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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재 통신 33- 남도기행 Prolog

sosoart 2007. 3. 26. 07:28


대관령목장에서의 풍경들입니다.

남도로 여행할 때의 사진자료가 다 날라가 버려서 동해안 대관령 부근의 사진을 붙여 봅니다.

  

 

넓은 초원이 가슴을 시원하게 하여 줍니다.  목장이라고는 하지만 목장의 소는 거의 없고 관람객의 입

장수입으로 재미를 보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입장객을 배려하는 서비스가 있으

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늘엔 뭉개구름, 탁 트여진 시야가 답답한 일상을 잊게 해줍니다.

 

 

일기가 변화무쌍하여 갑자기 광풍도 일고 구름이 밀려왔다간 흔적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동락재 통신 33- 남도기행 Prolog>     2003. 8. 4  

 

아래의 흰 박스 안의 글은 재편집 과정에서 남도기행의 "Prolog"와  "남도기행-완도"편이 누락되어 여행 순서에 따라 앞으로 끼워놓았습니다.

 

2003. 8. 2

 

이번 여름은 조금은 특별한 여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퇴나 정년퇴직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부 혹은 가족들과 아주 특별히 국내일주라든지 혹은 해외여행을 장기간에 걸쳐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이렇다하게 혼자서나, 가족들과 같이 단 며칠의 여행도 하지 못했고 곧바로 명퇴후의 생존(?)을 위한 입에 풀칠(?)을 하는 작업의 근간이 되는 일을 집사람과 같이 시작하는 관계로 숨쉴 틈 없이 직장 일이 아닌, 나의 일의 걸음마를 위해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3년여를 지내왔었습니다.

 

.... 해서, 올해에는 목공예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입학을 했고, 또 학생이기에 당연히 여름방학을 또 다시 가질 기회를 잡았기에, 이번 여름은 좀 더 특별한 여름이기 위해, 南道로의 낚시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20여년 전, 다니던 직장의 신참후배의 집이 전라남도 순천이었는데, 제가 낚시를 아주 좋아하는 것을 알고 - 34일의 연휴기간을 이용하여 순천 근처의 죽림지 라는 저수지로 出釣를 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신입직원이 안내를 자청하여, 그 친구의 집도 가고 낚시도 할 겸 직원 7-8명과 함께 여행 겸 낚시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신입직원은 지금은 모대학교에서 훈장으로 봉직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그즈음의 순천, 여수 등 남도 지방의 가을 풍경과 남도의 식당에서의 아주 후하고 걸쭉한 인심에 마음 흡족함을 느낀 적이 있었지요.

 

물론, 그때는 입맛이 그쪽의 그것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맛이 매우 짜고, 젓깔을 많이 넣어서 비린맛과 냄새가 역겨워 반찬은 많이 나왔지만 별로 먹은 것은 없는, 그러나, 손님으로서 정말 커다란 대형 교자상 2개의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아주 특별한 그런 식사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우리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물론 그 지방의 풍광과 인심을 보고, 겪고, 느끼고 하는 것도 여행의 한 과정이며, 즐거움이었지만 고역인 것은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하루 세 번씩 접해야 한다는 것이 아주 큰 일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저는 낚시를 아주 좋아해서 전국 어디인들 안 가 본 곳이 없다고도 할 수 있어서, 전국의 음식 맛이랄까? 음식 솜씨랄까? 이런 것의 판단에는 남 보다는 좀 더 일찍이 시작하고 많이 체험한 관계로 어느 정도 나름대로 입맛도 많이 적응이 되었고, 평가의 기준을 갖고 있다고 생각이 되기에 가급적이면 하루를 묵어야 할만한 시간적, 거리에 있는 지방엘 나들이 하면, 음식 맛이 좋은 곳으로 여행의 코스 자체를 정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주 사사로운 판단으로는, 물론 저의 고향이 서울이고, 6.25때 충북 청주로 피난을 가서 거기에서 국민학교 3학년까지 몇 년 간을 지내왔기에 입맛은 아주 중간적이고 표준적이라 자부를 하기에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입맛은 아주 친근하고, 예외적으로 전라도 전주의 음식 맛은 아주 수준급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물론 요사이, 더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전라도 특히 남도의 음식 맛이 좋다는 집중적인 홍보랄까? 뭐 그런 것 때문이라도 남도음식의 맛이 전국화, 대중화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생각을 합니다.

 

, 남도음식에 관한 책도 나오고 입맛 만을 찾아 남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않은, 옛날보다는 많이 변화된 그런 이즈음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런 말씀으로 쓸데 없이 서두를 지루하게 어지럽히나 하면, 이번 며칠동안의 여행에서 경상도 남해 쪽, 하동에서 저의 낚시친구가 "재첩국" 정식 이라는 밥을 먹고나서는 다시는 경상도 쪽으로 여행을 오지 않겠다 해서, 저의 스케줄대로 라면 남도 여행을 거쳐 동해안의 7번 국도를 따라 경상도에서 강원도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해안 일주코스를 머리속에 그리고, 하동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잔 후 경주, 포항, 청송, 봉화, 삼척, 동해, 강릉, 속초, 인제, 홍천 등을 거쳐 서울로 여행의 종지부를 찍으려 했지만, 음식맛에 보기보다 민감한 낚시친구를 위해 다시금 왔던 여정을 거꾸로 거슬러 돌아가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에 밤 12시가 넘어서 도착하였습니다.

