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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ODYSSEY-The Pencilism :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이선영

sosoart 2020. 9. 17. 22:59

http://www.daljin.com/column/17983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이선영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4명의 중견 작가가 참여한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전은 각 작가의 드로잉을 오디세이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작가 별로 다른 역에 도착한 것 같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던 길 멈추고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밀도감이 공통적이다. 인생과도 비교될 수 있는 선의 여행과 함께하는 동반자는 연필 한 자루다. 유목민의 지혜가 알려주듯, 떠나는 자의 짐 꾸러미는 가벼워야 한다. 삶의 편리를 보장해 준다고 믿어지는 점점 늘어나는 짐 꾸러미 때문에 떠나기 힘든 시대는 여행을 원점으로 회귀할 따름인 아늑하고 안전한 소비 품목으로 변화시켰다. 예술은 제자리에서도 가능한 여행이다. 가상현실 기술도 그와 유사한 체험의 제공을 약속하지만, 게임 참여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손가락이 아닌 손의 감각’(들뢰즈)을 되살리기 위해 스크린에 직접 쓸 수 있는 플라스틱 펜도 있지만, 그 둔탁한 감도는 펜슬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선과 함께 떠나는 또 다른 시공의 여행에는 다양한 서사가 깔려 있다. 자크 아탈리의 미로나 유목에 대한 단상에 나오듯, 미로를 유목하는 사람은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온다. 이 전시에서 서사의 범위는 소소한 일상의 단상부터 장대한 우주적 풍경에 이른다. 그들의 주재료인 펜슬은 ‘The Pencilism’이라는 낯선 용어로 묶여졌는데, 그것은 소박한 필기구라고도 할 수 있는 매체에 기념비적 위상을 부여한다. 연필 한 자루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선은 마치 인생처럼 나아간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여기까지 어찌 왔나 싶을 예술가의 길이 쭉 뻗은 고속도로는 아니다. 매끄러운 표면을 활주하는 선이 있는가 하면 살을 파고드는 듯한 선도 있다. 모든 것이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에 시간 낭비인 방황은 금기시 된다. 하지만 목적지가 각기 다른 이들에게 시점과 종점 간의 최단 거리는 허구적이다. 모두를 위한 속도는 정체를 낳는다. 

 


김범중, 각20x100cm

 

모두가 다 같이 바라는,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은 속도를 위한 속도에 치이는 삶을 낳았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인은 이제 타자에 대한 경계를 극도로 강화해야 하는 진정한 재난과 마주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매우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이제 미술은 대규모 관중을 모으는 시각적 흥행물이 아니라, 찬찬히 자기 길을 걸어왔던 작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작품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전시에서 선의 여행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주름의 배치, 그리고 그 안팎에 퍼진 입자들의 분포는 현대의 전형적인 시각 이미지와 다르다. 현대의 스펙터클은 타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격적으로 거대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자본과 노동의 산물로서의 스펙터클은 이윤과 연관된 관심끌기가 중요하다. 점점 무뎌가는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강도도 커진다. 주의 깊지 않은 시선으로도 단번에 파악되는 얄팍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 전시의 작가들은 밀도로 승부한다. 

 

그 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종이와 펜슬은 현대적 가치를 반성하는 근본적 과제수행에 적합해 보인다. 연필 드로잉만으로 꾸려진 이 전시는 기본과 실험을 연결시킨다. 연필 또는 샤프펜슬은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그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이 있는, 즉 누구나 인생 초반기에 손에 잡아봤던 것이다. 매체가 소박하다고 결과물까지 소박하지는 않다. 생산수단의 감축은 포괄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의 미니멀리즘인 셈이다. 오랜 연마에 의해서 손의 연장처럼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필력은 감춰진 에너지나 무의식의 발현(김범중, 표영실)부터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모델(문기전, 박미현)까지 이른다. 각 작품들은 아득한 시공에서 발생한 파동의 리드미컬한 반향(김범중)부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한 형식(박미현) 까지, 경계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삶의 게임(표영실) 부터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적 도해(문기전) 까지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나무와 식물성 잔해로 이루어진 연필은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진 종이를 부른다. 나무라는 원재료가 그렇듯이 가지처럼 끝없이 갈라지는 길에서의 선택이다. 그 선택들의 쌓임은 매체와 형식에도 내재한다. 내용과 형식이 보다 긴밀해질수록 작은 변화의 파장도 크다. 드로잉, 특히 펜슬 드로잉은 모국어 같은 위상을 가진다. 모국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지를 많이 사용하고, 필기구가 모노톤이다 보니 동양화 같은 분위기도 있다는 점 외에는 말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에게 펜슬 드로잉은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까마득하게 잊었지만, 상용어나 산문을 넘어서 꿈도 시도 가능하게 하는 몸/무의식과 일체화된다. 그것은 모국어의 습득처럼 타자의 소리로부터 와서 스며들 듯이 체화된 것이다. 연필은 아이가 사회 속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처음 손에 쥐었던 도구였다. 삐뚤빼뚤 글쓰기와 그리기는 잊혀져 있지만 문명권의 구성원들에게는 공통된 체험이다. 

