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 LIBRARY/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이종기-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 이선영

sosoart 2017. 3. 2. 20:05

이종기 /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

이선영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도상들, 화사하고 선명한 색감, 편안하고 유쾌한 감성으로 충전된 이종기의 작품은 대중 친화적이다. 그의 작품은 주류 현대미술이 결여하고 있는 대중성을 탑재한다. 미술사에서는 팝아트가 그 예이며, 그의 작품 또한 팝 적인 맥락을 가진다. 앤디워홀과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협업 했듯이, 동료 작가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음악 감상을 하는 음악 애호가이기도 한 이종기의 작품에는 음악적 소재가 종종 등장한다. 가령 그의 작품에는 마이클 잭슨 같은 슈퍼스타가 나오기도 하고, 비틀즈의 [애비로드] 앨범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멤버들의 모습을 번안한 작품이 있기도 하다. 팝과 록의 대표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이물감 없이 섞여든다. 2014년 기념사진 찍는 심슨가족 뒤의 고건물의 색처럼 원색을 넘어 형광색이 번뜩이는 싸이키델릭한 색감이나 붕 떠 있거나 떠도는 듯한 감성도 그렇다. 특히 요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정사각형 구도의 캔버스는 음반 자켓 형식을 상기시킨다. 




[계동 이모네 분식] 캔버스에 유채, 150x150cm,2013


[서촌], 캔버스에 유채, 73x118cm, 2014



동양의 유적이나 풍경 등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 또한 그러한 하위문화의 감수성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때 과거는 단순한 추억이나 기억을 넘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감으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종기의 작품이 팝적이라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표피적인 형식이 아니라, 팝문화와의 보다 깊은 관계라고 할 것이다. 원래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다른 분야의 직업을 가졌다가 늦게 그림을 다시 시작한 그에게 예술은 무조건 즐거운 것이어야만 했으리라. 물론 전업 작가로서의 삶에는 어두운 면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결국 작업하는 즐거움이 여타의 괴로움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한 이들이 작업을 지속할 수 있다. 100세 시대 2모작 인생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생각할 때, 50대 때의 (재)출발은 그다지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일찍이 그림을 시작해서 국내외 유수의 미술대학을 다녔지만 조로 현상을 보이고, 삶과 이런저런 타협을 하면서 자기 역량의 몇 분의 일도 작업에 투자하지 않는 이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주요 작품 목록에 올리고 있는 2009년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만도 엄청난 것을 보면,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동안 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을 풀고 지난 10여 년 간 신나게 달려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늘그막의 한가로운 호사가 아니라, 밀린 숙제와 같은 것이었다. 이종기의 작품은 우선 자신의 즐거움으로 추동되지만, 그 분위기를 전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소통의 요건을 충족한다. 그의 작품은 심슨가족과 슈퍼맨, 가로수들, 북촌 골목이나 오래된 상가가 있는 풍경, 한국의 문화유산과 자연, 최근에는 골동품에 새겨진 무늬 등, 그가 좋아하는 도상들을 모아 놓은 장(場)이다. 그는 이러한 소재들의 조합에 여러 색감을 입혀 보면서 놀이하듯이 작업한다. 작품 초기부터 자주 등장하는 배경은 개발자의 눈으로 보면 당장 없어져야 하는 그러한 허름한 건물들이 있는 거리이다. 작가 나이 또래의 한국 사람들은 대개 추억에 잠겨 살 것 같지만, 의외로 (재)개발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발견된다. 




[명동미용실], 캔버스에 유채,100100cm, 2015



[순천],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91x91cm, 2016

 


발전주의가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던 짧은 시기에 그 혜택을 본 세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옛것에 대한 호기심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이종기는 그의 세대에 거슬러, 옛 풍경에 대한 시선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몇 년 전 만 해도 아트선재센터 앞에 있었던 그런 가게들(지금은 벌써 사라져버린), 가령 아직 기와지붕을 얹고 있는 나지막한 상가들이 등장한다. 2010-11년경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에 나오는 듯한 오랜 봉우리들에 감싸여 있는 도시들이나 뒤의 건물은 흐릿하고 앞의 가로수를 강조한 [optical illusion] 시리즈는 그가 문명과 현대 보다는 자연과 역사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알려준다. 낡은 기와들이 얹힌 오래된 상가들이나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 풍경은 역사의 단계에 들어선 근대 문명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이러한 위상 변화를 받쳐주는 무한한 배경이다. 특히 동양화의 여백에 해당되는 공간은 색채 실험이 행해지는 장이 된다. 