 

낚시친구의 입맛이 까탈스럽다기 보다는 그 지방의 음식 맛이 없었다는 것이어서(그 지방분들께는 좀 미안한 마음이지만....), 기왕의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행이라면, 식도락을 겸한 그런 여행이기를 바라는 낚시친구의 마음을 헤아려, 국토의 변두리 일주를 포기하고 전라도 내에서만 움직이다가 회향을 하기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처음부터 어떠한 짜임새 있는 여행계획을 세워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저 운전대가 돌아가는 방향대로 가다가 쉬고 싶으면 어디에서든지 쉬고, 먹고, 자고, 민물낚시도 하고, 또 바다가 있으면 바다낚시도 하고자 했던 터라, 그야말로 마음가는 대로 가는 여행이기에 두 사람의 마음만 일치된다면 아무런 여행에 관해 다툼의 원천이 없는 그런 내 멋대로의 여행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낚시친구가 낚시와 등산을 뒤늦게 시작을 했고, 젊었을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저와는 달리, 이제야 여행의 묘미를 깨달은 터이기에, 이번의 여행은 그 낚시친구를 위한 헌정(?)이라고 할 수가 있어, 그가 가보고 싶은 곳으로만 운전을 하고, 안내하는 여행 도우미 역할을 주로 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던, 저의 생활의 과제가 산적해 있고 잘 풀어지지 않는 답답한 그런 마음 중에서의 여행이었지만, 여행의 과정을 즐기기로 또, 낚시친구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홍천의 동락재에서 낚시도구를 차에 싣고 721일 월요일 아침 7시에 서울의 낚시친구 집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오직 여행의 여정에서 느끼는 감상만을 느끼기로 했습니다.

 

법구경의 이런 구절을 언뜻 머리에 되새기며 서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捨前捨後 捨間越有 一切盡捨 不受生死

 

과거도 버려라, 미래도 버려라

현재의 이 내 몸은 생각도 마라

마음에 걸리는 모든 것을 버리면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나니.......

 

마음의 짐을, 인생에 있어서 버려야 할 모든 업의 근원이 되는 허울뿐인 나의 가짐을 버리는 여행을 위해 남도로 남도로 차의 핸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의 여정과 생각과 느낌을 기록해 놓지 않아, 빨리 기억을 옮기지 않으면 치매성 기억력빈곤 신드롬?”으로 머릿 속에서 다 날라 갈까봐 이렇게 서둘러 적어보니, 횡설수설 두서없이 낙서에 지나지 않는 것 같군요.

 

시간이 나는 대로 계속하려 합니다.

 

어제 오후에 서울에서 홍천으로 오는 국도는 휴가철 행락차량으로 도로를 꽉 매웠더군요. 평소보다 2배이상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아니면 무엇을 버리려고 저토록 서로 부비대고 밀쳐대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Re:Re:아니 올씨다>

글쓴이 : 동락재

조회 : 162 스크랩 : 0 날짜 : 2003.08.02 23:51

 

깜희님의 꼬리말은 몇 번 제 눈에 익혀진것 같습니다.

 

저의 몇마디 글자가 님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것 같아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깜희님도 이제 불혹의 나이에 입문한지가 적지않은 성상을 지낸것으로 여겨지는데, 아직도 팔팔하신? 성정이 남아있는듯 해서 부럽기도 하군요.

 

경상도 음식을 폄하하는것도 아니고, 전라도 음식이 모두 다 맛있다고 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은 님이 더 잘 파악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전주조 회원님들은 누구보다도 현명하신 분들이라 생각을 하니까요.

 

저의 이번 여행의 동반자 낚시친구는 나이로서는 저의 선배이시고 환갑을 넘긴 분입니다.

물론 그 분은 전국의 입맛에 대해서는 저의 십분지 일도 안되는 여행의 경력이 허기진 분이라고 본문에 썼다고 기억이 됩니다.

 

사람의 입맛은 각양각색이고 우리나라 남한의 4천몇백만 인구 제각각 다 다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각양각색 입맛의 민주주의의 극치를 이루는 자유의 천국아니겠습니까?

 

님도 역시 386세대이시라서 그런지, 흑백논리와 요즈음 뜻있는 인사들의 비아냥에 회자되는 "코드가 어쩌고 저쩌고"하는 편에 서계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즉 생각과 느낌이 전혀 다른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솔직히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우리가 산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이치가 아니고, 이제 겨우 남도기행의 서두인 본문의 첫번째도 아닌 Prolog에 느낌을 적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고깝게 생각을 하시니 감히 이 다음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 심히 걱정이 되어 남도기행을 기록해 나가는 저의 짧은 붓을 꺽어 버릴까?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누구라든지, 어느 지방이라든지를 비난한다거나 흉을 잡는다거나 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닌, 사람살면서 느낀 이야기를 실타래 풀듯, 물 흐르듯 그렇게 풀어나가면서 우리 전주조 가족들과 교감을 하자는 것이 전제가 된것 아니겠습니까?

 

고깝다거나, 세상이 자기를 속인다거나 상대방이 나를 얕본다거나 하는 그런 적대감을 갖지말고, 우리 전주조 식구끼리는 그저 이해하고 서로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살아갔으면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정리할 나이의 그런 즈음에 와 있는데, 무에 그리 욕심낼 것이 있다고, 누구를 비난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서로를 이해해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지요.

 

저의 낚시친구 역시 충남의 부여사람이지만 한없이 착하고 내가 가진 무엇이라도 주고픈 그러한 고운 사람입니다. , 경상도 음식이 맛없게 느껴졌다는 것은 그 사람 개인적인 입맛을 나에게 얘기한 것 뿐이지 공개적으로 흉을 본다거나 비위가 틀린다거나 한 얘기는 아니지요?

그저 이번 여행의 낚시 친구인 저에게 얘기한 것을, 제가 저의 기행에 한 양념으로 넣은것 뿐입니다.

 

님의 걱정, 저를 좋은 길로 밝은 빛으로 인도해 주시려는 마음뿐이라는 것으로 알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유대를 갖고 싶어 이렇게 꼬리를 달아 봅니다.

