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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미술의 현장 : 나는 화가다/ 김성호

sosoart 2019. 12. 10. 18:32

http://www.daljin.com/column/17489


지금, 한국미술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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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나는 화가다

김성호


김성호, 나는 화가다, 2019


나는 소위 제도권의 미술가들이 손가락질하는 거리의 초상화가였다. 그리는 재주 하나 가지고,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한 푼 두 푼 받아먹고 사는 인간이었다. 때로는 캐리커처도 후다닥 그려서 손님의 웃음을 받아먹고 힘을 내던 ‘화가 아닌 화가’였다. 오 년 전 벼르고 벼르던 ‘진짜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거리의 초상화가 일을 그만두었다. 진짜 화가? 그래! 현재, 난 정말로 화가로 살고 있다. 어떻게? 

나는 날마다 작업실로 출근해서 온종일 그림을 그린다. 작업실이야 기껏 원룸 방바닥에 매직으로 선을 긋고 침대 맞은편에 만들어 놓은 공간일 뿐이지만, 나는 거기서 종일 지낸다. 세상은 내가 붓을 들고 움직이는 대로 따라와 주었고, 날마다 내 맘 깊은 곳에서 나만의 세상이 창조되었다. 하고 싶던 일을 미루고 꿈만 꾸면서 살기 싫어서 저지른 일이 이렇게 큰 행복을 가져다줄 줄 알았던가? 쌀이 떨어져 끼니를 거를지라도 나는 그저 행복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운이 좋아 공사 현장에서 일 년에 몇 번 몰아치기 목공 일로 해결하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리. 똑똑! 노크한 집주인이, 삐죽이 얼굴을 내민 내게 궁금한 듯 말을 건넨다. “요즘 일 안 나가요?” 난 주저 없이 말한다. “집에서 일해요. 화가인데요.” 

아! 행복한 화가로서의 삶은 멋지게 펼쳐졌으나 정작 내 작품을 인정받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도 이 미술 동네에서 화가라는 이름을 제대로 들으면서 살고 싶어서, 지원자의 나이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한 레지던시 입주 공모에 줄기차게 지원했지만, 매번 떨어졌다. 정부가 주관하는 미술은행의 작품 공모에도 그림을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림만 보고 판단한다는 지역의 공립미술관에 소장품 구입 공모에도 여러 차례 냈지만, 결과는 매번 낙방이었다. 당연히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렇지만 화가여! 좌절하지 말자.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던가? 세잔도 미술대학에 매번 낙방하지 않았던가? 고흐도 평생 사람들이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아봐 주질 못했는데 뭘! 내겐 행복하고 더없이 좋은 화가의 길이지 않은가? 남한테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이 일을 시작했으니 포기하지 말자. 
전시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가니까. 제도권 안에서 그간의 나의 작품 세계를 멋지게 선보이고 얼치기 화가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떤 화랑에서 나를 초대해 줄 리가 만무하고, 인사동 화랑의 대관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까닭에, 지역의 한 예술회관에 저렴한 대관을 거쳐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포트폴리오만 잘 만들면 된다고 누가 그래서 돈 안 드는 전시를 선택한 것이다. 대신 평론에 돈을 쓰자. 지인의 추천을 받아 제일 잘 나간다는 젊은 평론가 한 명을 만났다. 작업실 방바닥에 커피를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그는 내 그림을 보자마자 말했다. “고생 많으셨죠?” 그 말은 앞으로도 고생이 많아질 것을 예감한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잘 나가던 미술학원이 폭삭 망하면서 거리의 초상화가로 지냈다고 하시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싶네요. 그만큼 작품에 치열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아요. 음, 리얼하네요. 정말 진짜 같아요. 표현도, 마티에르도, 구성도 그렇고 변이... 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이자, ‘뼈 있는 농담’, 앗, 아니, 블랙 유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네, 블랙 유머가 좋을 것 같네요. 입시학원 지도와 초상화가로 살면서 늘 훈련하셨던 묘사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음, 그런데 말이죠. 왜 이렇게 ‘똥’만 그리시는지요?”
“저는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고 그림으로 말하는 화가니까요.”
“아! 네. 그러면 숨겨진 것이 음모인가요? 아니면 진실인가요?”
“그게 딱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난 그림 그리는 화가니까요.” 

*이 글은 팩션(Faction)이다.


- 김성호(1966- ) 파리1대학 미학 전공 미학예술학 박사.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세계』 편집장, 쿤스트독미술연구소장, 중앙대 겸임교수, ‘2014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15 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 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총감독, ‘2018 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 역임. UNIST 박사후연구원. 현재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여주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