 


 박미현 보드지에 샤프펜슬 40X50cm 2014

 

이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질로 대체된 잊혀진 감각이다. 미술가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에서 대상의 윤곽선과 그림자(음영)를 위해 죽죽 긋는 무심한 사선의 감각으로, 완성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밑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도 뭔가 자신과 관련된 소중한 것을 쓰기 위해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작가에게 펜슬은 이제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고양된다. 무엇인가 쓰기 위해 시작했지만, 점차 쓰기 그 자체를 위해 쓰게 되고, 결국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쓸 수 있다.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누보로망의 작가들의 주장처럼, 내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알기 위해 쓰게 된다. 의미는 처음이 아니라 나중에야 온다. 심지어는 대상도 그렇다. 펜슬로 그리기는 잠재적인 쓰기이다. 쓰기/그리기는 모두가 다소간은 맹목적인 시작, 그리고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몰입이 요구된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유에서 무의 창조라기보다는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에서 계산과 전략은 결정적이지 않다. 

 

작업, 특히 드로잉은 머리 뿐 아니라 몸과 손을 통과해야 하는 원초적이고도 치열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드로잉은 단독으로 서 있을 수 없다. 예술작품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족성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한 듯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지만, 지우개로 지워진 것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작에 마지막이, 마지막에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정한 게임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의 유희는 무한하다. 거듭해서 떠남은 예술의 조건이다. 완성된 작품이 하나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다. 선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또한 포함하는, 샛길과 우회로 가득한 미로 속에서 나아감은 역행이나 회귀이다. 우주같이 막막한 시공간에도 웜홀이나 블랙홀, 화이트홀 같이 도약과 비약, 가속과 감속을 허용하는 특별한 길이 있다.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은 모두에게 강제함으로서 권력의 효과를 생산하는 하나의 길에 대한 탈주로를 만든다. 자기 방식대로 가기와 탈주(누군가에게는 탈선)를 연결시킴으로서 다른 길도 있음을 제시한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예술가를 포함한 모두에게 강요되는 폐쇄회로를 빠져나가는 일이다. 효과적인 권력의 작동에서 하나의 지배적 언어를 강요하는 것은 필수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보편적인 문법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럽고 분란과 전쟁까지도 낳는 보편적 문법은 지배적 권력 지형도의 산물이다. 뻔한 것이 보편으로 행세하는 시대, 이해하기 힘든 세상보다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더 괴로울 정도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보편의 존재는 이질적인 지층간의 우연적 관계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표상의 세계는 사회의 세력 관계에 의해 항상 위조되어 있다. 

 


문기전, Quantum - 판화지 위에 연필 - 100x100cm - 2019

 

[기계적 무의식]은 한 어린이가 자신의 언어를 배울 때, 혹은 그 어린이가 자신의 말 행위를 결정하는 특정한 코드를 배울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이 끼어 들어간 사회구조의 요구들을 배운다’(베른슈타인)고 인용한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개인에게는 법칙에 대한 완전 복종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 식으로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꿈꾸는 것까지 따라오게 한다. 그러나 사랑처럼 언어도 독점을 요구한다. 몇 가지 언어를 통달해도 어느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수 십 년 전 떠난 고향이 그립다고 눈물 지으면서도 정작 한국어는 잊어버린 교포들을 종종 본다. 선제하는 상징의 산물인 주체는 자유롭지 않다. [기계적 무의식]은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주체는 근대의 이상인 자율과 자유의 인간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 체계적인 격리차별, 전면화 된 수용소’(가타리) 등을 낳았다. 

