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 LIBRARY/미술·디자인·공예 자료집

2019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전 / 하나의 관념을 해체하는 다양한 개념들- 이선영

sosoart 2020. 5. 7. 22:38

http://www.daljin.com/column/17582


2019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전 / 하나의 관념을 해체하는 다양한 개념들

이선영

하나의 관념을 해체하는 다양한 개념들


  

이선영(미술평론가)


  

화단에서 중진 작가로 호명되기 위해서 여태 작업해온 것은 아니겠지만, 미술관급 기관의 공적 인정은 50세가 넘게 걸어왔던 작업하는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든다. 배종헌은 근래에 새로이 작업하는 그림들로 전시실을 가득 채웠고, 허구영은 타자와의 대화적 상상력을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여 의미심장하게 변주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단절과 변주도 연속의 한 국면이라고 보여진다. 각각의 개인전으로 한데 묶여 제시된 배종헌과 허구영은 앞으로 갈 길이 더 먼 이들이지만, 그들이 작업하는 어려운 삶을 버티고 ‘중진’으로 우뚝 선 공통점을 들자면, 그들이 제작하기 만큼이나 생각하기에 힘쓴 작가들이었다는 점이다. 생각을 안 하는 작가가 있겠는가만은,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거나, 심지어는 작업(또는 작품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엇박자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일반인과 달리, 자신의 사유를 실현할 수 있는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만으로 작업을 대체하려 하려는 안이한 경향이 있다.




배종헌, 미장제색  (이하, 사진 출전; 아르코 미술관)



허구영. 여전히 나에게 뜨거운 이미지 중의 하나



생각도 작업도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업보다는 생각이 더 쉽다는 오판으로 그나마의 결과물도 모호해지는 부정적 결과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고 할 때, 이 전시의 작가들처럼  머리와 손이 동시에 움직이는 작가에 대한 신뢰감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2000년대 이후 학계와 예술계에도 몰아닥친 관료화와 형식화의 흐름은 책상 대물림을 위한 도구 외에 얼마나 예술계를 풍요롭게 해주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무조건 열심히 작업 만하는 것도 맹목이다. 예술은 심오한 지식이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미묘한 균형점 위에서 매 순간 곡예하듯이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 어렵다. 곡예사들은 판이 벌려지는 것을 제일 기뻐한다. 그것밖에는 딱히 자신의 삶을 증명할 게 없어서, 작품으로 모든 것을 귀결하기 위해 생각을 포함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벼려온 과정들을 무시할 수 없다. 개념을 물질화된 형식으로 구현하기 위한 선택과 변형, 제작의 과정들이 자료를 포함해서 제시된 전시는 그들이 관념적인 작가들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품의 면면을 보면 개념과 관념은 다르다. 


추상화의 귀결인 관념주의는 이들의 작품처럼 매 순간순간의 반성이나 소소한 발견이 있는 복잡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념주의의 강력한 환원작용은 구체적인 제작은 물론이고, 사유의 노동도 생략하고 자신의 임의적 판단을 반복적으로 우기는데 불과하다. 여기에 타인의 노동력과 기술력에 대한 구매력까지 더해지면 공허함은 더욱 극대화된다. 관념주의는 출발점과 도달점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이 점은 개념과의 차이점이다. 개념은 변화무쌍한 과정들을 중요시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맥락이 깔려 있고, 보이지 않은 것은 보이는 것을 지탱해주고 있다. 물적 형태 외에 텍스트 등이 중요한 작용을 하는 그들의 작품들은 ’개념미술‘이라는 범주로 묶어서 제시되기도 했다. 말과 사물의 간극 속에서, 모든 ’이즘‘은 결국 부정되기에 이르지만, 그들의 작품들이 개념적이지 않다고 볼 수도 없다. 배종헌과 허구영을 개념미술가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들이 학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모색을 했을 1990년대는 어느 때 보다도 예술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던 때로 기억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국면이었던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 말 외환위기가 닥치기 이전까지의 몇 년 간, 본격적으로 전개될 정보혁명의 전야에 세기말의 분위기까지 가세하면서 ’예술‘에 대한 부정(또는 부정을 통한 갱신, 확장)이 만연했다. 90년대의 젊은 작가들에게 예술은 부르주아적이거나, 그들이 (학교가 아닌) 학교 앞에서 새로이 접한 문화보다 재미없는 것이었다. 과격한 단절에의 몸짓은 거친 각목이나 사진 몇 장 걸어놓는 식의 지나친 썰렁함, 아니면 키치로 대변되는 화려하고 기름진 형태들의 쇄도로 나타났다. ‘다원주의’로 평가된 1990년대의 집단적 흐름 속에서도 두 작가는 진지하게 그리고 꾸준히 예술이나 작업에 대한 자기 나름의 대화를 이어갔다. 둘의 작품은 매우 다르지만, 백지상태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물이든 사유든, 큰 것이든 미소한 것이든. 그들은 이전의 것들과 대화한다. 전적인 새로움이나 진보를 섣부르게 주장하지 않는다. 





