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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
출생 - 사망 | 1798.4.26. ~ 1863.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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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 1798~1863)는 19세기 전반 서양미술사의 중심인물로,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당대의 거물이었던 앵그르의 적수이자, 다비드에 의해 확립된 아카데미적이고 고전적인 회화 전통을 허문 것으로 유명하나, 모든 면에서 이들과 대척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주제는 다비드처럼 심각하고 역사적인 것이 많았고, 이를 다루는 방식도 장엄하고 극적인 성격을 보였다. 이런 면에서 그는 장엄 양식(Grand Manner)의 마지막 대변자, 서양 미술사에 등장한 최후의 역사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린 역사화에서는 다비드 등이 보여준 스토아적인 이상이나 윤리,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개인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파토스,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이 짙게 깔려 있다. 그는 당대의 프랑스 현실이 아니라 고대나 중세와 같은 ‘과거’, 신화나 문학과 같은 ‘허구’, 근동이나 아프리카의 이슬람 사회와 같은 ‘이국’, 질서나 이성과 거리가 먼 ‘폭력과 광기’의 세계에 매혹되었다.
그는 이런 낭만주의적인 관심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과 기법을 실험했는데, 그것이 신고전주의의 질서정연한 구도나 완벽한 마무리와 대조되는 바로크적인 구성, 표현적이고 거친 붓 자국, 강렬하게 병치 된 색채 등으로 나타났다. 그를 당대의 논쟁적 화가로 만들고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과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이런 회화적인 언어였다.
들라크루아가 파리 근교의 샤랑통-생-모리스(Charenton-Saint-Maurice)의 상류 부르주아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제1공화정의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1864년에 처음으로 화가의 전기를 쓴 테오필 실베스트르(Théophile Silvestre)는 그의 친아버지가 법적인 아버지인 샤를(Charles)이 아니라 정치가 탈레랑(Charles-Maurice Talleyrand)이라는 설을 제기했고, 이런 의혹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화가가 7살이 되던 1805년에 부친이 사망했고, 이듬해 그는 파리의 리세 앵페리알(Lycée Imperial) 기숙학교에 들어가 고전 교육을 받았다. 1807년에 군인이었던 형이 전사하고 1814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그는 누나 집에서 기거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다. 외삼촌의 친구였던 게랭(Pierre Guérin)을 만나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한 그는 1815년 10월에 그의 화실에 들어갔고, 1816년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화가 수업을 계속한다.
문학에 더한 문학적 상상력
![](http://ncc.phinf.naver.net/ncc02/2010/9/16/234/1.jpg?type=w323)
[자화상] 1821년경
캔버스에 유채, 41×33cm, 들라크루아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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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는 누구보다도 ‘문학적인 화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문학 작품은 평생 그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당시로써는 선구적으로 그는 프랑스 문학뿐 아니라 외국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괴테, 실러의 독일 문학과 셰익스피어, 월터 스코트, 바이런 등의 영문학도 섭렵했다. 어린 시절에 문학 작품의 창작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며, 실제 문필가로서의 면모는 생전에 출판된 미술에 대한 에세이와 사후에 출판된 일기와 편지에서 발견된다.
1821년경에 그린 자화상에서 볼 수 있듯이 화가는 자신을 문학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림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청년은 월터 스코트의 소설 [람메르무어의 신부]의 레이븐스우드 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햄릿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화가 자신이다. 두 캐릭터가 처한 비극적인 상황과 우울한 성격은 부모를 모두 여의고 파산 지경에 처한 그에게 특별한 호소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들라크루아는 기본적으로 비관주의자였다. 그의 작품 중에 밝은 분위기를 가진 것은 없고 행복하게 웃는 인물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보들레르는 그의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 “독특하고 완강한 우울(mélancolie)”이 그를 진정한 19세기적 화가, 모던한 화가로 만드는 자질이라고 하기도 했다.
