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골 통신-인생2막 이야기/다헌정담(茶軒情譚)-일상의 談論

공방의 연탄불을 갈며......

sosoart 2019. 4. 14. 17:48

 



공방의 연탄불을 갈며......      <2006. 3. 25>


봄바람 치고는 너무 폭풍처럼 몰아칩니다.

이미 봄을 일찍 내려놓음을 후회하고 있음일까?  다시 거두어 가려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바람의 휘몰아치는 서슬에 마당의 강아지 플라스틱 물그릇이 달그럭 거리며 저 쪽 밭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을씨년스럽기만 하여, 아침에 복돌이와 마당의 녀석들 밥을 주고 토순이, 토돌이 물과 사료를 주고 얼른 공방 작업장으로 들어가 난로 뚜껑을 열어보니. 앗 불싸! 잘못하면 불 꺼트릴 뻔 했습니다.


어제 “同樂茶”를 끓인다고 난로 공기구멍을 활짝 열어 놓은 걸 잊은 채, 그냥 이쪽 거실로 와버렸더니 연탄이 하얗게 다 타고 빨간 불이 시원찮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려.


얼른 연탄불을 갈고, 작업을 할까 하다가 바람소리에 마음이 심란하여 내처 이쪽 동락재로 와서 벽걸이의 단청 채색 디자인 작업을 하였습니다.


寺刹 단청의 문양은 기하학적 문양으로서 그 정교하기가, 언뜻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아주 섬세하고 그 다양함과, 채색의 화려함과, 또 색채의 gradation이 현대의 미술가들이나 색채 디자이너들의 그것 보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절도가 있으며,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목공예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우리 옛 선조들의 木 건축물과 전통 생활의  목가구, 생활 목공예품과 일상용품들을 보며, 그 설계도를 유추하며 짜맞춤의 結構法을 살펴보면, 우리네 조상들의 慧眼과 과학적 思考와 技法에 새삼 놀라고 탄복하게 됩니다.


비과학적일 것 같으면서도 아주 과학적인, 느슨한 것 같아도 아주 단단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조상들의 생활에서의 과학은 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합니다.


백의민족이라 하여 흰색 밖에 없는,  색에 대하여 아주 단순한 色痴의 민족일 것 같지만, 전혀 그 반대의 아주 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화려한 색채의 마술사 같은 우리네 조상님들이라는 것을,  단청의 색채를 模寫할 때마다 다시금 깨닫게 되고 놀라게 됩니다.


함부로 색을 남용하지 않고, 화려함과 부귀와 영예를 상징하는 모든 사물에는 어김없이 화려함과 절제된 색채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대부들이나  班家의 일반적인 木家具는 화려한 색채의 것 보다는 은은하게 싫증나지 않는 木理를 살려 자연스럽고,  쓰면 쓸수록 정이 가며, 손때가 묻을수록 그 빛이 더하는, 은근한 無色의 아름다움을 즐겨했던 것을 보면, 정말 우리네 조상님들은 멋과 맛을 아는 자랑스런 선조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실로, 저는 젊은 30대 까지는 우리네 한국화, 문인화 등을 보면 졸음이 올 정도로 너무 靜的이라며,  아예 멀리 하였고,  취미로 서양화를 즐겨 그렸었으며, 우리네 일상 전통 목가구인 옛날의 오래된  장롱이나 반닫이, 병풍, 생활가구 등은 고물이 다 되었다는 구실로 함부로 다 내다 버리거나 불 때어 없앴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요.


그냥 두고, 잘 보관하였다면 지금은 골동품으로서 가치도 충분하였을 터이고, 고풍스런 고가구가 멋스럽게 집안을 장식하는 효과도 있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옛날 어른들의 말씀이나 흔적들을 함부로 버리거나 홀대를 한다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나 똑 같은 것 일진데, 당시에는 왜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이 길에 들어서서,  전통 목가구를 연구하고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새삼 孟子의 이런 말씀이 머리를 콕콕 쑤시고 있습니다.


“出乎爾者 反乎爾者”  출호이자 반호이자

너로부터 비롯된 것은 너에게 도로 되돌아간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물물을 마시고 나서, 다시는 제가 먹지 않을 것이라 여겨,  우물에 침을 뱉은 인사가 다시 그 물을 먹는다”는 경우처럼


어떤 물건을 소중하게 잘 써 오다가,  다 낡고 고장 난 헌 것이라고, 함부로 버리고 나면 또 아주 요긴하게 필요한 적에 없어서 낭패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쓰는 물건도 그러하듯이, 조상님들의 말씀, 가르침, 예절과 정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 소중한 것이 일회용, 일회적으로 버리고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님들과 부모님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한 적이 많았던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내가 한 행동 그대로, 나의 자식들에게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닐까? 반성을 해봅니다.


위의 맹자의 말처럼,

내가 베풀었다면 그도 베풀 것이고

내가 속이고 등을 친다면 그도 역시 나의 등을 후려칠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하게 하면 선이

악하게 하면 악이 그대로 돌아올 텐데

나의 삶이 어질다면

되돌아오는 것마다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사찰 단청 문양을 벽걸이 작업에 응용해 옮겨보며, 그 아름다움의 화려함에 새삼 다시 한 번 반하였고, 또 그 작업의 섬세함과 빈틈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전개에 놀랐으며, 그 작업의 어려움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과연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참 훌륭하셨음에 머리 숙여 집니다.


이렇게 쌀쌀하고, 독하며,  심술 맞은,  꽃샘추위가 지나는 밤에는 연탄불 지글지글, 돼지고기 한 점에 땅 속에 묻어 놓은 막걸리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술을 퍼서, 한 사발 꿀꺽꿀꺽 들이키던 40년 전, 서울 광교의 삼각동 선술집 생각이 간절합니다.


문을 열면

만나지

떨리는 손목으로

여러 얼굴들을

만나지.


쌀값도 

연탄값도 걱정없이

술을 들고 있지.


아들 딸들의

껑충 뛴 등록금도 잊고


술을 들고 있지.

나도 한 잔 오래만에

들어볼까.

어린 북어 새끼들을

우선 씹으며

목청을 가다듬는다.


고약한 세상에

고약한 얼굴들은 없고

단 한잔에

어둠들이 물러간다.


한잔 더 마셔야지

또 마셔야지

반가와서 마시고

억울해서 마시고

젊어서 한잔

늙어서 한잔

밤은 이렇게 만나지.


신문기사 일단짜리를 읽으며

용케도 흥분을 참는

대담한 동지들은

우선 술을 들지.


밤엔 약속없이

문을 열면 만나지. 


박봉우 시인의 <밤이 되면 만나지> 였습니다.

      

이 산촌의 깊은 밤에도 바람이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밤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잠자리를 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