 

자유를 원하는 예술가는 그 누구라도 구조의 우연한 결정체에 불과한 주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이질성(몸, 무의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이와 펜슬은 해부대와 칼을 연상시키는 분석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념무상의 수행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작업은 (재)발견의 장이기도 하며,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가 하면 우주적 질서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를 비추고 공명한다. 종이와 펜슬은 그림에 한정되기 보다는 그림을 포함한 언어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던 시기의 매체로 주목된다. 인간이 되기 위해 걸음마 훈련이 있다면, 손에도 그에 상응하는 단계가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혁명적 정신분석학이 지배적 구조로의 환원보다는 탈피와 변형을 강조하듯이, 현대 예술 또한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험적 장으로 삼아왔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든 말든 간에, 언어의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 선택된 종이와 펜슬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매체는 자연스러운 어법에 적합하다. 방금 꾼 꿈을 바로 적어 넣을 수 있는 순발력 있고 융통성 있으며, 언제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이 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계속적인 실행을 통해 점차 분명해질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품 속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펜슬의 궤적은 몸에서 실을 빼내는 누에나 거미 같은 자연스러움 마저 보인다. 물론 예술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의식화된 자연이며, 더 적절한 비유로는 언어이다. 가장 이상적인 언어는 모국어이다. 모국어가 우연찮게 세계 보편 언어가 된 국가의 국민은 근대를 선점한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했다. 종이와 연필은 한국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국어와의 비교는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혁명적 정신분석학자는 ‘모국어라는 한 지역 내에서 형성된 언어의 통일성조차 항상 어떤 권력구성체와 분리할 수 없다’(펠릭스 가타리)고 본다. 

 


표영실, 경계의 사람들 2020 pencil  on paper 28x35cm

 

면접을 보기 위해 사투리를 교정하거나 한국어에 대한 제 3세계에서의 학습 열기를 생각해 보라. 한국에서 영어 학습 열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결국 힘의 논리는 무엇이 지배적인 언어인가에 대한 인정의 체계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재현된다. 보편성의 탈을 쓴 지배적 언어의 위력을 알고 있는 다국적 기업은 기술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애쓴다.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 권력은 끊임없이 세세하게 각 기표적 관계를 재검토 한다’고 하면서, 표상과 권력의 관계를 강조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어디엔가 우연히 태어나는 개인에게 시간과 자원의 가능성은 무한하지 않다. 선택과 집중에는 정치경제학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기계까지 더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연필보다는 전자기기에 먼저 친숙해지지만, 연필과 종이가 그때그때 업그레이드 시켜줘야 하는 기기/상품과 다른 점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과의 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연필을 쥔 작가의 모습에는 경전을 필사하는 수도승처럼 절대적 타자와의 고독한 대화가 있을 뿐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선호하는 연필은 내향적인 매체이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주장하듯, 읽고 쓰기에 의해 자의식을 형성했던 내향적인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읽고 쓰기보다 정보검색과 소통이 중시되는 시대에 내향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받는 외향성의 내용을 내향성이 만들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필사 및 인쇄문화의 시대에 내향성은 논리정연한 지식인을 낳기도 했지만, 점차 희귀해지고 금기시 된다. 금기 위반의 충동을 강조했던 바타유라면 내밀성이라고 표현했을 이질적 지향은 누군가는 범죄로, 누군가는 예술로 부를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선명하다. 보다 지배적 언어는 고속도로 같은 비유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각자의 언어와 문법으로 말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작가에게는 최대한 이물감 없는 매체가 필수적이다. 자기의 언어로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요구되는—체계는 쓸데없는 진입장벽을 높이 세우곤 한다--훈련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대학에 가기/다니기 위해 배운 것을 애써 잊어야만 하는 씁쓸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끼어드는 것(기구, 제도 등)이 많을수록 본질은 희미해진다. 현대의 관료주의는 본질을 잊고 형식을 본질화 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분업이 촉구하는 분과과학은 형식주의로 흐른다. 언어를 과학의 단계까지 정련했다는 현대철학의 한 사조는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부당한 배제는 본질을 문제 삼는 예술을 유령화 한다. 그러나 유령은 편재한다. 체계를 지시할 뿐인 체계의 공허함과 가혹함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인 어떤 소박하거나 야심찬 활동을 꿈꾸는데, 이때 예술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재발견될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종이와 펜슬은 여러 미술도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각 작품들은 펜슬이 본질의 탐구에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객과의 거리도 단축시켜준다. 관객도 종이와 펜슬이 주는 감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범중 ; 일파만파(一波萬波)하는 내재적 리듬

