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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컬럼-그림의 뜻 (44)하멜이 훔쳐 본 풍경, 탐라왕국터와 마라도/최열

sosoart 2012. 11. 12. 11:32

최열 그림의 뜻

(44)하멜이 훔쳐 본 풍경, 탐라왕국터와 마라도

최열

그림의 뜻(44) 작가미상 -《영주십경》

섬은 무수히 많아 보이는 절벽과 보이지 않는 절벽들, 암초로 둘러싸여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곡물이 풍부하였으며, 말과 소가 많았다.

그 중 많은 양을 매년 왕에게 공물로 바쳤다.

주민은 본토 사람에게 천대 받았으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나무 우거진 높은 산이 하나 있고,

특히 나무가 없는 계곡이 많고 낮은 민둥산들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사람들은 벼를 재배하고 있다.


-헨드릭 하멜,《하멜 보고서》



일본 고려미술관에 있는 <산방> 화폭 왼쪽 끝에 월라악과 이두봉(伊頭峰)을 그려두었는데 이곳 북쪽이 안덕계곡이다. 안덕계곡 북쪽 광평리엔 대비라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던 높이 549m의 조근대비오름이 있고 또 탐라왕국 삼신왕(三神王)이 사흘동안 기도를 드리던 웅덩이 베리창이 있어 유명해진 높이 517m의 와이오름[왕이뫼王岳]이 있다. 그 아래 감산에는 저승문 바위가 있고 거기엔 굴이 있는데 너무도 험악해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고 ‘저승문’이라 하였다.

서쪽으로 나가면 산방산(山房山)이 돌연 치솟기 직전 화순리 일대 또한 탐라왕국의 자취가 숨 쉬고 있다. 화순리 중동에 왕자 양씨(梁氏)의 양왕자터와 그의 전답인 춤춘이왓 및 왕돌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는 왕돌선밭 그리고 장군 양의서터가 있으며 화순 동쪽으로 신선이 놀던 신산동산이 있고 서동의 선배이돌이라는 유반석(儒班石)과 동동의 무반석(武班石)이 전설을 뿌리고 있다. 서동과 동동 마을 사람들이 내기 싸움으로 힘겨루기를 할 때면 언제나 서동 마을이 이기곤 했다. 번번이 지던 동동 사람들이 건너편 유반석 때문에 지는 것이라 해서 꾀를 내어 서동 사람들로 하여금 유반석을 거꾸러뜨리게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동의 힘센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나갔던 것이다. 속은 사실을 깨우친 서동 사람들이 저 동동의 무반석을 거꾸러뜨리려 하였으나 이미 힘 빠진 뒤였기에 무반석은 멀쩡했고 그 뒤로 무반석의 동동 마을이 언제나 내기에서 이기기 시작했다. 학문보다 무예의 위세가 지배했던 것일까.


산방산을 끼고서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남쪽 바닷가에 높이 104m의 송악산(솔오름)이 자리 잡고 앞바다에 가오리처럼 생긴 섬이라는 가파도(加波島)와 마라도(馬羅島)를 거느린 채 남쪽 바다를 호령하고 있다. 그림 <산방> 화폭 상단 바다 복판에 뜬 마라도는 북위 33도 7분에 위치한 남쪽 끝 섬이다. 가로세로 1km의 넓이를 지닌 섬으로 땅 위에 바닷물이 넘실거려 많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이라 육지에서 보면 제주도가 유배지였지만 제주도에서 보면 이곳 마라도가 유배지였다. 마라도엔 할망당 또는 처녀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가파도 주민 이씨 가족이 살기 위해 마라도로 건너가 농사를 짓기 위해 우거진 수풀을 태웠지만 쉽지 않았다. 실망한 채 가파도로 되돌아가려 할 즈음, 꿈에 신선 같은 사람이 나타나 “처녀 한 사람을 놓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풍랑을 일으켜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씨는 아이 보는 여자아이인 업저지에게 “애 업을 포대기를 가져오너라.”라고 심부름시킨 뒤 몰래 섬을 떠나버렸다. 그 뒤 섬에 가보니 업저지는 죽어 해골이 되어 있으므로 처녀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에 업저지의 영혼은 마라도의 수호신이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림 <산방> 화폭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파도는 1653년 8월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 일행이 스페르웨르(Sparrow)호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가다가 폭풍우 탓에 난파당해 도착한 섬이다. 이들을 구조한 제주관리들은 하멜 일행을 대정현을 거쳐 광해(光海) 왕이 유배 살던 제주시내 적거소(謫居所)에 머물게 하였다. 다음해 6월 한양으로 떠날 때까지 이들은 10개월을 제주에서 머물렀다. 탈출에 성공, 1668년 7월 고국 네덜란드에 도착한 하멜은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였다.《하멜 보고서》에는 그 시절 이방인이 바라본 조선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