보들레르뿐 아니라 많은 문학인들이 그를 높이 평가한 점에서도, 그는 문학적인 화가라 할 수 있다. 빅토르 위고, 스탕달, 발자크, 하이네, 괴테 등이 그의 작품에서 받은 특별한 감동을 표시했다. 화가가 특별히 좋아했던 [햄릿]과 [파우스트]의 경우는 그의 석판화가 삽화로 실린 책들이 출판되기도 했고, 이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감정과 에너지는 수많은 회화로도 나타났다. 그를 진정한 문학적 화가로 만든 가장 중요한 점은, 문학에서 소재를 얻어 그림을 그릴 때 그만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의 살롱 데뷔작인 1822년의 [단테의 배 Barque of Dante]에서부터 발휘된다. 그가 본래 이 작품에 붙였던 제목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레기아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 도시 디스의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호수를 건넌다. 죄인들은 배에 달라붙고 그 위에 올라타려고 애쓰고 있다. 단테는 그들 중에 피렌체 사람이 몇몇 있음을 발견한다]로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8곡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다. 원작의 잔잔한 강물이 그림 속에서 거친 파도로 바뀐 것이나, 원작에서 배에 손을 얹었던 단 한 사람이 그림 속에서 배를 물어뜯을 듯 달려드는 누드 군상으로 표현된 것 등이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 낸 회화적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http://ncc.phinf.naver.net/ncc01/2010/9/16/2/2.jpg?type=w646)
[단테의 배] 1822년
캔버스에 유채, 189×24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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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으로 이 작품의 구도는 게랭의 화실에서 함께 공부했던 선배 화가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참고 해서 만들어졌다. 작품 속 누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나고대 조각,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상륙] 등을 연상시킨다. 들라크루아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모사한 화가로 유명한데, 학생 시절부터 루브르에 가서 모사한 대가의 그림 특히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로네제, 루벤스 작품의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 거듭 인용되고 참고, 변형된다. [단테의 배]에서 인물들이 화면에 평평하게 배치된 구도는 신고전주의적이나, 어둡지만 풍부한 색채와 파도 표현 등에서 보이는 거칠고 대담한 처리는 다비드나 앵그르와 대조되는 요소이다.
![](http://ncc.phinf.naver.net/ncc01/2010/9/16/178/3.jpg?type=w646)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8년
캔버스에 유채, 392×49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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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살롱에 전시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Death of Sardanapalus]은 같은 해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크롬웰 서문]이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으로 일컬어지는 것과 비교되어, 낭만주의 회화의 선언서로 여겨졌고, 이로써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화파의 리더로 떠올랐다. 이 역시 문학 작품에서 취한 소재에 화가의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그림이다. 바이런은 1821년에 쓴 [사르다나팔루스]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이 장작불 위에 스스로 올라 죽음을 택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다.
바이런 특유의 감상주의와 이국 취향이 느껴지기는 하나 숭고하고 비장했던 원작의 결말을, 변태적인 광기와 잔혹한 관능성이 가득한 아수라장으로 만든 화가가 이 그림에 붙인 설명은 이렇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장작불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환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두 목을 자르라고 명령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항상 단정하고 세련된 옷차림에 탁월한 거동과 대화로 사교계에서 환영받았던 댄디였던 들라크루아는 이 살육극의 장면에서도 그의 취향을 보여준다. 왕의 발가락마다 끼워져 있는 보석을 비롯해 여인들뿐 아니라 병사, 말까지도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으며, 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의 고통은 연극처럼 미화되고 과장되어 있다. 화면 속 공간은 매우 설득력이 없어 사람과 동물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여기에 화면을 대각선으로 채우고 있는 티치아노, 루벤스의 붉은색은 들라크루아 특유의 장식적이고 병적인 환상과 만나, 이해는 잘되지 않으나 느껴지고 또 매혹되는 낭만주의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로 관람자를 빠져들게 한다.
전쟁과 혁명의 서사시
들라크루아는 자신이 살고 있는 19세기를 싫어했고 진보를 혐오했던 보수주의자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이 거듭되어 정치 제제만도 복고 왕정(1814~30), 7월 왕정(1830~48), 제2공화정(1848~52), 제2제정(1852~70)이 교체되고 있었는데, 그는 그 과정에서 정치 활동을 하거나 정치적 견해를 표하지 않았다. 화가로서 프랑스 현실을 그림에 담은 것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 July 28, Liberty Leading the People]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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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1년
캔버스에 유채, 259×32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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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혁명이 일어난 ‘영광의 3일’ 중 하루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동료의 시신을 밟고 샤를 10세의 전제에 항거하는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날짜가 명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특정한 사건을 묘사한 것은 아닌 이 장면을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화면 중앙에 등장하는 ‘자유의 알레고리’인 여성이다. 사실과 비유의 혼합으로 이 작품은 7월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자유의 이상, 추상적인 혁명의 이미지, 동시대의 소재를 이용한 서사시가 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시대에 있었던 정치 사건 중 그를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그리스 독립 전쟁(1821-32)이었다. 터키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분투는 많은 유럽인들에게 야만과 문명의 투쟁으로 비쳤고, 그로(Gros)가 그린 이집트와 시리아에서의 나폴레옹을 보며 이국적인 것에 대한 선망을 키워왔던 들라크루아에게는 이국적 배경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보여주어 강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그림 소재가 되었다. 1824년 살롱에 출품한 [키오스섬의 학살 Scenes from the Chios Massacres]은 그가 그리스 독립 전쟁을 주제로 그린 첫 번째 작품이자 당대의 사건으로 거대한 스케일의 역사화를 만들고자 한 화가의 야심이 집약된 그림이다.