 

내일도, 오늘같이 좋은 날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동락재통신- 남도기행2:완도> 2003. 8. 3

 

비 내리는 서울에 도착하니 9시가 좀 못된 시간이었습니다.

 

공릉동에 살고 있는 낚시친구의 아파트 입구에서 낚시도구와 간단한 여행장구를 싣고 일단은 남도의 섬을 향해서 가기위해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습니다. 북부간선도로를 들어서서 성산대교쪽으로 향해 가는데, 월요일이어서 그런가 어찌나 차가 밀리는지........

 

그때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했습니다. 성산대교로 들어서야 하는데, 그만 잠깐사이 그쪽으로 진입을 못해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가기위한 길로 진입을 하고자 영등포, 김포, 목동 근처를 헤맨 그때까지의 시간이 무려 3시간 이상이 걸렸었습니다.

 

진입로도 없었고, 서울 사람조차 이정표를 보고 찾으려 해도 이렇게 어려우니, 초행길의 운전자는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방송이나 매스컴에서 도로표지판이 잘못되었다, 도로체제가 잘못되었다 해도 牛耳讀經이니.......

 

어쨌던 천신만고 끝에 고속도로에 들어섰으나, 이제 좀 휴우~ 하고 마음을 놓으니, 아침을 먹지않고 와서 벼란간 커다란 시장끼를 느꼈습니다.

서해대교 휴게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마 2시가 다 된 시간이었던것 같습니다. 피서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더군요.

 

이쪽 길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뚤리기 전엔 낚시길로 무척이나 많이 왔던 곳이기도 하지요.

아산만, 삽교호, 예산, 당진, 대호, 서산, 홍성, 태안, 안면도, 대천, 만리포 등....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기 전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었지요.

여행삼아 가는 길에 고속도로는 전혀 그 감흥과 재미가 없어서, 저는 주로 국도와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편인데, 아침에 서울에서 워낙 시간을 많이 빼앗겨 고속도로를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국도로 빠지기로 하였습니다.

 

대천에서 일단 국도로 빠져나와 시속 60키로 정도로 주변 풍광을 즐기며 남으로 가다가 군장 하구뚝, 부안을 거쳐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목포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나들이가 되어야 하는 길이, 맞은 편 도로에 카니발인가 하는 차에 불이 붙어 거의 전소가 되다시피 뼈대만 남아 타고 있었고, 혹 폭발이라도 할까봐 경찰차가 뒤에 밀려있는 차들을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랫 쪽이라서 그런지 밀려있는 차의 행렬은 100미터도 되지 않았던것 같더군요.

 

왜 저지경이 되도록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졸음 운전을 하지 않았나? 아니면 들뜬 휴가기분에 차의 정비를 소홀히 해서 과열이 되어 그런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없이 안전운행을 해야겠다는 경각심을 보여준 것이 되었지요.

 

거기서 다시 4차선국도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해남으로 향했습니다.

 

실은 옛부터 해남의 화원저수지, 개포지, 진도와 완도의 섬 안에 있는 저수지에서 민물낚시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과 거리가 여의치 않아 지금까지도 못하고 있기에 이번 기회에 단 몇 시간이라도 낚싯대를 담그고 싶었는데, 이번 낚시여행은 낚시친구를 위한 여행이기에 그 친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완도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낚시를 할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고, 일단 완도에서 일박하기로 여장을 풀고, 내일 아침 보길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내려오는 길이 비가 오락가락 하였는데, 저녁8시가 된 시간에도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완도의 시내 끝까지 들어갔다가, 바닷가 부두 같은 곳에 부두노조 건물에서 유턴하여 다시 숙소를 찾기로 하고 시내에서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생각보다 완도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습니다.

완도로 들어오는 길에, 육지로 나오는 외지의 차량들이 많았었는데, 아마 완도 보다는 땅끝마을을 보고자 들어왔던 차들 같았고, 아마 숙소라든지 먹을 곳이 변변치 않아서 그런지 다시 목포나 광주로 나가는 차량들이 아닌가? 하고 친구와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어쨌던, 무얼 먹을까? 이리 저리 기웃거렸는데, 음식점마다 별로 손님도 없고, 마땅히 완도의 맛있는 음식이 무언지 몰라 일단은 횟집으로 들어 갔습니다.

 

자연산 쥐치회가 맛있고 좋다는 주인의 말에 회와 세꼬시를 섞어 시켜 술을 한 잔 걸치니, 그제서야 여행의 여정이 시작되는 듯한 마음이 들더군요.

여행의 별미란 물론 각 지방의 특별한 음식의 맛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현지 주민들과 그 지방의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많은 각 지방의 풍습과 풍물을 아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지요.

 

마침 손님도 없기에 주인장을 불러 합석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왜 이 곳은 이렇게 한산하고, 땅끝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는 차들이 많으냐?" 했더니, "땅끝마을의 해남군수는 수완도 좋고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적극 홍보하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이곳 완도군수는 그렇지가 못하다. 바로 옆의 땅끝마을과 보길도로 들어가는 그 많은 차량들을 보면 열불이 난다. 물론 요즈음 경기가 안좋아 장사가 안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땅끝마을에 관광객을 빼앗겨 더욱 장사가 안된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완도에서는 개가 1원짜리 동전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완도를 아예 "돈섬"이라 부르기도 했던 화려한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이런 말 들은 완도 사람들이 김농사를 지어 떼돈을 벌었음을 빗대어 하는 말들이었지요. 물론 지금도 완도는 김과 미역으로 명성을 유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자료에서 보면 완도군은 조선시대 말기 갑신정변 때에 이조판서 이도재가 이곳 고금도에 귀양왔다가 여덟 해 만인 1894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뒷날에 학부대신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189641일에 군으로 승격시킨 곳이라 합니다.