배종헌 전시전경


배종헌 전시전경


배종헌, 절골입구N1-01_콘크리트 균열과 생채기, 얼룩, 그리고 껌딱지로부터, 2019, 자작나무 합판에 유화, 70x120cm



배종헌, 절골입구N1-01_콘크리트 균열과 생채기, 얼룩, 그리고 껌딱지로부터, 2019, Mixed media on paper, 21x29.7cm



아르코미술관 1 전시실에서 열린 배종헌의 [미장제색 美匠霽色]은 모든 것이 바닥을 쳤을 때 접한 바닥으로부터 다시 시작된 기적 같은 풍경이다. 하늘은 자신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초월적으로 보여 주로 땅만 보고 다녔다는 작가가 땅바닥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거울 조각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보게 했다. 거울에 대한 심리학을 쓴 저자들은 직접 본 것보다 반영 상이 주는 충격에 대해 논하곤 했다. 땅에 떨어진 작은 거울이 반영한 또 다른 세계, 그 힘을 간파하여 변주한 것들이 작품화 되었다. 그것들은 누추한 현실 속에서 발견한 천상의 풍경이다. 천상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들린다면 그냥 별세계라고 하자. 붓이 아니라 날카로운 도구로 긁은 형태들은  더러운 표면의 먼지를 걷어내면서 드러난 진풍경이다. 반지하의 허름한 작업실이나 터널 속에 겹겹이 쌓인 오물들은 약간의 첨삭을 거쳐서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 제친다. 


작가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은 삶을 방해하는 비루한 현실을 탓하지 않고, 그 속의 작은 틈과 균열로부터 시작하고 그 틈을 점점 벌려서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도 그곳을 통과할 수 있게끔 만든다. 틈은 문이 되고, 최초의 흔적은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라난다. 지금도 지나고 있는 중인지 모르지만, 작가적 삶은 끝없는 터널이다. 한 방향이며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 하는 그 폭력적인 길에서 빨리 통과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천천히 자신이 던져진 상황을 주시했을 때, 언뜻 보인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증폭시킨 것이다. 작업이란 자기만 본 것을 보편화시키는 지난한 과정으로 결코 생략되거나 간과될 수 없다. [절골입구N1-01_콘크리트 균열과 생채기, 얼룩, 그리고 껌딱지로부터]라는 제목은 자작나무 합판에 그려진 유화, 또한 종이 위에 혼합매체로 그려진 것들의 출처를 알려준다. 


신비로운 풍경들이지만, 작가는 발견의 궤적을 숨기지 않고 영상이나 텍스트를 통해 암시한다. 우연히 발견한 대상을 그럴싸한 풍경으로 만드는데 집중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한 줌의 이야기 꺼리’로 귀결되곤 하는 이전의 개념적 작업에 대한 극도의 허무감을 느낏 탓이라고 밝힌다. 주체로부터 발설된 의미로의 환원이 아니라, 의미의 저장소가 되는 존재의 제시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두툼한 작업 집서도 몇 권 보유하고 있는 작가의 말이라 엄살로 들리지 않는다. ‘어느 반지하 생활자의 산수유람’(작가)은 시멘트질을 하는 미장이로부터 천재 화가에 이르는 수많은 계열에서 뽑은 가닥들로 다시 구축한 세계이다. 그는 오점으로 얼룩진 콘크리트 문명의 틈에서 자연을 (재)발견한다. 그에게는 재발견된 자연이 바로 예술이다.





허구영 전시전경


허구영 전시전경


허구영,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전부이자 동시에 해체되어야할 그 무엇이다 드로잉, 2019, 강철관에 용접 레터링 후 절단, 가변크기



허구영, 두 조각_파랑,노랑,빨강으로부터,2019,면천에드로잉과아크릴,스프레이페인트,65x53cm



아르코미술관 2 전시실 열린 허구영의 [여전히 나에게 뜨거운 이미지 중 하나]는 미술사적으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대작들과 대화해 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온 작가의 궤적이 드러나 있다. 엇비슷한 두 개를 나란히 놓고 관객에게 틀린 점을 묻는 장난스러운 작품에 드러나 있듯이, 대화는 차이를 둔 반복의 행위이다. 가령 작품 [두 조각-나는 미술을 통해서 미술을 벗어나고 싶다]에서, 관객은 첫 번째 등장하는 미술과 두 번째 등장하는 미술의 차이를 생각할 것을 요구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술에 대한 수많은 거부가 있었지만, 미술은 어떠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뒷문으로 다시 들어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끝없는 배반 속에서 ‘미술을 통해 미술을 거부한다’는 역설 어법의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처럼 예술 또한 무지(無知)만이 유의미한 진도 또는 전도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원본을 대놓고 베껴도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미술사가 이미 정리해 버려서 그렇지, 개체발생적으로 발견한 것들도 많을 것이다. 학습에 의한 재현과도 다른, 개별적인 발견은 차이에 대한 감식안을 키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와 문예사가들은 오독의 생산성에 대해서도 주장한다. 허구영이 실행하는 미술사에 등재된 작품들과의 대화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은 발견을 침소봉대하는 독백적 사유와 다른 노선을 걷는다. ‘--에 대한 오마주’가 있는 그의 작품은 한 번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대화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계속 변화한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업실에는 그동안의 대화에 사용되었던 사물과 예술로 가득하다고 한다. 현재에도 진행 중인 대화를 위한 자료이자 작품들의 보존은 준회고전적인 이 전시를 준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했다. 


상호 참조적이며 자기 참조적인 그의 작업은 이러한 자신만의 사전을 통해 매번 다르게 배치된다. 그에게는 새로운 배치가 새로운 내용이다. 허구영은 그러한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자신을 작품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개념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 모든 것들을 깔대기처럼 통과시키는 수렴지점이 되는 것이다. 명료했던 지각 또한 시간이라는 변수를 통과한다. 영원회귀나 순환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필연적인 것만이 되돌아온다(반복된다). 강철관에 용접으로 레터링을 한 후 절단한 작품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전부이자 동시에 해체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에 나타나 있듯이, 반복은 수많은 보물, 또는 폐기물 중에서 보다 결정적인 것을 발견, 또는 말하려는 작가의 영원한 의지일 것이다. 

  

 출전; 2019 아르코 미술관 중진작가 기획 초대전, 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