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서문│유진구 전 / 세월의 켜를 건져 올리는 침향무(沈香舞)와 합(合)의 변주
김성호
세월의 켜를 건져 올리는 침향무(沈香舞)와 합(合)의 변주
김성호(미술평론가)
작가 유진구의 작품 세계는, 5년여 전 자개를 사용하여 첫 변모를 시도한 이래, 전통의 재해석과 실천 나아가 합(合)의 변주라는 화두로 확장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전통 공예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오던 자개를 현대미술의 언어로 전환해서 사용한 작가는 단지 그만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유념할 것은, 회화로부터 조각으로 확장하고 있는 그의 작업들은 자개를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 몇몇 작가들이 선보이는 트렌드처럼 자리한 조형적 결과들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개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그의 초기작 〈침향무〉 시리즈가, 다른 작가들의 창작의 고민들과 일정 부분 공유하는 지점 속에서도, 분명코 다른 발원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작업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유의미한 결과물이었다면, 최근의 〈합〉 시리즈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이 자개 패턴의 효과를 도모하거나 자개의 질료적 효과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찾아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진구, 合-자개, 칠 지름60cm 2016
유진구, 合 –자개, 거울, 칠 2015년 지름120.6cm
I. 침향무 - 전통의 재해석
그의 자개 작업의 초기작 〈침향무(沈香舞)〉 시리즈는 ‘자개’라는 전통 공예의 재료를 계승하여 어떻게
현대미술의 언어로 변주하는가에 초점이 모여 있었다.
주지하듯이, 〈침향무〉는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黃秉冀)가 1968년 창작한 가야금 연주곡이다. 가야금 전통의 원류를 신라시대에서 모색한 이 곡은 인도 전통의 향(香)인 ‘침향 속에서 신라인이 추는 춤’이란 의미를 담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전통과 확연히 다르게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의 음계와 선율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조현(調絃)으로 창작된 것이었다. 이 곡에는 조선조 전통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많은 기술적 방식, 예를 들어 양손으로 줄을 뜯기, 다섯 번째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줄을 퉁기기, 두 개의 줄을 동시에 연주하기, 줄을 비벼서 소리 내기 등의 새로운 복합적 연주 기술이 사용된다. 따라서 이 곡은 가야금의 원류적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화한 것이라 하겠다.
유진구의 침향무 시리즈 역시 자개 작업의 전통성을 이전과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현대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자개 조형의 원패(原貝)가 되는 조개, 소라, 전복 등 패류(貝類)는 5억만 년 전의 고생대 캄브리아기로부터 살아왔던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생물 중 하나가 아니던가? 가히 세월의 켜를 안고 수많은 진화를 거쳐 온 ‘살아있는 화석’이라 하겠다. 아울러 자개는 수많은 세월 동안 바닷속에서 퇴적물을 쌓아 만들어진 존재이기도 하다. 조형 재료가 품고 있는 역사와 더불어 나전(螺鈿)의 조형 방식 또한 오래된 전통으로 오늘날에 계승되어 오고 있지만, 이러한 전통을 활용해서 현대예술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유진구는, 황병기가 실천했던 ‘침향무’의 정신을, 자신의 자개 작업 속에서 발현시키고자 부단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것의 처음은 대개 바위섬이나 물고기를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화면 위에 원패를 얇게 저민 자개 박판 즉 ‘판자개’들을 멀티플(multiple)의 형식으로 납작하게 집적시켜 올려놓으면서, 물결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즉 패각(貝殼)이 구성하는 탄산칼슘의 무색투명한 결정으로 인해 표면 위 반사광이 마치 프리즘을 관통하는 것처럼 일으키는 색광 현상을 적극적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여기에 패각의 박막(薄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영롱한 색들의 효과가 더해지면서 화면은, 마치 신인상주의의 점묘화처럼, 일렁이는 물결의 찰나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백색의 가시(可視)광선을 작품의 표면 위로 불러와 다색광으로 산란시키는 이러한 효과는 유진구의 회화를 옵티칼 아트의 유형처럼 ‘생동력 있는 무엇’으로 훌륭하게 변주시킨다. 작가 유진구에 의해서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로서 ‘자개’라는 전통 혹은 구식의 재료가 현대성의 옷을 입고 ‘만들어진 오브제(made object)’로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유진구, 合-자개, 칠 70x70cm 2015년