 

 

김범중, Phrase01-04,각10x50cm

 

 

얇은 띠 형태가 길쭉한 화면에 담겨 다양한 파동으로 굽이치는 작품 [Phrase01-04]는 따로 또 같이 작동한다. 파동은 입체감 있는 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표면과 이면이 수시로 바뀌는 민감한 표면은 마치 대지 깊숙한 곳에서 발생한 요동을 파동으로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자신이 속한 환경을 민감하게 반영할 것이다. 현악기 같은 비율을 가진 화면은 악기의 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구음을 연상시킨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배열된 화면은 그자체가 분절화 된다. 그것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설치방식으로 확장 될 수 있다. 그러나 화면 안의 형태는 어느 지점에서 잘려도 자연스러운 나풀거림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이 유연하다. 다섯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또 다른 작품 군은 각기 진행 중인 상태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것 같은 확장성을 가진다. 단편으로 전체를 암시하는 방식이다. 동심원으로 파가 퍼져 나가는 형태 좌우로 두께와 명암이 다른 기둥 모양으로 배열된다. 거기에는 악기를 모델로 한 작품 특유의 시각적 울림, 즉 공(共)감각이 있다. 마치 지문처럼 섬세하게 새겨진 선들은 마주치는 면에 짙은 협곡을 만든다. 

 

소리/형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협곡은 또 다른 선을 이룬다. 그것은 점과 점이 만나는 기하학적 선의 정의를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넷 또는 다섯이 시리즈처럼 제시되어 있지만, n개의 패널로 증식될 수 있다. 그림처럼 나란히 거는 것은 여러 배치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무한한 시간의 축을 따라 다르게 접혀지고 펼쳐지는 주름은 실재의 다양성에 대한 은유이다. 같은 모양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선의 간격과 배치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그것이 음악이라면 차이의 세계에 대한 찬미가가 될 것이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모든 텍스트에 내재한 차연의 세계 또한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같은 리듬과 박자를 강요하곤 한다. 그래야 생산/소비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에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섬세함은 묻혀 버리기 일쑤이다. 동일성의 논리로부터 탈주하려는 현대철학자들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들뢰즈와 가타리)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물리학자들 또한 변화의 순간에서 원자 운동에 내재한 작은 변이 또는 요동을 강조한다. 

 

펜슬로만 이루어진 형태는 분자들의 배열 상태만 달리 함으로서 존재들 사이의 변환을 보여준다. 선의 밀도와 강도, 방향의 차이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과 비교될 수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고체 액체 기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우주의 창조성으로 보면서, 이러한 현상을 사회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필립 볼에 의하면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필립 볼)는 우주에 편재하는 질서의 표현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전이의 질서는 형태와 소리로 번역된다. 일찍이 고대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파동)와 음의 연결로 천체의 조화를 말했다. 근대과학은 고대의 질적 우주를 수량화했지만, 정교한 시계와 비교된 근대적 우주에서 소리는 여전히 우주적 조화에 대한 상상 속에 울려 퍼진다.

  

 

문기전 ; 인식의 불확정성, 또는 자유

 

 

문기전, Q-piece 40 - 판화지위에 연필 - 20x63cm - 2019

 

문기전은 ‘최소 에너지 단위이자, 저장 공간으로 형상화시킨 Quantum 이미지’를 비롯해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며, 기억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나에겐 왜 이렇게 보여 지고, 생각 되는가’와 관련된 가설적 구조는 사각형 안의 사각형, 원, 먼지처럼 흩어지거나 뭉치는 입자 등으로 나타나며, 때로 눈 코 입 같은 해부학적 기관의 일부들과 연결망을 이룬다.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중시하는 문기전의 작품에서 작품과 작품 간의 배치 또한 중요하다.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는 것들은 시리즈처럼 보이고 때로 다른 종류와 조합되어 작동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일련의 단위 구조가 되어 조합되면서 세상이 인지되고 의미화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판화지 위에 펜슬로 그려진 형태들은 분석적이며, 과학적 도해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은 해부학도 생리학도 로봇의 설계도면도 아니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이해방식과 관련된 일종의 은유적 다이어그램이다. 빛의 잔상 시리즈는 명암과 비율의 차이로 계열화된 직사각형들을 보여준다. 