원래의 색과 무관하게 다채롭게 칠해지는 공간은 서양식의 원근법이 적용된 풍경인데 하늘과 땅이 동양화의 여백처럼 같은 색으로 처리되거나,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공간이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할만한 어떠한 저항도 없는 텅 빈 공간처럼 남겨두는 것도 그 예이다. 요즘에는 장롱 같은 오래된 물건의 문양 속 공간이 탐구대상이 되었다. 그 공간들을 날으는 양탄자, 자동차, 보드 등이 활주한다. 슈퍼맨이 등장하는 시리즈의 광대한 공간 또한 그렇다. 작품 속 슈퍼맨은 다가오는 대상에 따라 자세를 고칠 필요가 없이 언제나 한결같다. 장면의 주인공인 심슨가족이나 슈퍼맨 등이 평면 속에서 태어난 가상의 존재들이듯, 단색으로 칠해지곤 하는 화면은 붓질 자국 없이 평탄하게 칠해진다. 인공색채로 도배를 했다기 보다는 원래 자연의 색은 다양한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는 이것을 전경화하고 저 작품에서는 저것을 전경화 하는 식으로 다양한 차이를 주는 것이다. 



[자경전], 캔버스에 유채, 100x100cm, 2014



[가회 갤러리], 캔버스에 유채, 6173cm, 2014


[가회동 골목],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60.6x72.7cm, 2015



단순한 듯 하지만 여러 범주를 끌어들이고 있는 이종기의 작품은 인간이 자연의 무한성과 견주기 위해 발명한 것이 바로 예술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뜬금없이 하늘을 날고 있는 슈퍼맨이나 지상의 풍경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심슨가족은 작품 속 등장인물이면서도 관객에게 이곳 저곳, 이 시간 저 시간, 이 상황 저 상황을 설명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들로 인해 자연, 무대 또는 현장은 의미의 장으로 변화한다. 슈퍼맨은 그 아래의 풍경의 안녕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며, 심슨가족은 오래된 동네를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끌어온다. 무대의 전경에 배치된 심슨가족이 작가가 주시한 일상의 구체적인 굴곡에 자리한다면, 작게 그려져 하늘 높이 배치된 슈퍼맨은 동양/서양, 정신/물질, 자연/인공, 초월/참여 등등의 상반된 범주를 예시한다. 큰 작품이든 아니던 슈퍼맨은 숨은 그림처럼 찾아내야할 대상이다. 


심슨가족의 경우 단순히 그가 즐겼던 만화를 넘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면모가 발견된다. 가령 2014년에 제작된, 작가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는 심슨 부인의 모습이 그렇다. 작품 속 초상화는 장차 그림으로 전향한 젊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을 그리는 것은 또 다른 자신이다. 다른 작품에서 이 재현의 과정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 역시 작가로 추정된다. 그 작품들은 미셀 푸코가 분석했던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처럼, 어지러운 시선의 교환을 통해 재현의 과정을 메타적인 차원으로 표현한다. 그 밖에 보드를 끼고 기와집 대문으로 들어가는 바트나 그의 작품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무대 세트 없이 따분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는 심슨 등은 그러한 동일시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단란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국적이라서 재미있는 공간으로 여행 와서 함께 논다. 그가 사랑하는 개들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운동하느라 뛰어다녔을 골목길과 심슨가족의 유쾌한 골목여행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강 3-3], 캔버스에 유채, 20x100cm, 2015



[한강 2-3], 캔버스에 유채,  50x117cm, 2015



2012-13년에 제작된 작품에는 낭만적인 달 풍경 아래의 기와집 가게들, 그리고 그 앞에서 춤추는 심슨 부부가 나온다. 마이클 잭슨이 대천사 날개를 달고서 생전의 그의 무대가 그러했듯이 화려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가회동에서 그가 직접 지어 살았던 한옥의 체험이 담겨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낯설어진 곳이다. 그는 낯설어진 한옥 촌을 그보다 더 친근한 수퍼스타나 만화 주인공과 대조한다. 그들은 멀리 있는 이웃인 것이다. 이종기의 작품에는 자신의 집 지붕 위에서 본 북촌 골목의 풍경이 많이 담겨있다. 그러나 지금은 작가도 더 이상 북촌이 아니라 아파트에 살고 있듯이, 이제 그곳은 자생적인 삶의 터전이기보다는 제도에 의해 보호받고 보여지는 곳이 되었다. 그는 가회동 한옥 마을을 구경하는 외국인 무리들을 그렸다. 그들이 만약 외계인처럼 보인다면 이곳의 우리 또한 그렇다. 


