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해인사 외 / 조병화

sosoart 2010. 5. 7. 23:58

  

 

 

 해인사 / 조병화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부처는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내가 시를 쓰는 건 / 조병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내일 / 조병화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주점 / 조병화

 

 

 

일체의 수속이 싫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뚫고드는
우울을 견디지 못해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나는 먼저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해 본다.

필요 이상의 예절을 지켜야 할
아무런 죄도 나에겐 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지극히 우울해진다
한때 이 거리가
화려한 화단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기 싫은
그 날이 있고부터
이 거리의 회화를 나는 잊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러한 수속조차 이미 나에겐 권태스러워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눈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산다는 것이 권태스러운 일이 아니다
수속을 해야 할 내가 있어
그 많은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어
눈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아버지가 된 그 일이
마침내 어쩔 수 없는 내 여생과 같이. 

 

  

 

 

 

 

  

 

 

 


안개로 가는 길 / 조병화

 

-경인 하이웨이에서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밖은
마냥 안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던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나는
이 길로 왔을까

피하며, 피하며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빈 소유에 떠서

안개로 가는 길
안개에서 오는 길
휙 휙
곧은 속도로 엇갈리는 생명
창밖은
마냥 안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난은 / 조병화 

 



가난은 언제나 슬픈 거
어디서나 애절한 거
누구에게나 가련한 거

그것은 불쌍하다는 말을 넘어서
그대로 마음에 젖어드는 까닭없는 눈물
찌릿 찌릿한 거
찌릿 찌릿한 거

모로코, 마라케시 근교
모래바람 부는 시골 장터에서
야윈 나귀를 팔고 있던
아랍의 여인, 그 까만
굶주린 깊은 눈동자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건 혁명 같은 거
사랑 같은 걸 넘은
혈육 같은 찐득 찐득한 거

그것을 더 넘은
비극의 미학 같은
사막의 사랑 같은
나의 눈물이 아니었던가

아, 그와도 같이
가난은 언제나 슬픈 거
어디서나 애절한 거
누구에게나 가련한 거.

 

 

 

 

 

                     

                        조병화 시인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가을 / 조병화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그 어리석음을 알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아, 얼마나 세상사 인간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돌아갈 뿐이다.


 

 

 

 

 

 

 

 

하루만의 위안 / 조병화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공존의 이유 / 조병화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하지 맙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제나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앞에 서글픈 그날이 오면
가벼운 눈읏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공존의 이유 12 /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걸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낙엽끼리 모여산다 /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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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꿈의 귀향 / 조병화

 

어머니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나 돌아간 흔적 / 조병화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읍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읍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읍니다

아세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어 세상 수만리 나 찾어 왔읍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읍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읍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려 나 찾어 왔읍니다.

 

 

 


 

 

 

사랑의 노숙 / 조병화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늘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슬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슬한 노래이었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추억 /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소라 /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도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 조병화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세상 어지럽게 많은 말들을 뿌렸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밀 한마디
"당신의 사랑의 은혜 무량했습니다"
보답 못 한 거 다 잊어 주십시오
아,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다 잊어 주십시오

 

 

 

 

 

 

 

 

 

 

 

 

 


먼 곳에서 / 조병화

 

 

 

이젠 먼 곳들이 그리워집니다
먼 곳에 있는 것들이 그리워집니다

하늘 먼 별들이 정답듯이
먼 지구 끝에 매달려 있는 섬들이 정답듯이
먼 강가에 있는 당신이
아무런 까닭 없이 그리워집니다

철새들이 날아드는 그곳
그곳 강가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당신이 그리운 것 없이 그리워집니다

먼먼 곳이 날로 그리워집니다
먼 하늘을 도는 별처럼

 

 

 

 



 

 

 

 

 

 


별 / 조병화

 

 

 

 

멉니다
아련하옵니다
불가사의 합니다
신비롭습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 중에서
사람이 사느 별이 있을까
하는 순간, 한 눈물이 떠올랐습니다

반짝, 반짝.

 

 

 

 


 

 

 

 묵은 사진첩을 / 조병화

 

 

 

 

묵은 사진첩을 들추고 있노라니 
까닭 모르는 슬픔이
왈칵, 내 몸에 배어 옵니다.