 

사각형 안의 사각형이 기본 형식인데, 흑연의 입자가 퍼져 나가는 식이므로 경계선을 정확하게 확정지을 수 없다. 가운데가 어두운 경우와 바깥이 어두운 경우로 나뉜다. 시각적 관습 상 가운데는 형태, 바깥은 배경으로 간주된다. 중심의 짙은 사각형이 커지면 밝은 배경은 줄어들고, 중심의 밝은 사각형이 줄어들면 어두운 배경의 비중은 커진다. 명/암, 중심/주변 등 구별되는 항은 연동된다. 사각 구조와 달리 먼지 형태의 분포로 빛의 잔상을 표현한기도 한다. 하얀 종이 배경 안에 점이 번져 만들어진 얼룩들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먼지입자가 뭉쳐지거나 흩어져서 별이 생성 소멸되는 우주의 풍경부터 거듭하여 확대된 미시세계의 흐릿한 모습까지 다양한 형태가 연상된다. 원이나 사각형처럼 비교적 분명한 도상 또한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는 선이 아니라 입자로 되어 있기에 불확정적이다. 불확정적이라고 해서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도 아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불(不)-’로 시작되는 불완전성(괴델), 불확정성(하이젠베르크) 등의 개념은 엄밀한 인과론 보다는 확률과 통계에 의지한다.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을 미술과 비유하자면 반(反) 형식주의에 가깝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는 사고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결정론보다는 확률론이 좀 더 위로를 주고, 전통/근대를 넘어선 현대와도 조응한다. 단독으로도 다른 작품들과의 조합으로도 나타나는 작품 [Quantum]은 100x100cm 크기의 정방형의 판화지 위에 원이라는 응집력 있는 형태가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경계는 흐릿한데, 여기에서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전이의 지대로 오차와 우연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작품 [청각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은 귀라는 감각기관과 연결된 망으로, 최종적으로 검은 [Quantum]과 연결 된다 시각, 후각, 미각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의미 또는 해석으로 전환될 자극의 주요 통로들은 [오감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으로 배치된다. 그의 작품에서 펜슬은 분석과 종합의 과정의 표현에 딱 맞는 듯하다. 

 

 

박미현;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이상적 관념

 

박미현 보드지에 샤프펜슬 40X50cm 2014

 

보드지에 샤프펜슬로 그린 같은 크기의 작품들은 그 정교함에 있어 펜슬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러한 경지가 가능할지 싶다. 흑백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너무 엄격하고 세밀해서 기하학적 도형이나 도면같은 면모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보기 위한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번에 그어진 선 또는 수없이 그어진 흑연에 의한 반사면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지만, 그것들이 풍경처럼도 보인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원을 이어주는 수평의 선과 사선에 중력감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하얀 원두 개는 일월도(日月圖)처럼 안정감 있게 이 우주를 비춰준다. 그런 비유라면 허공의 도형 또한 중력과 무관치 않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와 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양 말단에 같은 모양의 도형이 있는 세 개의 밝은 기둥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시작도 끝도 같은, 변치 않는 규칙적 여정을 연상시킨다. 

 