한옥 마을 속 심슨 가족 역시 미지의 세계에 직면한 호기심에 가득한 관광객의 입장이다. 그의 작품 속 한옥마을은 그가 직접 짓고 살았던 곳이니까 누구보다도 정확히 보고 알고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이다. 이 환상적 무대에 어울리는 것은 만화적 인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화적 인물은 실제 장소의 환상화에 가세하지만, 동시에 대조법을 통해 공간의 실재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북촌마을에서 심슨가족은 요술담요를 타고 날아다니고, 보드나 레저용 차를 타고 언덕을 질주한다. 대체로 사실성에 충실한 건물들은 모노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지나간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반면 그 곳을 탐사하거나 즐기는 만화 주인공들은 원래의 생생한 색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들이 노니는 공간 역시 여러 색들로 채워져 있다. 잘 관리되고 있는 북촌마을에도 허름한 곳이 있다. 그러나 아직 삶의 촉수가 무디어지지 않은 작은 가게들은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강화 연미정],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90x117cm,2016



[flying], 종이에 수묵 프린트, 30x45cm, 2015



[flying], 종이에 수묵 프린트, 30x45cm, 2015



그렇지만 그것들은 사라져가는 문화이기 때문에 부재감이 서려 있다, 이 부재감을 연극적 세트를 통해서나 해소될 수 있다. 부재에 대한 예감은 현재 그의 작업실이 있는 문래동 풍경에서도 발견된다. 재개발된 고층빌딩에 의해 에워싸인 낡은 철공소들은 곧 사라질지 모를 살아있는 유물처럼 그곳에 ‘아직도’ 서 있기 때문이다. 이 과도기적인 시공간에 이제 다른 곳에서 쫒겨온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또 다른 분위기와 활기가 생겨났지만, 그 또한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든 것들이 주는 감상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종기의 작품에서도 발견되지만, 실제로 생활사 박물관 식으로 연출된 곳이 종종 있다. 2014년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은하 사진관, 명동 의상실, 만화방, 화개 이발관 같은 상호들은 추억에 바탕 한다. 한 때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또는 사라져가는 문화는 기억의 과정이 그렇듯이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많다. 또는 지나간 것들은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각색된다. 


나지막한 상가들을 돌아다니는 심슨가족은 상상의 무대가 제공할 법한 기대감이 있다. 거기에서는 차가 고장 나는 큰 사건이 있어도 결코 심란할 수 없는 곳이다. 만화, 게임문화에서는 더 심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런 저런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죽음조차도 놀이인 것이다. 심슨가족 이야기는 그래도 다른 만화들보다 현실에 대한 냉소적 풍자성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이종기가 불러들인 맥락에서 그러한 면은 다소 약화되어 있다. 관광의 대상이 된 우리 터전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생사고락의 문제로 가득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서 밝고 환하게 빛나는 그 세계는 인간의 희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이다. 북촌마을은 문화재처럼 잘 정비되어 있지만 왠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다. 낮은 기와집 상가들이 즐비한 따스한 옛 풍경 역시 무대 같다. 구중궁궐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모두는 이제 구경꾼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들은 외국인들이지만 우리 또한 우리에게 구경꾼이다. 



