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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를 추천한다 - 배윤미, 스스로를 드리우는 드로잉/ 민병직

sosoart 2019. 12. 10. 18:35

http://www.daljin.com/column/17479


이 작가를 추천한다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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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배윤미, 스스로를 드리우는 드로잉

민병직

작가적인 본연의 것들을 비교적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장르가 드로잉일 것이다. 드로잉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은 작가의 내밀한, 가장 원초적인 감각과 사유를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과 장점을 지니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풍부한 표현이나 내용상의 제약이 따르기에 본원적인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가 드로잉 자체를 주 작업으로 전면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배윤미 작가는 지금 시대에 흔치 않은 비정형의 드로잉을 고집하고 있는 젊은 작가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단순한 밑그림으로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개념의 드로잉을 통해, 미술을 둘러싼 여러 가지 깊이 있는 생각들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배윤미, 그림.자自,방, 2017, 종이에 연필, 95×90.5cm


특정한 형상을 그리지 않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여러 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질감, 촉감들이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좀처럼 알 수 없는 형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보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 작가의 작업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단일한 질감의 드로잉이 아니라 딱딱한 질감에서 촉촉하고 습한 느낌들은 물론 그리기, 긁기, 문지르기, 겹치기 등의 다각적인 표현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드로잉 특유의 섬세하고 선적인 표현은 물론 덩어리져 물컹하고 말랑한 유동적인 느낌들, 촘촘하고 성긴, 거칠고 매끈한 표현들이 이질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단색의 연필 드로잉을 주로 하고 있지만 여러 종류의 연필들(6H-9B)을 포함하여 수성흑연이나 고체물감, 주묵까지 사용하고 있어 외형상의 단조로움을 반전시키는 세부 표현의 다채로움이 묘한 겹과 결들을 만들어 내고 있어,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들이 앞서지만 정중동의 그것처럼 무척이나 수다스럽고 의뭉스럽게 다가온다.



배윤미, 무제(untitled), 2019, 종이에 연필, 27.3×19cm


이는 그림을 통해 작가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으로 작가의 기억, 감정들, 그 숨겨진 속내들, 삶의 흔적과 자취들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드로잉은 이러한 작가의 내면의 심경들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적합한 형식이지 않았나 싶다. 켜켜이 쌓아가며 혹은 지워내고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작가 자신에 다름 아닐 세상 혹은 화폭과의 밑도 끝도 없는 대화들을 수다스럽거나 속삭이듯 이어나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좀처럼 분명하게 언어화, 가시화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기에 작가의 드로잉이 비정형의 형상들로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이른바 그리기의 수행성의 차원이 더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가 품었을 숱한 사유와 기억들, 감정들을 더하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면서, 그렇게 숨을 고르듯 완급을 조절하면서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는 그리기 행위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에는 이러한 흔적, 자취들, 그 미묘한 떨림, 울림들이 남아있는 것만 같다. 그저 삶에서 마주하는 혹은 일상의 어떤 순간들만이 아닌, 그 사이사이에 자리하는 세상에 대한 복잡다단한 생각들이나 감각의 편린들, 혹은 어떤 긴장들을 드로잉이라는 자유로우면서도 단순하고 절제된 표현들로 담아내려 했기에 그 내밀함의 강도가 만만치 않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세상과의 혹은 세상을 둘러싼 좀처럼 알 수 없는 자신의 삶에 관한 것들,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내밀한 울림으로 여운들로 전한다. 어떤 특정한 형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가적인 것들, 그 내면의 복잡다단한 것들을 마치 그림자처럼 드리운 것 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스스로를 드리우는 그리기, 곧 작가 자신의 존재, 그 이면과 사이의 것들을 음영지게 하는 그런 드로잉이었던 것이다.



배윤미



민병직 / 서드뮤지엄 디렉터
mmmminnnn@gmail.com


- 배윤미(1985-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개인전 ‘그림.자(自), 방’(살롱아터테인, 2017), 단체전 ‘머물던. 것,’(키, 2018), ‘겨우, 겨울’(지라운지, 2015), ‘들림’(가슴시각계발연구소, 2013), ‘춘계예술대전’(코리아나미술관, 2008)
등 다수의 전시 참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뉴드로잉프로젝트’ 우수상 수상(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