키오스는 에게 해의 터키 접경 지역에 있는 섬인데, 1822년에 터키인들이 섬의 주민 9만 명 중 9백여 명을 뺀 나머지를 죽이거나 잡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화가는 신문 기사나 회상록 등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자신과 친구의 소장품을 참고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회화적으로는 그로의 [ 자파의 전염병 환자들을 방문한 보나파르트 ]를 참고했다. [단테의 배]에서 발견되는 조각과도 같은 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화가는 이를 ‘ 미켈란젤로 와 벨라스케스 를 종합’하고자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치고는 이례적으로 밝은 화면은 당시 파리에 공개된컨스터블, 보닝턴 등 영국 풍경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 밝은 화면은 긍정적인 느낌을 주기보다 화면 전체를 창백하게 만들어 인물의 비참을 강조하고, 세부에 병치 된 보색들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한다.
높이 4미터가 넘는 화면의 절반은 원경으로 비어 있다시피 하고, 전경에 가로로 배치된 인물 중에서도 주인공이 없는 구성은 당시 많은 관람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제목과 달리 학살의 장면도 보이지 않는다. 화면 오른쪽에서 여인을 끌고 가는 말 탄 아랍인의 경우도 공들여 그려진 번쩍이는 의상과 장신구, 말을 제압하는 솜씨 등에서 야만성보다는 고상한 매력이 느껴진다. 희망을 잃고 죽거나 포로가 될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지극히 감상적인 표정이나 자세는, 전염병이나 재앙의 묘사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회화적 모티브를 종합한 것으로 서로 연관이 없이 파편적으로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신고전주의를 비롯한 전통적인 역사화가 지켜온 원칙에 대한 거부로 읽혀 들라크루아는 새로운 바로크, 낭만주의의 기수로 부각된다.
![]() [키오스섬의 학살] 1824년 | ![]() [미솔롱기 폐허의 그리스] 1826년 |
그리스 독립 전쟁을 주제로 한 두 번째 그림인 1826년의 [미솔롱기 폐허의 그리스 Greece on the Ruins of Missolonghi]에는 그런 사건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돌더미 위에 서서 도움을 요청하는 동작을 취하고 있는 여성이 보이는데, 이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에 등장하는 여성과 같은 알레고리로, 여기서는 그리스 자체를 나타낸다. 고대부터 도시들이 수호신으로 삼은 여신 티케(Tyche)는 머리에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 모양의 관을 쓴 모습인데 들라크루아는 이것을 꽃무늬 머리 장식으로 바꾸었다. 푸른색과 흰색, 금색으로 빛나는 그녀의 의상과 흰 피부가 화면을 압도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 오른쪽 뒤에 보이는 아랍인 복장의 흑인은 터키군에 합세했던 이집트인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미솔롱기는 그리스 본토 남부에 있는 도시로, 터키의 포위에 맞서 1년 동안 버티다가 기근과 질병으로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해지자 1826년, 최후의 방어자들이 광산을 폭파시켜 점령군 일부와 함께 자멸을 선택한 곳이다. 이곳은 그리스를 돕겠다고 참전한 시인 바이런이 1824년에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림 오른쪽 아래 돌더미 사이로 보이는 손은 바이런의 시 [아비도스의 신부] 중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화가가 시인에게 바치는 추모의 의미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한 나라, 한 도시에 헌정된 그림이고 그 전통이 피카소의 [게르니카]에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국적 판타지
들라크루아는 1832년 1월부터 7월까지 루이-필립의 대사인 모르네 백작(Comte de Mornay)의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모로코를 방문해서 스페인과 알제리에도 들렀는데, 이 여행은 그에게 이전 시기 화가들의 이탈리아 여행에 맞먹는 영향을 끼쳤다. 호메로스의 시대에 온 것 같다고 감탄하고, 가는 곳마다 그림이 될 만한 것이 있다고 했던 그는 이곳의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과 강렬한 색채를 스케치북에 담았고, 이것은 이후에 제작되는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가까운 곳에 눈을 돌린 것은 1840년대 이후의 꽃 그림을 그릴 때를 제외하고는 이때가 유일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선보인 그림이 [방 안에 있는 알제의 여인들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로, 이전의 야심작들에 비하면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당대와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다른 어떤 작품에 못지 않게 크다.
