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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서금희- 내게 남겨진 이름, 내가 짓는 이름/ 김성호

sosoart 2019. 6. 1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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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서금희 / 내게 남겨진 이름, 내가 짓는 이름

김성호

내게 남겨진 이름, 내가 짓는 이름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작가 서금희


I. 엄마 - 가족이 남긴 이름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엄마! 그녀는 나를 낳아 기르고 사랑을 주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로부터 그저 내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은 엄마로부터였다. 누구나 그렇듯 받은 사랑조차 감사할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그러한 시절은 내 인생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안다. 그 사랑이 너무 깊고도 넓은 사랑임을 말이다. 내 아이도 언젠가는 지금 내가 알게 된 사랑을 깨닫는 날이 오겠지. 분명 지금의 나처럼 엄마가 주었던 사랑에 진심으로 고마워할 거야. 아주 먼 훗날이 되겠지만 말이야. 
필자는 작가 서금희의 마음을 빌려 위의 글을 써 본다. 편차가 있겠지만, 엄마는 누구에게나 그러한 존재이다. 서금희에게도 엄마는 그러하다. 서금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 어린 시절부터 삼남매를 홀로 키우신 어머니의 사랑을, 스스로 엄마가 되고 난 ‘지금, 여기’에서 되새긴다. 엄마는 그녀를 세상에 있게 한 생명의 근원이자, 자신의 유전적 분신을 허락한 ‘원(原)몸’이다. 그녀의 생각을 자라게 하고 그녀의 지금 이 모습을 있게 한 본 바탕이다. 어느덧 작가 자신도 엄마가 되었으니 그 깨달음이 체화되고 가족의 사랑으로 확장된다. 
작가 서금희는 자신의 작품 안에 ‘가족과 어머니’, ‘내리사랑의 의미와 가족애’를 담는다. 인물 형상을 싸고도는 굵고도 짙은 외곽선은 하나로 연결된 채 그 안의 형상들을 하나로 품는다. 그녀의 작품 〈엄마 품〉(2018)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품에 안은 아이와 어머니의 형상을 둘러싸고 있는 선은 서로의 형상을 타고 흐르면서 이어진다. 보라! 하나의 선을 공유하는 어머니의 얼굴과 아기의 얼굴은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혈육의 가족애’를 드러낸다. 또 다른 작품 〈가족〉(2018)을 보자.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안에 안긴 채 고요한 평안 속에 거한다. 아이들을 안은 어머니는 그들을 보호함으로써 충만한 행복에 거한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연결하는 굵고 검은 선은 가족이라는 한 덩어리의 공동체를 단단하게 결속한다. 
작가 서금희게 있어 혈연이 만든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는가? 그녀는 엄마의 딸로, 삼남매의 형제, 자매로 비교적 단출한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내오다, 결혼을 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속으로 잠입한다. ‘또 다른 타자’로부터 호명되는 아내, 엄마, 며느리와 같은 ‘또 다른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자신을 있게 한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경계가 새로운 혈연으로 확장되면서 만들어진 갖게 된 이름이다. 그렇다. 엄마라는 호명은 ‘가족이 남긴 이름’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엄마는 더욱 더 그립고 감사한 이름이 된다. 


서금희, 엄마품, 116.8×80.3cm, mixed media, 2018


서금희, 가족, 130.3×130.3cm, mixed media, 2018



II. 화가 엄마 - 가족과 함께 쓰는 이름 
혈연으로부터 사회로 관계 지형을 넓혀 가게 되면서, ‘타자로부터 호명되는 주체의 또 다른 이름들’은 자연스럽게 증대한다. 선생, 제자, 선배, 후배, 동료, 친구, 이웃과 같은 명명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 이름들은 타자들이 준 것이다. “주체성이란 타자의 출현과 개입을 통해 비로소 발생한다”는 들뢰즈(G. Deleuze)의 견해처럼 나라는 주체는 타자로부터 호명되고, 타자로부터 위상이 결정된다. 달리 말해 타자는 나의 주체를 인식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 들뢰즈가 언급하듯이, 타자는 늘 ‘선험적 타자(Autrui a priori)’이다. 즉 타자는 나의 지각장의 질서를 구성하며, 나의 지각의 문법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타자가 주체를 호명하면서 형성되는 만남의 관계 지형은 이제 사회 속으로 침투하면서 복잡하게 전개된다. 케네스 거겐(K. Gergen)이 언급하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에 따르면, 이처럼 복잡하게 확장되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 지형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주체와 자아를 동시에 가지게 하고 수많은 역할을 하도록 구속한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사회에 흡수된 자아(saturated self)는, 거겐의 지적대로, ‘진실한 자아(authentic self)’의 개념을 상실하고 ‘자아가 전혀 없는(no self at all)’ 상태가 될 위험조차 내포한다. 
‘엄마’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작가 서금희게 있어서도 이러한 ‘혼란스러운 주체적 자아’의 상태가 없었을 리 없다. 때로는 서금희라는 본연의 이름은 호명조차 되지 않고 타자로부터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잊혔던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금 깨달았으리라. 작품 〈첫 번째 외로움〉(2018)에는 작가의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일본어 몸뻬(もんぺ)에서 유래한 일명 ‘몸빼 바지’ 즉 ‘노동을 위한 편안한 차림의 바지’를 입고 있는 어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있고 뒤에서 작가로 보이는 인물이 포옹하고 있는 작품은, 작품 제명처럼, 어머니를 외로움과 연민의 대상으로 보게 만들기에 족하다. ‘자녀들을 위해 일만 해 온 어머니’, ‘헌신적 사랑을 베푼 어머니’라는 메시지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인물 형상을 건물의 구석진 곳에 위치시킨 작품  〈반성〉(2018)에는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작가의 마음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작가’의 처절한 반성인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가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면서 ‘가족과 함께 쓰는 이름’인 셈이다. 


