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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곽인식>

sosoart 2019. 6. 15. 18:02

http://www.mmca.go.kr/pr/blogDetail.do?bId=201906140000236


포커스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곽인식>


곽인식, <작품 63>(1963) 일부

곽인식, <작품 63>(1963) 일부

전시정보<곽인식>,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 1전시실·중앙 홀, 2019.06.13~09.15

1960년대 ‘물성(物性)’에 주목한 전위적 작품으로
일본과 국내 화단에 영향을 준 작가 곽인식.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내 및 일본 소재 작품 100여점과 자료 100여 점을
출품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곽인식을 논하다

곽인식 작가
곽인식 작가

국립현대미술관은 곽인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내 및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과 자료들을 대규모로 선보인 기념전을 6월 13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 1전시실과 중앙 홀에서 개최하고 있다.

곽인식(1919~1988)은 일본 미술에서 물질의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62년부터 유리, 황동, 종이 등 다양한 소재의 물성을 실험하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시대를 앞서간 작가이다. 그는 사물을 관찰하고 귀 기울여 교감하면서 미술에의 앞선 발걸음을 재촉하고, 생애를 바쳐 치열하게 고민하며 작업을 펼쳤다. 물질성과 관련해서, 서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 아르테 포베라* 움직임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1970년대 전후 모노하*가 주목받았는데 곽인식의 작품은 이를 훨씬 앞선 것이었다.
*아르테 포베라: 일상적인 재료를 통해 물질의 본성을 탐구하고 물질이 가지는 자연 그대로의 특성을 예술로 옮겨 담아 삶과 예술, 자연과 문명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20세기 미술 운동이다.
*모노하: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미가공의 자연적인 물질·물체를 작품의 소재로서가 아니라 주역으로서 등장시켜, 물질에서 직접 예술 언어를 이끌어 내고자 시도했던 작가들을 지칭한다.


사실 196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물질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다. 전위미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곽인식은 이러한 흐름을 어느 정도 읽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되며 자신의 작업에 내재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0~61년 ‘물질감’ 있는 모노크롬 회화에 깨진 유리를 붙이는 작업에서 시작해 1962년 판유리로 유리의 물성을 드러내는 작업에서 정점을 이룩했고, 지속적으로 물성을 작업에서 확장시켜 나갔다. 작가는 1962년부터 1963년까지 그의 작품 행위의 중요 분수령이 된 ‘깨뜨린 유리를 붙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제시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아울러 이번 전시를 위해 48점의 작품들이 보존처리 됐는데, 대다수의 작품이 다양한 소재로 된 실험적인 작업들이라 여러 테스트를 거쳐 몇 개월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곽인식, <작품>(1962) 곽인식, <작품>(1962)

곽인식, <모던걸>(1939) 곽인식, <작품 61-100>(1961)
이번에 복원된 48점의 작품 중 하나로, 패널, 석고, 선글라스로 만들어졌다


곽인식은 일본 미술계를 중심으로 전위예술가로 활동하며 선구적인 작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성과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의 예술가라는 차별적 인식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따라서 <곽인식> 전에서는 국내 및 일본의 작품들과 미공개 자료들을 통해 곽인식의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재조명한다.

곽인식의 삶을 작품으로 만나다

곽인식, <모던걸>(1939) 곽인식, <모던걸>(1939) 곽인식, <작품>(1955) 곽인식, <작품>(1955)

현실을 인식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다 <모던걸>, <작품>
곽인식은 1937년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귀국한 뒤 고향인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1949년경 일본으로 돌아간다. <모던걸>은 기하학적 요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여인상 배경의 기하학적 형태와 면의 분할은 작가가 새로운 미술 사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1950년대에 일본은 패전 후 경제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을 겪게 되는데 그의 작품에도 불안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들이 많다. 그중 <작품>에서는 신체가 왜곡되거나 손발 같은 특정 부위가 지나치게 과장된, 초현실 경향을 반영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곽인식, <작품 65-6-2>(1965) 곽인식, <작품 65-6-2>(1965) 곽인식, <무제>(1969) 곽인식, <무제>(1969)

화폭에 예술가의 행위와 물질성을 담아내다 <작품 65-6-2>, <무제>
곽인식은 1960년대 이후 예술가의 행위가 부각되며 물질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1961년에는 모노크롬 회화에 일상적 오브제인 철사, 전구 등을 부착함으로써 작품을 사물화 했다. 이후에는 유리, 놋쇠, 철, 종이 등 재료 자체의 물질성이 드러나는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작품 65-6-2>에서는 황동판을 구부려 가위로 자른 부위를 놋쇠 철사로 꿰매는 행위를 통해 찢겨진 물질을 봉합했으나, 잘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남북통일 운동을 전개하던 때와도 일치해 물질의 균열과 봉합으로 좌우익의 대립을 극복하려 한 작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비록 일본에서 활동했으나 마음만은 조국과 함께하며 작품 활동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이겨내려 했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한편 그는 일관되게 점, 원이라는 기본적인 형상과 소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원이나 점처럼 축소할 수 없는 표현단위이자 근원적인 형태 요소를 통해 ‘원초적 자연에 회귀하고자 하는 의식’을 표명한 것이다. 1969년에는 종이를 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자른 화면을 제시했는데, 이는 종이가 평면이나 조각이 아닌 하나의 물질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이 시기 다른 예술가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곽인식, <작품 No.11>(1976) 곽인식, <작품 No.11>(1976) 곽인식, <작품 83-B>(1983) 곽인식, <작품 83-B>(1983)

사물에서 표면으로 나아가다, <작품 No.11>, <작품 83-B>
1976년 이후엔 강에서 주운 돌에 물이 밀려들어 온 지점을 표시하기도 하고, 자연석을 쪼개 붙이거나 혹은 손으로 점토에 자국을 남기기도 했으며,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나무 표면에 칠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이는 인간 행위와 자연물이 하나 되는 존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다시 붓 작업을 시작했는데, 1979년에는 종이 위에 색점을 사용해 그리기 시작한다. 종이라는 평면적 속성 위에 색점을 여러 번 포갬으로써 종이는 평면이자 동시에 공간감을 확보하며 표면이 된다. 표면이란 ‘사물이라는 존재를 인정할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유리의 긁은 흔적이나 자연석의 표면 등 그간의 작업과 일관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밖에도 근현대기를 살았던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관객들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그를 기억하는 한국 및 일본의 평론가,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제작했다. 또한 곽인식의 작품 세계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 학술 심포지엄을 8월초에 진행할 예정이다.

< 곽인식> 전을 둘러보다 보면 시대를 앞섰던 그의 실험정신을 발견하고 어떤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물질의 개념이 어떻게 발현되고 전개되어 왔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고 공감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