기쁜 얼굴도 그렇고
웃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슬픈 얼굴은 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기억 밖에 아주 묻혀 버린 얼굴들
기억 내에 아직 머물고 있는 얼굴들
어렴풋이 그때 그 시절, 생각나는 얼굴들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핑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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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땐
사랑하고 싶어졌어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땐
남 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듯이 바다기슭을 다름질쳐 갔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 조병화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벗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을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지금 내 마음은 / 조병화

 

 

 

 

지금 내 마음은
여름 홍수가
심하게 지나간 뒤에 남은

개울 물줄기가
말라 들어가는

한여름
하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흘러 내려가다가
남은 작은 돌들이 드문드문

개울바닥에서
따갑게 햇볕에 타고 있는

돌밭에 끼어
멀리 불그스레이

개울 바람에 산들거리는
가냘픈 패랭이꽃
한 송이,
이걸 전생의 한 인연이라 할까

이 인연으로 하여 아직은 가득한

한여름
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아, 아깝던 시간

그 시간이 쉴새없이
그대로 지나가도

이젠 붙들 수 없는
힘 빠진

한여름 늘어진
하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어머님, 절 늙게 해 주십시오 / 조병화

                        


 


   어머님, 절 늙게 해주십시오

  그곳 死者의 세계에 계신

  당신을 훤히 볼 수 있는

  경지로

  절 늙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죽음이 절 툭툭 치더라도

  까딱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동요치 않게 해 주십시오


  불안이라든지

  공포라든지

  초조라든지

  미련이라든지

  하는, 生者의 孤獨이

  제게선 이미 떠난 거로 해주십시오


  어머님, 절 늙게 해 주십시오

  세월에 풍화되어

  기진맥진, 온 감각이 마비되어

  무엇보다도 고통 모르게

  기류처럼

  당신 곁으로 흘러가게 해 주십시오


  

 

 

시작 메모: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오면서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은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그 죽음을 완수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늘 머릿 속에 있는 것을, 어느 날 시로 묶은 것이다.

조용한 氣流처럼 흘러서 죽음으로 옮겨갔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완전히 풍화되어 고통을 모르게끔 마비되어 자기도

모르게 죽음으로 되었으면 하는 생각 등, 소리없이 사라질

수 있는 그 죽음, 종종 그런 것을 생각해 보았다.

완전히 늙는다는 것은 훨훨 타는 나무가 되고 숯이 되고

숯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서서히 열을 식혀가며 사그라

지다가 , 완전히 뽀얀 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나는 아직도 활활 불타는 나무 토막같은 생존이 아닌가.

완전 노화, 고통을 모르는, 아니면 완전道通 , 고통을 초월

할 수 있는, 초월이 되지 않는 곳에 아직 인간적인 고민이

있는 것이다. 

 

- ‘순간처럼 영원처럼’ 自選詩 인생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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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우리 삶을 기다림과 고독, 낭만과 사랑으로 노래하며 한 해

한 권꼴로 신작 시집만 무려 52권을 펴내던 조병화(趙炳華) 시인이

마지막 시 구절로 '그럼'을 남기고 잠들었다.

趙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숙(宿)'이라 했다. 그는 무릇 시는 '영혼이

잠자는 집'이라며 현실은 현실대로 시는 시대로 따로 살다 간,

강팍했던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낭만.순수 시인이었다.

부음을 듣고 부랴부랴 빈소를 찾은 이근배 한국현대시인협회장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잃어 막막하다.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 처럼 누가 읽어도 이게 시구나 라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인을 빼앗겼으니 이제 시는 점점 더 꼬이고

어려워지겠구나" 하며 안타까워 했다.

지난 1월 8일 입원 이후 줄곧 병실을 지켜온 고인의 '수제자' 김삼주

시인은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엔 시'라며 시를 별과 같이 지키는

시인들을 위해 나머지 재산을 다 쓰라 하며 눈을 감으셨다"며 "현실

주의. 상업주의 시대지만 많은 시인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시의

순수성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 추억

 

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 아련히 빠져들었을 위 시와 같이 趙시인의

시는 쉬워 그대로 노래가 될 수 있다. 시적 미학이나 현실성을 강조

난해하거나 팍팍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슴 가득 감동을 받을

있는 게 반세기 이상 그의 시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경성사범을 수석으로 입학한 준재인 그는 평탄한 삶을 유복하게

살았으면서도 시 자체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 그리움이 고독을 낳고 허무를 낳는다.

