009


계낙영, 공간유희, 100x70x22cm, 화강석, 2012


계낙영, 공간유희, 101x69x20cm, 화강석, 2012


III. 융점 상승 혹은 융점 변화
이러한 착시와 눈속임 효과는 그의 조각이 지향하고 있는 ‘물리적인 현상’의 형상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극대화시킨다. 초기 작업에서 물리적인 특성(돌의 견고함과 강인함)과 정반대의 형태(부드러운 천과 같은 물성 효과)를 돌에 각인시키는 조형 언어와 더불어 중기 작업에서 추상적인 곡선의 형상성-예를 들어 〈경칩〉(1988, 1995) 혹은 〈대지〉(1996-2006)와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개구리, 새싹 혹은 팔 벌린 사람의 형상-을 드러내는 조형 언어를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돌이라는 원초적 질료적 속성을 예술의 언어로써 무화시키고 가볍거나 유연한 무엇으로 치환하는 그의 경탄할 만한 조형의 기술 덕분이다. 
그의 조각이 천착하는 물리적인 현상의 탐구는 〈융점상승〉, 〈융점변화〉(1987-2007)와 같은 물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련의 제목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융점 변화란 ‘온도의 상반된 극점에서 물질이 변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일정한 압력 하에서 고체 물질이 그 액체와 평형이 되어 존재할 때의 온도로 녹기 시작하는 변화’를 지칭한다. 이러한 융점 변화는 영하의 온도에서도 얼음과 같은 고체를 녹게 하는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녹이면서 미끄러져 나가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계낙영의 작업은 지극히 견고하고 단단한 돌이라는 물질이 자신의 독특한 조형 언어를 통해서 상반된 물질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물질에 관한 하나의 은유(metaphor)’에 다름 아니다. 그가 재질이 무른 대리석보다 밀도가 높고 단단한 화강석(花崗石)이나 오석(烏石)을 주로 사용하는 까닭도 이러한 물성의 변주를 극대화시키려는 조형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IV. 공간 변주와 공간 유희
보라! 거친 화강석의 돌덩어리가 치솟아 오르면서 유연한 연성체의 이미지로 똬리를 튼다. 때로 그것은 중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살포시 자신의 몸체를 접어 내려앉는 형상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거칠게 마무리한 좌대 혹은 조각의 지지대와 그 위에 섬세하게 매만진 조각체가 하나의 돌덩어리 안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몸으로 호흡하는 그의 작업은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러한 형상들은 그가 돌덩어리 속에서 고유의 물성을 탈각시켜 새로운 물성으로 탈바꿈시키는 ‘공간 변주의 미학’ 속에서 여실히 빛난다. 하나의 돌덩어리로부터 3차원 공간 내부로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안착시키는 계낙영의 조각은 그런 면에서 공간 변주와 공간 유희를 지속적으로 탐구한다고 하겠다. 일루전을 통한 착시에 천착하는 최근 작업인 〈공간유희〉는 볼륨과 매스가 만드는 그림자의 효과를 통해 빛의 존재를 늘 상기시킨다. ‘융점 변화’라는 그의 메타포는 돌이라는 물질 자체를 종교적 메시지를 담는 그릇으로 확장한다. 그가 대전 정림동 성당에 봉헌한 거대한 제대(祭臺), 독서대, 감실대 등은 이전의 〈비상〉(1996) 연작이나 〈골고다 연작〉(2000-01)이 조각적 결실을 맺은, 신의 메시지가 거하는 거룩한 ‘빛의 그릇’이라 할 만하다. 

출전/ 
김성호,「변주의 공간 유희」, (계낙영 작가론), 『미술과비평』, 여름호, 2016,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