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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PICK<에르블레 풍경>, 비운의 예술가 임용련을 추억하다

sosoart 2019. 3. 15. 19:46

http://www.mmca.go.kr/pr/blogDetail.do?bId=201903150000191


2019.03.1584

MMCA PICK<에르블레 풍경>, 비운의 예술가 임용련을 추억하다



임용련, <에르블레 풍경>(1930)

임용련, <에르블레 풍경>(1930)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사의 명화 이야기

지난 2월 이중섭의 <투계>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번에는 그의 첫 스승 임용련(1901~?)의 작품으로 넘어가 볼까 한다. 먼저, 임용련이라는 예술가의 소개부터 하자면, 그는 1901년 평양 근처 진남포에서 태어나 서울의 배재고보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 학교는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곳으로, 지금도 정동에 당시 건물이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문학인, 예술가들을 양산했던 이 학교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임용련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가 이름을 중국식 ‘임파’로 고치고, 금릉대학에서 수학 후 가짜 여권을 만들어 1922년 미국 시카고에 정착한다.

그는 지금도 유명한 미술대학으로 남아있는 시카고 미술대학(1922년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전문학교)을 졸업하고, 동부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에 편입해 192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 후 장학생 혜택으로 1년간 유럽 연수를 할 기회를 얻어 파리로 건너가는데, 거기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여성화가 백남순(1904-1994)을 운명처럼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신혼집을 차린 곳이 바로 파리 북서쪽 센 강 어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에르블레(Herblay)였다. 바로 그 신혼집에서 내다본 마을 풍경을 그린 작품이 <에르블레 풍경>(1930)이다. 실제로 그런 장소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집요한 미술사가들이 에르블레를 찾아가 찍어놓은 사진이 미술관 연구센터에 남아 있어 함께 소개한다.

에르블레 풍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김복기 기증

에르블레 풍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김복기 기증

서론이 길었다. 이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요약하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린 직후 집안 사정으로 귀국하여 동아일보 사옥에서 <임용련, 백남순 부부 전>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들은 상당히 ‘주목받는 화가들’이었다. 하지만 엘리트 예술가들이라고 해도 1930년대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더구나 3·1운동으로 쫓겼던 신세에 외국에서 고등 지식을 배워온 인물이었으니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그를 받아준 곳이 정주의 오산고보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일 뿐 아니라 기독교계의 가장 핵심 인물이었던 남강 이승훈이 1907년 세운 학교였기에 적절한 거처가 되었을 것이다. 1931년, 오산고보에 미술 및 영어 교사로 부임한 임용련은 이중섭과 사제지간으로 만난 후 아내 백남순과 함께 이중섭의 첫 스승이 되어 주었다.

첫 스승은 화가의 인생에서 특히 중요하다. 왠지 이 작품 <에르블레 풍경>을 들여다보면, 임용련의 필체 어딘가에서 이중섭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강 위의 물결이나, 강 건너 줄지어 선 나무들을 표현하기 위해 유화물감 위에 뾰족한 것으로 다시 긁어낸 기법은 이중섭이 잘 사용하던 방식이다. <투계>에서도 그랬듯이 이중섭은 유화 물감의 표면 위를 긁어내어 시간의 흔적을 표현한 듯한 방식을 여러 차례 활용했다.

무엇보다 임용련과 이중섭의 공통점은 ‘연필화’를 즐겨 그렸다는 것이다. 현재 개인 소장으로 남아있는 임용련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연필화 성화(聖畵)는, 후에 이중섭이 애정을 가졌던 연필화의 원류를 보는 것 같다. 그림이 뭐 연필로 그리면 어떻고 크레파스로 그리면 어떠랴. 담배 싸던 은지에 새기면 어떻고, 장판지 위에 그리면 또 어떠랴.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이 우리 미술의 역사에는 무수히 많았던 것이 중요할 뿐이다.

임용련 사진 (1923)
임용련 사진 (1923)

안타깝게도 망국의 한을 품고 한국에선 ‘임용련’으로 중국에선 ‘임파’로 미국에선 ‘길버트 임’으로 살았던 그는, 식민지 조선에 귀국해서도 제대로 된 화가 생활 한번 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통역사로 불려 다니다가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의 부인 백남순은 1964년 홀로 미국에 이민을 가서 90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다. 1980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이재현이 연출한 연극 <화가 이중섭>의 막이 올랐을 때, 백남순은 자신과 그의 남편의 이야기도 담겨 있던 그 연극을 보고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이중섭이 매우 불행한 시대를 살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중섭 만큼 작품을 남기고 명성을 누리는 화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세대 예술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따라 해 질 무렵 센 강에서 불어오는 습윤한 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렸을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이 왠지 더 어둡고 쓸쓸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사

김인혜 학예연구사
미술사 박사. <아시아 리얼리즘>(2010), <덕수궁 프로젝트>(2012),
<이중섭: 백년의 신화>(2016), <윤형근>(2018) 등 다수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