완도 사람들은 그 때에 이도재의 은혜를 기려 완도읍 죽청리에 그의 송덕비를 세웠고, 이처럼 하나의 지역으로 묶인 지가 기껏해야 백년이 갓 넘는 형편이고 보면 이 군에 역사 유물이나 민속자료가 두드러지게 있지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러나 완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은 제주도로 가는 길의 윤선도를 보길도에 묶어 놓을 만큼 천혜의 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잠깐, 완도와 장보고의 관계를 떼어놓을 수 없기에 그의 이야기를 좀 옮겨와야 하겠습니다.

 

<완도군의 역사가 보잘것 없게 된 것은 이 나라의 해상을 주름잡았던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이 나라의 역사자료에는 그가 언제 태어났으며 또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완도읍 장좌리에서 태어나 일찌기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에서 무령군 소장 자리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무술에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어느 날 그곳 당나라에서 이 나라 서해 연안을 침범하여 납치하여 간 신라 사람을 노예로 내다파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하여 곧 벼슬자리를 내놓고 신라에 되돌아 왔다. 그리고 임금의 허락을 얻어 해적들이 이 나라 사람을 잡아가는 것을 막기위해 군사 만명을 이끌고 청해 곧,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에 진을 쳤으니 이것이 곧 청해진이었다. 그리고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히 무찔렀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우징이 제 목숨을 건지려고 837년에 청해진에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되어 바다의 왕인 장보고는 정치 바람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장보고는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통일신라 44대 임금인 민애왕을 죽였다. 그 사건으로 우징은 통일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이 되었으나 왕위에 오른지 석달 만에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문선왕이 되었다.

반란을 성공시켰던 공으로 감의 군사라는 벼슬자리에 오른 장보고는 그 무렵에 청해진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은 점을 이용하여 일본에 무역사절을 파견하는가 하면 당나라에도 무역사절인 견당 매물사를 보내어 이른바 삼각무역을 일으켰다. 이처럼 큰 힘을 가지게 되자 그는 그의 딸을 문성왕의 아내로 삼게 하려 하였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이듬해에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의 칼에 맞아 죽었다.

 

워낙 세력을 떨치던 사람을 죽인 터라 신라 조정에서는 그 부하가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하여 완도에 사람이 드는 것을 막았다. 851년에는 이곳에 살던 사람에게 모두 전라북도 벽골군, 곧 지금의 김제군 땅에 옮겨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때부터 한 오백년 동안에 걸쳐 완도에는 사람의 발갈이 뚝 끊어졌다. 그 대신에 동백나무, 황철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같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났고 그 사이로는 사슴, 노루, 고라니,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 마음껏 뛰어다녔다.

 

그 땅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은 고려시대 공민왕 때인 1351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의 완도군에 드는 완도와 그 밖의 여러 섬은 갈래갈래 나뉘어 강진군이나 장흥군, 게다가 남쪽바다에 자리잡고 있어 조정의 손길로부터 내팽개쳐지다시피 하여 이 섬 사람들은 당연히 이웃 뭍 지방 사람의 간섭과 구속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여기서 완도에 대한 역사적인 얘기는 즐이겠습니다.

 

지금의 장보고의 청해진 유적지는 너무나 초라하더군요.

지방자치이후 전국의 각 지방에서는 보잘것도 없는 것들을 침소봉대하여 겉만 요란하게 떠벌이며 과대포장하는 짓거리들에 실소를 금치 못하지만, 단체장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이렇게 관광자원을 자기지방의 수익을 위하여 활용하느냐 못하느냐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다시금 시원한 맥주를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려 하니까, 너무 오랜만에 장시간의 운전을 해서 그런지 몸전체가 진동에 의해 부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비오는 밤이었지만, 남도의 한 섬에서 처음 맞는 무더운 여름밤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무더운 여름밤

밤에 익은 애인들이 물가에 모여서

갈수록 외로워지는

긴 이야길 하다간, 밤이 깊어서

장미들이 잠들어버린 비탈진 길을

돌아들 간다

 

마침내 먼 하늘에 눈부신 작은 별들은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무수한 눈알들처럼 마음에 쏟아지고

나의 애인들은 사랑보다 눈물을 준다

 

내일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우리 서로 이야기 못한 그 많은 말들을

남긴 채

영 돌아들 갈 고운 밤

 

나의 사랑들이여

이별이 자주 오는 곳에 나는 살고

외로움과 슬픔을 받아주는 곳에 내가 산다

 

무더운 여름

밤이 줄줄 쏟아지는 물가에서

이별이 서러운 애인들이 밤을 샌다

별이 지고

별이 뜨고

 

- 조병화님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중에서 -

 

 

낚시친구와 시샘하듯 코를 많이 골아, 그 소리에 서로의 잠을 깨다 말다 하면서 아침을 맞아,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보길도의 윤선도, 미역을 사는 이야기로 계속하겠습니다.

 

<댓글>

 

**: 해남의 송호(?)해수욕장 부근에서 잠을 자고 오늘 새벽 6시 보길도행 배를 타러 갔는데 안개때문에 결항이 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습니다. 아이들과 함께여서 더욱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대신 동락재님의 글을 따라 보길도 여행에 나서봐야겠어요^^* 기대~!!! 2003/08/03

 

 

<Re:Re:Re:Re:어쩌다가 이런일이........?>

글쓴이 : 동락재

조회 : 128 스크랩 : 0 날짜 : 2003.08.03 20:53

 

깜희님, 고운이모님,

 

제글을 읽으시고 이렇게 꼬리말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도기행1- Prolog> 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음식의 맛에 대해 저의 낚시친구가 하는 얘기를 그대로 옮겨적은 내용에 대해 조금은 오해들을 하고 계셔서 안타깝습니다.