한 화면 내에서, 또는 다른 작품들과의 관련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박미현의 작품에는 흑백 반전의 관계가 자주 나타난다. 흑/백, 네거티브/포지티브 스페이스, 상하좌우, 수직과 수평선은 기하학이 토지 측량술에서 나왔듯이, 풍경이나 중력감이 배어 있다. 검은 바탕에 하얀 창문이 연상되는 도형이 있는 작품에서, 통로가 만나는 지점에 배치된 원들은 정지 가운데 움직임이 잠재한다. 흑백 반전 버전의 작품에서 반사광 때문에 제자리에서 팽글팽글 도는 느낌을 주는 교차 면의 원들은 사각형의 각도를 유연하게 해줄 것이다. 대칭적 형태는 만다라처럼 평안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다소간 디자인적 요소가 있는 박미현의 작품들은 아름다움이 기능의 먼 흔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기능주의 미학을 낳기도 했지만, 기능은 모더니즘이 선전한 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상에 단단히 서있기 위한 공학적 방법은 그 합리성에 있어서 예술이 담아낼 수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틀과 표면의 물리적 관계를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서 그림의 형식적 조건을 실험하려던 유파는 미술사의 한 장을 이룬다. 박미현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보다 정신적 연원을 가진다. 작가는 플라톤이 ‘우주의 생성을 요소론으로 설명하려 한 내용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다’고 밝힌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에 의하면, 플라톤에게 물리학은 기하학이 된다. 플라톤은 원소들이 특정한 공간적 구조들을 지닌다고 여겼다. 가령 플라톤은 정이십면체의 공간적 구조를 물에게 부여했고, 정팔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공기에게, 정사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불에게, 정육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흙에게 주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흙은 정육면체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네 원소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밑면들을 지닌다.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관념을 상징한다. 이데아가 실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이데아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의성에 좌우되지 않는 어떤 든든한 근원에 대한 욕망은 과학자 뿐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준다. 

  

 

표영실;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표영실, 상실의 무게 2019 pencil on paper 38x28cm

 

‘잠깐 내려앉은 온기에 살갗이 한 겹 녹아내린다’같은 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표영실의 작품에서 언어적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전시와 함께 발표되곤 하는 단상들이 위의 전시 부제처럼 문장으로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반복되는 마찰로 생긴 주름’,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접힌 채 기울어지고,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바퀴벌레 등짝 같은 얼굴들’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한 미완성의 문장, 또는 단상에는 시각적 상상력이 풍부해서 작품 제목으로 붙인다면 이미지와 단어의 밀착도는 매우 높을 것이다. 물론 ‘부드러운 바람에 상처가 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 넘기는, 슬픔’같이 추상적인 차원도 있다. 단어 또는 문장의 긴 목록을 훑어보자면, 표영실은 평소에 그리기만큼이나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말과 사물의 관계가 그렇듯,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말로 충분하다면 열심히 그릴수록 (예술적 난관까지는 아니더라도)삶의 난관에 부딪히는 화가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림으로 충분하다면 작품을 깍아 먹을 수도 있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말보다 더 완벽하고 충만하다는 믿음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펜슬이라는 매체는 상보성을 가지는 말과 이미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언어는 선형적이다. 단어들이 한 줄로 배열되기 때문에 아무리 함축적이어도 이미지에 비해서 단정적이다. 가령 ‘얼굴에 붙은 가면’이라는 단상은 정말 가면처럼 보일정도로 단순하고 얇은 표영실의 인물상을 설명해 해준다. 얼굴 방향과 눈구멍 방향이 다른 가면을 쓴 듯한 얼굴도 보인다. ‘뜨고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또는 눈동자 없이 퀭한 눈구멍은 가면과 얼굴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의 소외된 어떤 상태를 보여준다. 본질/가상의 이분법이 무화되면, 얼굴은 없고 가면들만 남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할만한 가짜들의 세상이다. 지우개로 쉽게 지워지는 펜슬은 이러한 가변적 존재들과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어떤 형태를 확정짓는 경향이 있다.

 

외곽선을 모호하게 하는 흑연 입자의 흩어짐이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누런 액체의 표현 등은 인물/인체의 표현에 강렬한 감정을 싣는다. 인체 모양이 액체로 변하는 작품 [상실의 무게]를 비롯하여 사지가 다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은 손목에 체액이 흐르는 작품 등이 그렇다. 감정은 대개 넘치거나 터져 나온다. ‘아무렇게나 뭉개진 물렁물렁한’, ‘찐득하고 더러운 눈물’은 주체도 대상도 아닌 경계위의 것이다. 이 분류 불가능한 것은 인류학, 심리학, 문학 등에서 ‘비천’(abject)하다고 명명된다. 작품들의 면면은 상처, 우울, 공허, 고독, 자학,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이다. 작가의 실제 성격이 그렇다기 보다는, 펜슬을 쥐었을 때의 자의식과 관련될 것이다. 외향적이고 밝은 성격이라도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써 있는 문장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호한 감정/상태마저도 깔끔하게 마무리한 작품들은 작업이 작가에게 미쳤을 긍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완벽하게 표현된 것, 즉 조리 있게 정리된 것은 사태의 잠정적 해결을 예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