유진구, 合-자개, 조명,칠 70x70cm 2015년
II. 합의 변주 - 침향무 정신의 독창적 실천
유진구의 작업에 있어서 ‘만들어진 오브제’로서의 위상은 실상 이전의 〈침향무〉 시리즈 작업에서보다 최근의 〈합(合)〉 시리즈 작업에서 보다 더 선명해진다. ‘판자개’의 얇은 조각들을 모듈로 삼아 패널 위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이는 물결’이라는 생동력 가득한 재현적 효과가 전회(轉回)하면서, 3차원의 비(非)재현적 혹은 추상적인 부조/환조로 변모되고 작가의 창의적 노동력의 개입을 보다 더 구체화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두 번째 주제인 ‘합(合)’과 관련하여 전후 작업을 비교해 본다면, 이전의 작업이 평면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자개를 붙여 얇은 판자개의 투명한 투과성(透過性)의 효과를 회화적 언어로 극대화시켜낸 것이었다고 한다면, 최근의 부조/환조의 입체 작업은 자개의 투과성은 물론 반영성(反映性)의 대립적 속성을 하나로 통합하여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때로는 벽에 고착된 부조의 형식으로, 때로는 바닥에 기념비적인 양상으로 놓이기도 하면서 자개의 표면의 대립적 효과를 다양하고도 복합적으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입체작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작가는 먼저 포맥스(formax)로 재단한 추상적 구조를 구성한 후 합성수지로 면을 다듬고 바탕색을 올린다. 이 위에 색색의 ‘판자개’를 조형적으로 배치해 붙여 올리면서 패각의 질료를 색변화를 통해 비물질화의 변주를 실험한다. 또한 여기에 유리판 또는 아크릴 반영체를 붙임으로써 색과 빛의 ‘투영/반영’의 효과를 복합적으로 실험함으로써 작품의 비물질화의 변주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이 위에 다시 칠을 올리고 사포로 칠을 벗겨내는 무수한 노동력을 투여함으로써 자개 자체가 지닌 색과 빛의 반사 효과를 복합적으로 조율한다. 그럼으로써 조각의 무게를 빛으로 둘러싸 가볍게 만들어 내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관자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의 반사 효과와 더불어 관자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보여 주는 거울의 반영 효과를 동시에 의도함으로써, 전통의 재료를 현대화하는 자신의 작업이 견지하는 ‘침향무의 정신’을 보다 더 독창적으로 실천하기에 이른다.
유진구, 合-자개,거울, 칠 83.5x40cm. 2015
생각해 보라! 그의 작업은 색이 섞이어 명도가 낮아지는 물감의 ‘감산혼합(減算混合)’이 아니라 색이 섞이어 명도가 높아지는 빛의 ‘가산혼합(加算混合)’을 다양하게 실험한다. 울긋불긋하게 피어난 색색의 판자개들이 펼치는 강렬한 색의 효과와 더불어 눈이 부시도록 빛을 산란시키는 판자개 미립자들 그리고 거울 반영체의 영롱한 반영의 효과가 우리를 언어화하기 어려운 신비의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그의 〈합〉 작품은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한편으로 거친 토양으로부터 스멀스멀 자라난 알 수 없는 생명체처럼 또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은하계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보석으로 가공되기 이전에 땅 속으로부터 발견된 원석의 결정체처럼, 때로는 보석 세공사의 수고스러운 노동에 의해 세밀하게 가공된 보석의 확대된 이미지처럼 다색(多色)이 창연(敞然)한 ‘합의 변주’를 선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제목이 선보이는 ‘합’의 세계는 이항 대립하는 모든 이질적 세계들의 화해와 통합을 전유(專有)한다. ‘양/음, 요(凹)/철(凸), 흑/백’ 등의 대립적 조형 요소의 통합은 물론이고, ‘공예/순수 미술/회화/조각’의 다양한 조형 장르를 자신의 작품 안에서 통합한다. 나아가 그의 작품은 침투/반영, 우연/필연, 존재/부재, 희(喜)/애(哀) 등의 만질 수 없는 추상적 개념조차 한 덩어리로 통합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질적 대립의 요소와 개념들을 하나로 통합한 그의 작업은 ‘세월의 켜를 가득 안은 전통적 재료인 자개’를 통한 ‘현대화된 조형’의 모색 지점을 횡단하면서도 그의 말대로 ‘사회적 인간 공동체’라는 다양한 ‘우리 세상사의 모습’을 은유한다. 그럼으로써 작가 유준구는 모든 ‘미술하기’란 현실 속에서 타자들의 공감을 요청하는 ‘비언어적 발언’에 다름 아니라는 자신의 작품관을 관자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
출전/
김성호, '세월의 켜를 건져 올리는 침향무(沈香舞)와 합(合)의 변주' (유진구 전, 2016. 6. 1-12, 팔레드서울)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미술·공예 LIBRARY > 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욱진/ 하계훈 (0) | 2016.12.22 |
---|---|
19세기 건물이 발랄하게 변신, 주택 리노베이션 인테리어 (0) | 2016.12.08 |
유의랑 - 어디선가에 날아든 새, 새들, 새들들 / 공충환 (0) | 2016.12.08 |
전시- 이상수: The Fine Art (0) | 2016.12.02 |
권광칠- 연잎으로 이루어진 유토피아/ 박영택 (0) | 2016.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