 

경상도 하동의 재첩국이 맛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한 5년전 가을에 제 아내와 결혼기념일을 맞아 지리산 화엄사 앞 콘도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구례와 지리산 자락 마을에서 내오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하동의 재첩국을 먹으려 일부러 하동까지 가서 재첩국을 먹고, 남해도를 구경도 하고 보리암, 또 상주해수욕장, 몽돌 해수욕장 등 경상도 남해안을 돌면서 식도락가 흉내를 내고 다니는 적도 많았습니다.

 

저 역시 여행을 좋아해서 어디에 무엇이 맛있고, 경치가 좋다하면 산골자기 오지를 마다않고 4륜구동차를 끌고 어디곤 가곤 합니다.

물론 지금은 백수의 신분이라 많이 자제를 하고 있습니다만, 맛 하면 저역시 남에 지지 않는 미식가이지만, 어느 지방의 어느 음식을 먹던, 미식가 이기전에 또한 원천적인 잡식가?이기에 음식 맛을 탓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맛이 더 좋게 느껴지는 음식, 덜 좋게 느껴지는 음식은 있게 마련이지요.

 

제 낚시친구의 아내는 전라도 분이기에, 아마 친구의 입맛은 전라도 음식 쪽에 근 40년을 길이 들었기에, 단순히 그 맛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저에게 얘기한 것이지, 공개적으로 어떤 공적인 매체를 통해 어느지방을 폄하할 목적으로 한것은 아닙니다. 친구에게 못할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의 입맛이란 누구나 다 제 각각이어서 누구의 입맛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남도기행에서 표현한 입맛이라는 것은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제 낚시친구의 입맛이고, 또 기행문이라는 것이 지나는 여정에서 보고 느끼는 삼라만상에 관한 주관적인 이야기이지, 그것이 학술적 근거를 가지고 논문이나 보고서 쓰듯이 객관적이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 되거나, 무슨 편을 가르고 하는것은 아니며, 더구나 저의 이 살아가는 이야기 <동락재통신>에서 다루어지는 이야기인데, 그러한 의도는 전혀 없을 뿐더러, 그것이 또한 어느 누구에게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더라. 그러니 경상도에는 가지도 말고 더구나 음식은 먹지도 마라"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단순히 님들의 고향녘 얘기가 나오는데, 그 고향의 음식 맛이 없다고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좀 마음에 들지는 않으시겠지요. 저의 낚시친구가 농담삼아 표현한 "음식 맛이 없어서 경상도에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표현했다해도 그것은 저보고 한 얘기이지 공적인 매체 또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는 매체를 통해 한 얘기는 아니니까 오해와 편견없이 저의 남도기행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경상도의 음식은 경상도대로 대구의 따로국밥, 부산 동래의 파전, 산성 막걸리, 생선회, 30여년 전에 자갈치 시장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꼼장어구이, 경주의 산채백반 등 등, 어느 지방이든지 그 지방 특유의 맛있는 음식이 있게 마련아닙니까?

 

, 저의 낚시친구는 충청도, 전라도, 서울과 외국 몇개국 이라는 테두리에서만 생활을 해왔고, 이제서야 우리나라 전국을 여행하는 맛을 느껴서 제가 이번 기회를 시작으로 가급적 전국 방방곡곡, 제가 다녔던 곳과 또 아직 가보지 못했던 오지에도 동행을 해서 여행친구로 앞으로도 같이 할것입니다.

 

이제 어느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낚시친구도 편협한 맛과 혀의 세계에서 해방이 되어 스스로 맛의 감정사가 되겠지요.

 

남도기행에서 나오는 각 지방의 소개라든지, 각 지방에 대한 이야기는 다분히 주관적, 개인적인 이야기 이므로, 또 전주조의 가족분들께 드리는 이야기로서 -가족에게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개인이나 단체 또는 사물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왜곡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님들과 다른 생각과 느낌을 얘기하더라도, "! 이런 생각과 느낌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고 봐 주십시오.

 

이런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닙니까?

단지 본인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요즈음 정권의 우두머리나 그 시녀들 처럼, 패를 가르고, 저희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역적 취급을 하고, 코드가 다르네, 반정부적이네.......하면서 흑백논리로 편을 가르지는 말자는 겁니다.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고 수렴하여,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우리 민주국민이 지향해야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전제주의 빨갱이들 처럼 모든 의견이 한가지로 일치해야 하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글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알고, 님들의 고견 고맙게 듣겠습니다.

 

지금, 동락재의 바깥에는 아직도 부슬비가 오고 있군요.

좋은 여름의 휴일 보내십시오.

 

 

<댓글>

 

제이: 조회수가 말 해 주듯이 인기있는 글임에 분명한가 봅니다^^가끔 너무 긴듯 해서 건성으로 읽어 내릴때도 있지만 다른 글 보단 읽는 편이지요. 즐거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진정하세요,,사실 경상도 음식 맛 없어요--;; 2003/08/03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보길도행 배를 타기위해 어제 횟집 주인장이 가르쳐 준 화홍포 여객선 터미날을 향해 완도대교입구까지 와서 그 근처일거라 짐작을 하고 선착장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더 섬의 안쪽으로 가다가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이게 물어보니, 도로 나가야 한다더군요.


다시 핸들을 돌려 가보니, 조그만 선착장인데 거기서는 보길도행 배가 없었습니다.   또 다시 되돌아 한참을 가니 화홍포 선착장이란 입간판 표시가 있기에 화살표대로 따라 들어가니, 돌을 캐는 석산과 그 돌을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고 나는데, 저 멀리 선착장인 듯한 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방파제에 붙은 길이 있긴 있지만, 입구에 승용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게 콘크리트 구조물로 양쪽에 기둥을 세워 놓았습니다.