서금희, 첫번째 외로움, 145.5×112.1cm, mixed media, 2018


서금희, 반성, 112.1×112.1cm, mixed media, 2018


III. 화가 서금희 - 스스로 직립하는 이름 
그녀는 2017년만 예외로 하고, 2012년 이래 ‘나 +’라는 동일한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해 왔다. 2017년은 ‘다이어리’라는 주제였으나 ‘나 +’라는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임을 감안할 때, ‘나 +’라는 주제는 작가 서금희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주체적 자아인 나’로부터 더해지는 ‘무엇’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장과 사회적 확장을 의미함과 동시에 ‘만남의 관계학’에 관한 고찰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그녀의 작품 〈하나 더하기 하나〉(2018)와 또 다른 작품 〈12월 14일〉(2018)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자는 얼굴을 맞대고 입맞춤을 하고 있는 남녀의 형상이며 후자는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형상이다. 두 작품은 ‘새로운 만남’으로 그녀의 ‘관계 지형’에 새롭게 편입한 반려자의 존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부부는 더하기( + )의 세계관을 실천한다. 한 주체가 타자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사랑을 키워 나가면서 자녀의 탄생을 맞이하는 내러티브를 통해 가족을 형성하는 더하기(+)의 세계관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서금희, 하나 더하기 하나, 116.8×80.3cm, mixed media, 2018


서금희, 12월14일, 50×60cm, mixed media, 2018


유념할 것은, 이러한 ‘나 +’라는 주제가 현재의 작업처럼 ‘주체와 타자의 만남의 관계 지형’이라는 의미로 자리 잡기 이전에, 그녀의 작업은 ‘주체와 사물의 관계 지형’에 대한 조형적 성찰을 먼저 실험했다는 점이다. 선인장을 드로잉으로 탐구했던 2012년의 1회 개인전, 선인장에서 인물로 변해가는 형상을 탐구했던 2013년의 2회 개인전, 선인장이자 사람의 모습이 겹쳐진 이미지를 탐구했던 2014년의 3회 개인전이 바로 그것이다. 선인장이 사막과 같은 악조건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까닭은 작은 침형(針形)의 잎이 수분의 증발을 막고 줄기에 저장되어 있는 수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선인장의 ‘침형의 잎’ 혹은 ‘잎이 퇴화된 가시’는 종종 ‘인고(忍苦)의 상징’처럼 간주된다. 이것은 모든 어려움을 인내해 온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은유’이자 그 인내의 세월을 동행해 온 ‘자신의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 +’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서금희, 생각나무 116.8×80.3cm, mixed media, 2018

최근작은 ‘나 +’의 주제 의식을 사람과 사람 즉 ‘주체와 타자’의 만남의 관계 지형으로 확장한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캔버스 천을 씌운 나무 패널 위에 화려하면서도 지극히 서민적인 질박함이 함께 녹아있는 ‘몸빼 옷’의 천을 잘라 ‘발견된 오브제’를 콜라주의 방식으로 덧붙이면서 말이다.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히고 한 덩어리처럼 만들어진 인물 형상의 외곽선을 굵고도 검은 플라스틱으로 커팅해서 캔버스 천 위에 올리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깊고 강한 혈육의 관계 지형을, 그리고 그녀가 ‘화가 엄마’로부터 이제 ‘화가 서금희’로 이 땅의 현실 위에 직립해야 할 새로운 세계관을 말이다. 그것은 ‘내게 남겨진 이름’으로부터 이제 ‘내가 짓는 이름’을 찾아 나서는 일이기도 하다. ●  


출전 / 김성호, 「내게 남겨진 이름, 내가 짓는 이름」, 서금희 작가론, 『미술과비평』, 겨울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