고독과 허무를 노래하면서도 고뇌에 찬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어 趙씨의 시들은 환한 꽃 그림자다. 현실에서는 결코 순하게

합해 질 수 없는 꿈과 그리움과 사랑이지만 인간이란 결코 그런

가치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며 시와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

이다. 시집. 에세이집 등을 합쳐 총 1백30여권의 저서를 펴내,

꽤 되는 인세 수입을 모두 털어 자신의 호를 딴 편운(片雲)문학상

을 만들었다. 벌써 12회째 후배 시인.평론가들의 순수문학 혼을

격려하고 있다. 학창시절 자신도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니 문인

장학금으로 내놓겠다며 그의 저작권과 사재 모두를 순수문학의

제단에 바치고 갔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장남 진형(眞衡.세종대

대학원장)씨와 장녀 원(媛.의사). 차녀 양(洋.음악가).3녀 영(泳.

화가)씨가 있다. 

 

/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병화 시인의 육필회고전에 부쳐



문체도 그렇거니와 필체도 그 사람의 불가피한 기질과 취향, 사람 됨됨이

드러낸다. 필체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살아온 歷程이 그대로 내비친다.

그러므로 필체와 그것을 쓴 사람은 분리할 수가 없다. 필체와 인격은 마주

보는 거울처럼 상호조응한다. 이번 육필전에서 선보이는 글씨는 선생님의

마흔 일곱 번째 시집 『먼 약속』을 위해 썼던 원고 글씨다. 이때 선생님

연세는 78세였다. “나의 유언에 가까운 시들”이라고 말한 시들 중에는

묘비명으로 쓴 「꿈의 귀향」도 들어 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어머니 심부름 나온 것으로 여기셨다.

이 소박한 은유에서도 선생님의 인생관을 엿본다.

조병화 시인은 낭만적 허무주의자다.

낭만과 허무는 선생님의 시를 떠받치는 중요한 두 축이다.

선생님의 시들은 나고 죽는 것, 만나고 헤어지는 것, 삶에 어리는

우수, 존재의 고독을 노래한다. 선생님 시는 간결하고 쉽다.

누가 읽어도 이해에 어려움이 없다. 그 시들은 선생님의 소탈한

인품을 엿보게 하는데, 글씨 또한 그러하다. 글씨들은 화려하지

않고, 모나지 않고,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다. 선생님의 필체는

소탈하고 담백하다. 그렇다고 어디 한 군데 흐트러진 구석을

보이지도 않고, 朝夕으로 萬變하는 글씨도 아니다.

글씨들은 시의 전달이라는 제일의적 소명에 충실하면서도 제

품격을 시종으로 지킨다. 견결한 인격의 통어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조병화 시인은 시와 인품과 글씨가 하나인 분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하신 조병화문학관에 감사드린다.

장석주 / 시인, 문학평론가  

 

 

 

내 詩心의 발원이 되었던 조병화 시인,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데-

40년도 더 너머 내가 고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 친구 형님의 책장에서

조병화 시인의 시집을 처음 보았다. 그 친구의 형님과는 후일 교류가

있었는데 그 분은 문학과 언론의 길로 들어서 지금은 모 언론사의

회장으로 계신다. 우리는 그를 시인으로 부른다.

이 무렵 읽은 시편- 하루만의 위안, 공존의 이유, 낙엽끼리 모여 산다, 

候鳥 등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고등학교 시절, 조병화시집헤지도록

읽으며 나는 생존, 숙박, 고독이라는 말들을 배웠같다.

지금 그 시인을 캠퍼스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시인은

희소가치가 있었다. 시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시인이 아니어도 낭만이

있었고 시집은 귀한 선물이었다. 오늘 조병화시인의 시를 다시 읽으며

가슴뛰던 내 靑年으로 돌아간다 

 

2009. 6. 12 동산

 

 

 


 

출처 : nie-group
글쓴이 : 비비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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