이 길은 자동차 통행로가 아니다 싶어 덤프트럭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그 길이  맞다는 것이어서, 가까스로 입구를 거쳐 약 1키로를 가보니 출구 쪽에도 역시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통과해 나가니 큰 도로에서 진입하는 도로가 따로 있는 듯 다른 승용차들이 그 길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지방이나 서울이나 그놈의 이정표를 믿고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여간한 곡예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어쨌던, 날씨가 비가 오락가락 잔뜩 찌프린 탓인지, 아직은 본격 피서 나들이  날씨가 아니어서 인지 선착장이 그리 붐비지는 않더군요. 한 10여분 기다려, 저는 승용차를 가지고 카페리에 승선을 했고  낚시친구는 걸어서 따로 배에 승선을 했습니다.


배는 농협에서 운행하는 배와 개인업자가 운행하는 배가 있었는데, 저희가 탄  배는 농협에서 운영하는 배였습니다.


승용차와 트럭 등, 10여대의 자동차를 실었는데 승객이 한 5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더군요. 날씨 덕분에 붐비지 않고,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과연 김과 미역 등을 양식하는 완도이기에 바다는 온통 목장처럼 양식장으로  덮여져 있었습니다.


모처럼 배를 타 보니,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한 30년 전쯤인가? 한참 젊은 20대 후반의 나이 때에 인천항에서 덕적도 서포리 해수욕장으로 친구들 4명이 휴가를 간 적이 있었지요.

3박 4일의 일정으로 여행을 갔는데, 마지막 3박의 날 저녁에 남은 쌀과 부식은  이웃 텐트를 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잠을 자는데, 그때부터 태풍이 불어,  비바람이 텐트를 휩쓸 기세로 몰아쳐 할 수 없이 근처의 민박집으로 대피를 했습니다.


3박 4일의 섬 여행 후 다시 내륙으로의 여행을 계획하였기에, 친구들 모두 달랑  3박 4일에 소요되는 경비만을 가지고 갔기에, 태풍이 잠잠해 지기까지 여분의  경비로 민박을 하고, 꼬박 이틀을 쫄쫄 굶으며, 배가 뜰 때를 기다렸던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그때는 저희뿐이 아니고, 대다수의 젊은 친구들이 그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인천항까지 쫄쫄 굶고 나와, 기차를 타고 서울 집으로 와서야, 며칠 만에 밥이란  것을 구경을 했었지요.


그 후 저는 섬 여행은 가급적 하지 않기로 하고, 또 한다 하더라도 시간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주도 여행을 갈 때에도 그때의 섬 여행에서 고생한 기억으로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여행이 되고, 섬을 떠나 육지로 귀환(?)한 후에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 섬 알러지 증후군이 생겼습니다.


1시간 20분쯤 후에 2개의 섬을 거쳐 보길도에 닿았습니다.


보길도까지 간 승객은 1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곳도 그렇게   관광객이 붐비는 곳은 아닌가 보다 했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 시장끼를 느껴, 가까운 음식점 아무 곳에나 들어갔습니다.  아침이니까 친구가 전북죽이 어떻겠냐? 해서 10,000원 짜리 전복죽으로 시장끼를 때웠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매 한가지겠지만 전복죽 한 그릇에 만원이 라면 싼값인데, 전복이 진짜 전복이냐 하는 것이지요.

 

음식을 시킨 지 5분도 안되어 전복죽이라고 나오는데, 눈앞 수조에서 아기 주먹만한 전복을 세 마리 건져서 주방으로 들고 가더니, 죽을 쑤지는 않고 준비된  육수에 전복도 아니고 더구나 오분자기도 아닌 그렇고 그런 것을 얇게 썰어 넣은 것 같았습니다. 떫은 미소가 절로 나오더군요.

 

친구는 그것도 모르고 이번에는 전복회를 한 접시 더 먹고 가자고 했지만 제가  싫다고 했습니다. 모르고 먹으면 몰라도 알고도 속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차를 몰고 윤선도의 세연정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남도를 돌면서 투박하고 향토색 짙은 그런 모습들을 담기위해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갔습니다만 얼마나  담을만한 것이 많을지 은근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근처를 헤매다가 초등학교 앞에 세워 두었던 차가 한 대 빠져나가기에 그 자리에 세워놓고 세연정으로 향했습니다.


정자의 목재엔 단청의 흔적은 없고,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자연 퇴색된 검은  회색의 나무색깔로도 그 정자는 멋을 은은히 지니고 있더군요. 커다란 바위가  연못 한가운데 있고, 오래된 커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마주보며 서있어 그늘도 만들어 주더군요.

거기서 친구와 서로를 한 장씩 사진을 찍어주며 쉰내 나는 폼을 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많아지기에 그 윗쪽에 있다는 동천석실로 향했습니다.

앞에 광주에서 렌터카를 타고 온 아가씨가 너무도 여유있게 가기에 조금 넓은  길에서 앞지르고 갔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여유가 많아서 일까요? 아니면  저밖에 모르고 커서일까요? 아니면 마음이 너그러워서 일까요? 너무 운전에  대한 예절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저 혼자 늦게 갈 요량이면 좀 넓은 길이 나오면 우측 깜빡이를 켜고 신호를 하여 뒷차가 앞질러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막무가내 내  배 째주이소! 하고 가는 사람들이 열이면 아홉이니....


우리 아이는 그렇지는 않은데, 아마 그러한 운전예절은 제 부모에게 은연중 배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십 수 년 전에 시내에서 젊은이가 끼어들기 위해 깜박이를 켜고  한참을 애쓰고 있는데, 아무도 비켜주지 않기에 제가 양보를 해 주었더니, 들어오면서 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거수경례를 하는데 얼마나 귀엽고 기특하던지, 저도 거수경례로 활짝 웃으며 답례를 해 준적이 있습니다.