![](http://ncc.phinf.naver.net/ncc01/2010/9/16/24/2.jpg?type=w646)
[방 안에 있는 알제의 여인들] 1834년
캔버스에 유채, 180×229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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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먼 것일수록, 자신과 다른 것일수록 더 큰 매력을 느꼈던 낭만주의자들에게 동방의 이슬람 국가는, 혁명을 겪은 기독교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곳, 그래서 최고의 판타지를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와 전제군주제에 대해 병적인 수준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들만의 공간인 하렘(harem)은 그런 환상의 정점이었다. 알제리는 1830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곳으로 들라크루아의 여행도 식민지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알제리에 머문 것은 6개월 여행 중 귀국하기 직전 3일밖에 안되었다. 꿈에 그리던 하렘 광경도 그때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알제에서 과거 기독교도였다가 개종한 사람의 집 하렘을 구경할 기회를 얻어 스케치를 했고 이를 토대로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실제로 하렘은 서구인들의 환상과 달리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를 하는 생활의 공간이지만, 서구남성들은 이곳을 한껏 치장한 여성들이 모여 남성을 기다리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장소로 상상했다. 이슬람 국가를 식민지로 삼을 때도 가장 먼저 약탈하려고 한 곳은 전제군주를 위해 잠겨있던 하렘이었다. 들라크루아는 하렘에서 여인을 끌어내기보다 서구의 관람자들을 하렘 안으로 초대했는데, 그 하렘 역시 화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된 모습이었다.
들라크루아가 그려낸 하렘은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고요하고 우아한 장소이다. 타일, 베개, 바닥깔개, 액자 등 실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가장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은 주인공인 여성들이다. 이들은 정물화처럼 물담배를 피우는 것 이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데 짙은 화장을 하고 반지, 팔찌, 발찌, 목걸이, 귀걸이 등 할 수 있는 장신구는 모두 걸친 상태이다. 가운데에 앉은 여성은 긴 목걸이에 회중시계까지 걸고 있다. 별 이유 없이 누드로 등장하던 들라크루아 그림 속 여성들에 비하면 이 작품의 여성들은 노출이 자제되어 있지만, 비치고 반짝이는 화려한 색채의 옷은 누드보다도 더욱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들라크루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이 작품에도 드로잉의 실수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들도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에 대해서는 호평을 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색채의 성격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 보색 대비 이론들을 알고 있었고, 북아프리카 여행 당시의 스케치에 ‘중간톤은 검정을 섞는 것이 아니라 보색을 병치해서 얻을 수 있다’는 메모를 적어 놓은 등 나름의 색채 연구를 진행했다. 이 그림은 그런 연구의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쇠라, 시냑과 같은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를주의 깊게 보고 자신들의 회화 언어를 만드는 데 참고했고, 피카소와 마티스도 이 작품을 모델로 한 연작으로 여기에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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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사냥] 1854년
캔버스에 유채, 73.5×92.5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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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의 낭만적인 환상 속에서 여성은 주로 하렘에서 나른하게 졸고 있는 성적 대상이거나 약탈과 납치, 폭행의 대상이다. 그가즐겨 그린 남성은 이런 약탈과 납치, 살육의 주체로 자주 등장한다. 문학이나 신화에서 주제를 가져와 여성을 납치하는 루벤스적인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가장 들라크루아다운 그림은 야생 동물 사냥 그림들이다. 활동 초기부터 야생 동물의 흉포함에 이끌렸던 그는 동물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고, 나중에는 여기에 이국적인 요소를 포함시켜 동방의 의상을 착용한 남자들이 맹수를 사냥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의 자유로운 붓 자국이 만들어내는 운동감과 강렬한 색채가 주는 깊은 감정의 효과는 이런 주제에 잘 어울렸다. 그의 이런 면은 에드가 앨런 포와 비교되기도 했는데, 화가 자신은 이런 비교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마지막 역사화가