[건춘문], 캔버스에 유채, 100x100cm, 2014



[자화상 2], 캔버스에 유채, 30x51cm, 2015



구경꾼으로서의 인간은 근대 자본주의 이래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구경은 자본주의를 원활하게 돌리기 위한 소비과정에서 최초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2014년 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궁전의 스케일에 걸맞게 보다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며, 심슨 가족 역시 레저용 고급차량을 몰고 그 앞을 지나간다. 작품마다 차종도 다르다. 그 부분은 이종기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장식적 측면이다. 심슨가족을 둘러 싼 연출 소품들은 슈퍼맨이 늘 한결같은 의상과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다. 궁궐과 자동차는 명품들의 만남을 보여주며, 그 안에서 서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들 역시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캐릭터들이다. 예술은 이 좋은 것들을 다 쓸어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 2014년에 그려진 동양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 슈퍼맨은 길이 아닌 하늘이라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이 땅을 즐긴다. 슈퍼맨은 철새처럼 저 멀리서 그냥 날아간다. 풍경이 어떻게 바뀌던 같은 포즈로 날아가는 슈퍼맨은 당면한 상황에 대한 철저한 방관자로 나타난다. 


준 유토피아에 해당되는 풍경들에는 대재난의 해결자 슈퍼맨이 할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찰, 법관, 의사, 정치인들이 할 일이 많은, 심지어는 바쁜 생업에 촛불까지 들어야하는 민초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2016년 말 한국의 상황은 그 반대일 것이다. 슈퍼맨이 할 일이 없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이다. 또는 그의 한 작품에서처럼 슈퍼맨이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2015년 갤러리 루벤에서 열린 ‘flying’ 전에서, 동양적인 분위기의 풍경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슈퍼맨은 얼룩져 있기도 하다. 운무 가득한 동양적 유토피아는 슈퍼맨을 미소한 원소로 녹여버릴 듯하다. 12월 말에 개막한 [2016년 서울 아트 쇼]에서 공개한 그의 최근작들은 그가 천착했던 동양적 유토피아가 자개장 같은 공예품 속의 무늬로 옮겨감을 알려준다. 그것은 옛 건물들 안에 있었던 사물이라는 점에서 외부에서 내부로의, 또는 거시세계에서 미시세계로의 이동이다. 심슨 가족은 고가구의 환상의 동식물들의 문양 속에서 보드를 타거나 잔디를 깍고, 낚시를 즐기며, [산해경]에 나올법한 괴물의 무등을 탄다. 




[서울개골산], 캔버스에 유채, 91x117cm, 2012



[풍경 1],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100x100cm, 2016



[풍경 2],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100x100cm, 2016



옛 공예품의 무늬들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상징성을 띄고 있었다. 그 상징이 대부분 민초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유토피아적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전 작품과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가진다. 민초들의 물건들에는 팝아트적인 것이 있다. 또한 오늘의 팝아트는 옛 물건들처럼 일상생활에서 소중한 쓰임새를 갖게 되길 바란다. 이제 심슨 가족은 완전한 상상 속에서 즐긴다. 무늬들은 북촌마을이나 궁궐, 또는 오래된 마을 풍경같은 3차원 상의 현실/환상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2차원에 존재한다. 그림 속에서 여러 곳으로부터 기원한 기표의 혼합은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실재의 무거움을 떼어낸 기표들의 조합은 현대사회에 편재하는 스펙터클처럼 축제적인 활기가 넘친다. 그러나 이러한 혼합이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그의 작업에서 심슨가족과 마이클잭슨이 함께 하는 장면은 실제로는 양측 소속사 간의 이해관계가 달라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라고 한다. 


그러나 작가는 심슨가족의 팬이었던 마이클 잭슨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길흉화복에 대한 서사가 담긴 옛 공예품부터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희망사항의 표출은 결코 멈춰질 수 없으며, 예술 또한 그 역할을 담당한다. 놀이 또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만의 게임원칙이 관철되는 장을 추구한다. 그렇게 해서 이종기의 작품에는 놀이와 문화와 예술이 만난다. 그의 최근작에서 이 기표들이 출몰하는 장은 바둑판이나 장기판처럼 정사각형이다. 놀이의 규칙은 단순하지만 게임의 수는 무한하다. 사각형 캔버스라는 놀이마당에 그 스스로 정한 원칙으로 놀이하는 이에게 실재라는 불편한 것은 사라져야 한다. 이종기의 작품은 기표들이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반영한다. 그러나 실재계는 놀이하는 자의 물리적 육체적 상황에 엄존한다. 행복에의 가상에 의해 억압되는 실재는 그 언제고 다시 분출하여 가상의 장면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예술은 통상적인 놀이처럼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닫혀있든 열려있든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