 

요즈음도 그런 사내 녀석이 있으면, 당장 제 사위 삼고 싶은 마음입니다.


동천석실 입구에도 이미 차들이 주차를 해 놓아서, 차를 대 놓을 데가 없더군요. 그래서 섬을 일주할 요량으로 그 윗쪽으로 가니 저수지가 있는데, 아마도 상수원이었던지, 철망으로 된 문으로 막아놓아 길이 막혀서 도로 내려와, 낚시친구 부인의 “오는 길에 미역을 사오라”는 엄명을 받들기 위해 그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휴대폰으로 친구가 그 집에 연락을 하였더니 어떻게 어떻게 찾아오라고 하는데, 운전을 하는 사람이 직접 전화를 받아야 덜 헤맬 텐데, 한 치 건너 길안내를  받으니 또 두어 번 오던 길을 다시 갔다 나오면서, 그 입구를 간신히 찾아 해안을 따라 정자리(?) 인가로 한 10여분 들어가니, 뾰족산(지도상 지명은 보족산으로 되어 있더군요), 민박, 농어민후계자, 어쩌구 저쩌구 00000...라고 요란하게 써 붙인 가게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길의 끝이고 찾고자 하는 바로 그 가게였습니다.

 

찾기는 바로 찾았습니다.

 

얼마 전에 제 낚시친구의 부인이 철도청의 철도여행을 이용해 이곳에 와서 미역과 김을 사가지고 갔는데, 맛이 좋아서 이번 여행에 좀 사오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이웃에서도 사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친구가 10개를 사더군요. 아마 그 사이에도 더러더러 택배로 미역과 젓갈을 주문했던 모양입니다.


자기들 고객의 남편이 왔으니, 반갑게 맞이해 주더군요. 그러더니 죽을 많이 쑤었으니 좀 먹어보라고 하여, 음식점이 아닌 어민들이 끓여먹는 죽은 맛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그릇을 다 먹었습니다. 맛이 괜찮더군요. 음식점에서 파는 전복죽 보다는 제대로 쑨 죽이어서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집은 가만히 보니까 한 200여 평 되는 야적장에 젓갈 통으로 대형 FRP물통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200여 개는 족히 되는 것 같았고, 매장의 매대에는 저는 처음 보는 전어젓갈도 있었습니다. 빨간 새우가 아주 크고 정갈하게 잘 건조되어 있는데 맛있게 보여서 맥주안주용으로 몇 봉을 샀습니다.

맛을 보니 썩 괜찮더군요. 오늘 밤에 숙소에서 시원한 맥주에 새우로 안주할 생각을 하니 군침이 절로 났습니다.

일정이 괜찮다면 하루를 묵고 바다낚시나 하고 가라고 하는데, 갈 곳이 많아서  사양하고 해안을 따라 예송리 해수욕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이미 해수욕객들이 많이 와있더군요. 4륜구동 짚차로 택시영업을 하더군요. 이쪽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산길이 험하고 겨울엔 눈이 많이 오니 짚차로 택시를 삼은 것을 많이 봐왔는데, 남쪽의 섬에서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다시 배를 타기위해 선착장으로 나오니, 승선을 기다리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서있었습니다.

완도 쪽엔 차량행렬이 길었지만 다행히 진도 쪽으로 가려는 - 송호리(?)였나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 그 쪽엔 바로 차로 승선할 수가 있어서, 보길도를 더 관광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그냥 막 바로 나왔습니다.


좀더, 옛날의 유적지를 찾아보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이번 여행은 치밀하게 일정을 세운 게 아니고 그냥 발 가는 데로 가보자 하는 그런 쫓기지 않는  편안한 여행 이었으므로, 다음 기회에는 남도에 대해 많은 자료를 미리 조사하여 짭짤한 문화여행과 맛의 여행이 되도록 기회를 더 만들기로 훗날을 기약하였습니다.


진도로 향하는 길에 크고 작은 저수지가 참으로 많아 낚싯대를 담그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오후 5시경인가?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읍에 도착하여, 운림산방으로 향했습니다.

진도에 온 목적은 우선 운림산방을 둘러보고, 밤낚시를 하고자 함이었으니까요.


이 기행문을 몇 시간에 걸쳐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뒷밭에 나가, 밭이라고 해야 몇 십 평 되지도 않지만 고추도 따고, 상추도 따고, 도마도도 몇 개 따고, 또 남도여행에서 돌아와 지저분한 차 내부 청소도 하고, 또 목공예디자인을 배우는 학교의 젊은 친구들이 이 동락재에 놀러 오겠다는 전화를 받느라, 또 청소도 하랴 하다 보니 글의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군요.


학교 친구들이 오늘 저녁에 와서 같이 대포나 나누었으면 했는데,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내일 아침에 온다하여 무얼 먹게 하고 무얼 보여주어야 할 지,  이 것 저 것 궁리를 하고 준비를 하려하니, 딱이 무어 준비할 것도 없고 마음만  바빠집니다.

이 우거 산촌의 동락재를 찾아준다는 것만 해도 작지만 커다란 기쁨이기에 마음만 설레입니다.


진도라 하면 옛 부터 귀양지로 남도일대가 활용(?)되어왔고, 특히 진도가 유배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중기부터였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진도 땅이 더 자주 유배지로 쓰였다고 하는군요.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왕실을 둘러싸고 반란이나 당파싸움이  피바람을 몰고 올 적마다 힘이 부친 왕족이나 양반은 진도 땅으로 귀양 보내졌다고 하지요.