들라크루아는 자신을 고전적인 화가라고 생각했고 자신을 낭만주의자라고 할 때는 항상 단서를 달았다. 그는 “낭만주의가 내 개인적 인상을, 학교에서 배우는 틀에 박힌 유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 노력을, 아카데미 요소에 대한 혐오를, 자유롭게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지금 낭만주의자일 뿐 아니라 15살 때부터 낭만주의자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언급과 대표작을 통해 본 이미지로 봤을 때는 정부와 무관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그의 주요 작품은 모두 정부가 구입했고, 이력 중반 이후 그가 몰두한 일은 공공 기관과 교회를 장식한 대형 역사화와 종교화였다
![](http://ncc.phinf.naver.net/ncc01/2010/9/16/250/4.jpg?type=w323)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61년
벽면에 유채와 밀랍, 751×485cm, 생장주 채플, 생쉴피스 성당,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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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작품을 호평하던 기자였다가 7월 왕정의 상무 및 공공 미술 장관(Ministre du Commerce et Travaux Publics)으로 재직하게 된친구 티에르(Louis-Adolphe Thiers)가 그에게 1833년 부르봉 궁전(Palais-Bourbon)의 알현실(Salon du Roi)과 1838년 같은 건물에 있던 국회(Chambre des Députés) 도서관 벽화를 맡긴 것을 시작으로, 들라크루아는 1840년에는 뤽상부르 궁전의 상원의 도서관 천장화를, 1849년에는 생쉴피스(Saint-Sulpice) 성당의 생장주(Saints-Anges) 채플 벽화를, 1850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의 아폴론 갤러리(Galerie d’Apollon) 천장화를 주문 받게 된다.
그는 루이-필립이 베르사유 궁전 안에 만든 프랑스 역사 박물관에 걸 두 점의 그림을 주문받아 영국왕 헨리 3세를 무찌르는 루이 9세를 그린 [타유부르 전투]와 알제리 정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중세 주제 그림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십자군]을 제작하여 역사화가로도 입지를 굳혔고, 보들레르는 그를 “진정한 종교화를 구상할 수 있는 유일한 화가”이자 “보편적인 화가’라고 칭송했다.
1861년에 완성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은 생쉴피스 성당의 생장주 채플에 들어간 세 점의 작품 중 하나로 그의 마지막 대작이다. 이 작품에는 라파엘로 등 과거의 거장들에게서 취한 주제와 구성에 그만의 자연 습작이 결합되었다. 이 그림 특유의 밝고 부드러운 질감은 그가 실험한 파스텔 기법과 베네치아의 거장 베로네제, 틴토레토의 영향이다. 그는 이 그림에서 자유로운 붓질로 엮인 다채로운 색채의 다발이 서로 짜인 것 같아 보이는 파스텔 기법인 플로슈타주(flochetage)를 유화에 성공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기술적 실험을 끊임없이 진행했고, 점차 명암보다 색채의 대조로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세상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런 면에서는 그는 르동과 고갱의 선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전통적 의미의 제자를 두지는 않았고 벽화 주문을 받은 1833년부터 조수를 고용했는데 그는 이들을 그냥 고용인으로 생각했다. 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나이가 들어가며 친한 친구만 만났는데 특히 조르주 상드를 통해 알게 된 쇼팽을 좋아했다. 1855년에 만국 박람회에 35점의 작품이 선보여 호평을 받았고, 같은 해에 레지옹도뇌르 3등 훈장의 수훈자가 된다. 그는 비평에 민감한 편이었고,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누리게 된 이후에도 ‘영광(gloire)’을 원했다. 1857년에는 8번의 시도 끝에 미술 아카데미(Académie des Beaux-Arts) 회원이 되었다. 1859년 살롱에 출품한 그림들이 혹평을 받자 이후로 살롱에 작품을 내지 않았다. 1863년 폐렴이 악화되어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여러 명의 여성과 우정, 애정, 불륜 관계를 맺었는데 사망할 때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은 28년 동안 그를 도와준 가정부 제니 르 기유였다.