 

진도 땅에 귀양을 왔다가 귀양살이가 풀려 다시 벼슬길에 올랐던 이도 있으나,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은 이도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영조 때에 한 전라도 감사가 조정에 "진도에는 유배자가 너무 많아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죄 없는 섬사람들까지 굶어 죽을 판이니 유배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진도에 유배를 왔던 사람은 많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진도 땅에 귀양을 왔던 이는 거개가 풍류깨나 앎직한 왕족이나 양반들로서 그들은 지난날의 영화를 잊으려고 제 처지를 노래에 닮거나 글로 쓰거나  림을 그렸겠지요. 이곳에 살던 본토박이들도 비록 귀양을 왔을망정 귀하신(?) 귀하셨던 그들의 시름을 이곳의 고유한 노랫가락과 춤사위로 달래 주었을것이기도 하지요.


그런 역사의 배경을 지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진도문화는 한반도의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 섬답지 않게 그 수준이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진도 땅에 들어오는 길에 시골의 읍 단위로는 제법 커다란 문화회관 건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진도 땅에서 동양화가와 서예가가 많이 나왔음도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도 합니다.

국전 초대, 추천작가만 해도 남농 허건을 비롯하여 다섯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도군의 자랑거리로 앞세울 수 있는 것은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이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소치 허유로부터 그의 아들인 미산 허영, 손자인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허씨 집안의 동양화와 더불어 지난 1980년경부터 허건이 집안의 유품 전시관을 곁들여서 복원시키고 있는 운림산방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운림산방은 허유가 살았던 집으로서 의신면 사천리의 쌍계사 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나라 동양화단의 우뚝한 봉우리로 일컬어지는 허백련은 늘그막에 광주 무등산 기슭에서 제자를 길러내었기 때문에 마치 광주사람인양 알고 있는 이가 많지만 허씨 가문과 핏줄이 닿아 있는 진도 사람이지요.


사족입니다만, 진도에서 태어난 현대의 큰 예술가로는 1981년 세상을 뜬 서예가 소전 손재형도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뒤로 이 나라 서예의 맥락을 이어 현대 한국서예의 절정을 이룬 손재형을 두고 화가 서세옥은 "근세에 한국의 아름다움이 뭣인가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신안 출신인 서양화가 김환기와 함께 진도 출신인 서예가 손재형인데,  특히 한글을 서예예술로 발전시킨 소전의 공로를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칭송을 했었지요.


저는 사실, 젊은 시절 동양화는 너무 정적인 미술의 한 분야이기에 "동양화를  보면 졸립다"라고 폄하해 기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한 두 살 먹어가면서, 그 時空을 넘나드는 여백의 미를 느끼게 되면서 아! 동양화란 것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미워할 수 없고, 그 깊은 맛을 찾아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할 심도 있는 예술의 한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운림산방이란 역사적의미가 그러하듯이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1808-1892)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서 소치-미산-남농-임전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의 맥을 이어온 남화의 산실로 단아하고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갔던 날은 아마도 다시 운림산방을 대대적으로 정비를  하기위해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서, 입장료는 받지 않았지만 전시된 공간도 그림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얼핏 한 2-3만평 되는 부지위에 그들이 거쳐했던 화실들이 아주 단아하며 정숙하게 재 축조 되어 있었고 전시장인 듯 현대식건물과 한옥으로 된 건물을 전시장으로 활용할 듯, 대대적 수리, 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한 곳도 이곳이라 합니다.


진도태생으로서 시, 서, 화에 두루 능했던 소치는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등에  게 서화수업을 했고 벼슬살이를 하다가 1856년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아래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소치의 손자 남농이 허물어져 가는 운림산방을 다시 복원, 현재 초가와 사랑채,  기념관, 연못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연못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는데,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옛날을 생각하며 초연히 서있는 듯 했습니다.


정말로 아쉬운 것은 그 허씨 가문의 4대에 걸친 그림을 한 점도 보지 못하고 온  것이, 다음에는 남도예술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목적을 뚜렷이 하고 동양화를 아직도 배우는 입장에 있는 집사람과 사랑하는 아들, 딸들과 함께 다시 찾아와 야겠다는 기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운림산방을 뒤로하고 첨찰산을 오르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갈라진다는 바다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운림산방을 오면서 초입의 사천저수지가 우리를 부르고 있기에 산의 정상에서  다시 핸들을 돌려 되돌아 가 저수지 제방 좌안에 세웠습니다.


마침 낚시를 하는 남도의 현지인이 한 사람 있었고, 새우를 잡는다고 새우망을  여럿 펴놓은 사람들을 만나 저수지의 조황에 대해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삼고 초려 끝에 그냥 이곳에서 오늘은 밤낚시를 하기로 하고, 대를 편 후 저는 시내로 나가 밤에 먹을 약간의 양식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양식이랄 게 술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부속품(안주 감)인 남도 섬의 도야지 삼겹살을 한 칼 곁들였음은 물론이지요. 

 

석양은 점점 어둠으로 빨려 들면서, 시장끼를 참아온 저희들은 남도의 돼지고기를 안주삼아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내음을 맡으며 서로의 잔을 기울였습니다.

 

바닷가 섬에서 민물낚시란 조금은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몇 십 년을 별러온 진도에서의 붕어낚시를 하는 작지만 꽉 찬 기쁨에 모기의 지독한 공격도 참을만 하였습니다.


진도의 밤을 그렇게 보내면서 커피 한 잔에 피곤한 여정을 달래며 내일은 진안의 마이산 탑사- 이갑용 처사의 돌탑-을 보러 가기로 의기투합하고 캄캄한 저수지에 낚시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진안 마이산 탑사 이야기로 다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시간은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변하오며 지나가옵는 것은 사람일 뿐

시간은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사천저수지의 밤물결은 소곤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조병화님의 시집 "낮은 목소리로" 중에서 <낮은 목소리로 45> 였습니다. 

 

 

 

<댓글>

 

가랑비: 정말 좋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잘 풀어내시는지요? 감동 먹었습니다. 2003/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