들라크루아의 풍부한 상상력과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개발한 비정통적인 형식과 기법은 당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사망 직후부터 그의 작품은 높은 가격으로 팔리며 인기를 누렸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새로운 세대, 특히 마네, 퓌비 드 샤반느, 시냑 등에게 그는 위대한 해방자였다. 19세기 말에 그의 위치는 연구자, 화가, 대중에게 이미 확고해졌고, 20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나왔다. 1963년에 루브르에서 화가의 사망 백 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푸생 이후 프랑스 화가 중 유일하게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진 화가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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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0.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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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희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블로그 : http://nickoftime.blog.me
이미지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들라크루아 미술관, 보르도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네이버 지식백과]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출처: 네이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5628&cid=40942&categoryId=34396
두산백과
페르디낭 들라크루아
- 요약 프랑스의 화가.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 빛깔의 명도와 심도의 강렬한 효과 등을 사용한 낭만주의 회화를 창시했다.
원어명 |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
---|---|
출생-사망 | 1798.4.26 ~ 1863.8.13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예술 |
출생지 | 프랑스 생 모리스 |
주요작품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알제의 여인들》(1834) |
1798년 4월 26일 프랑스 생 모리스에서 출생하였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 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컨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 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18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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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nang8585/UHOP/78?q=%B5%E5%B6%F3%C5%A9%B7%E7%BF%CD
낭만주의 거장 들라크루와
■낭만주의의 거장이자 색채의 해방가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르와 만큼 서양미술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도 드물 것이다. 그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주제면과 양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주제면에서는,〈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1822년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고,1823년 제리코가 사망하면서부터 프랑스 낭만주의의 새로운 거장이 되는 들라크르와는 문학·음악·종교 등에서 주제를 취하면서 이후 10년 동안〈키오스 대학살〉(1824),〈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등 격렬한 성격의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다. 이러한 그의 낭만주의적 주제는 모로·퓌비 드 샤반느에 이어 르동의 상징주의로 이어져 근대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양식적인 면을 살펴보면 1832년 모로코 여행 이후 그는 이전의 작품들에 보이는 전통적인 기법,즉 명암의 대비와 화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유약의 덧칠 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창적 기법을 선보인다. 색채를 분할하고 붓질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화면에 거칠고 표현적인 특성을 남기는데, 이로 인해 색채가 회화의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되고 붓 터치가 하나의 독립적 모티프가 되는 것이다.〈알제리의 여인들〉,〈유대인 결혼식〉,〈탕헤르의 광신도들〉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적 특징은 선이 아닌 색채에 기초를 두는 쿠르베나 바르비종파,그리고 인상주의라는 19세기 미술사의 또 다른 중대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들라크르와는 하나의 고정된 화파 안에 집어 넣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작가다. 그의 회화적 특질은 단순한 낭만주의를 넘어선다. 작품 세계가 장식적이며 바로크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고전주의의 단순성과 웅대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 미술의 규범과 그것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변화된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데, 그런 연유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생 술피스 성당의 작품〈야곱과 천사의 싸움〉(1849~64)을 제외하고 들라크르와의 종교화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사실 그의 초기 종교화 작품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디드로의 무신론·볼테르의 반교권주의·루소의 검신론에 빠져있던 들라크르와는 오랫동안 불가지론을 주장했다. 1850년 이후 나이가 들면서 그의 이러한 불가지론은 형이상학적 고뇌로 대치되고 있다. 이 정신적 추구는 신약성서의 유명한 장면들을 휴머니스트 합리주의자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다루기 시작한 계기가 된다. 우선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고뇌에 밀착,그리스도의 육체 위에 쏟아지는 수많은 비탄의 장면을 고뇌·슬픔·혼란으로 표현하고 있다.〈갈릴리 호수 위의 그리스도〉는 광포한 자연 앞의 인간에 관한 극적 주제를 바다의 정경과 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이 종교화의 풍경 장면은 성서 개념에 충실한 완벽한 상상화인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상상력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들라크르와는 단 한번도 살롱전에 순수한 풍경화를 출품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후기에 자연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은 역사화 작품들보다 훨씬 더 미학적 감수성을 보여준다.1840년부터 그는 자연현상에 관해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실험에 몰두했다.이러한 연구의 기본적 동기는 모든 종류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들라크르와의 열망이라고 하겠다. 그의 계속된 색채 분할은 그의 자연과의 교감을 잘 나타내 주며 풍경화가로서의 재능을 부각시켰다.
파이톤을 물리치는 아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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