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용택의 시 이야기] 온몸으로 웃던 살구나무 김용택의 시 이야기 201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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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아이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머리에 이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어떤 아이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입으로 받아먹기도 한다. 사사사사사 피던 살구꽃이 바람이 불어 우수수수 지면 교실까지 꽃잎들이 붕붕 날아들었다. 공부하는 아이들 책상 위로 꽃잎이 날아와 앉으면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살구나무를 바라보았다.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하얗게 날아다녔다.
- 꽃이 피고, 새 잎이 돋는/봄이 되면, 그리고/너는 예쁜 종아리를 다 드러내 놓고/나비처럼 하늘거리는/옷을 입고 나타나겠지.//한 그루의 나무가 온통 꽃을 그리는/그날이 오면, 그러면/너는 그 꽃그늘 아래 서서 웃겠지./하얀 팔목을/다 드러내 놓고/온몸으로 웃겠지./나를 사랑하겠지.//봄빛은/돌 속에 /숨은 꽃도 찾아낸다./봄날이, 그렇게 되면/너는 내 앞으로 걸어와/어서 나 좀 봐달라고 조르겠지./바람 속에 연분홍 꽃가지를 살랑대며/봄바람이/나를 채 가기 전에/어서 나를 가져달라고 채근 대겠지. - <문학동네> 2008 여름호, ‘살구나무’ 전문, 김용택 지음
-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했을 때, 학교에는 교실이 없었다.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운동장 가에는 군인들의 막사가 있었고, 운동장에서는 군인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교실이 없던 우리들은 운동장 가에 있는 벚나무에다가 흑판을 달아 놓고 공부를 했다. 오래 된 벚나무들이 학교를 삥 둘러싸고 있었다. 봄이 되자 벚꽃이 피어났다. 학교가 구름 속에 파묻힌 것처럼 환했다. 벚나무들이 꽃을 피울 때 같이 꽃피는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살구나무였다. 살구나무 나이나 벚나무 나이나 같아 보였다. 살구나무는 벚나무보다 조금 일찍 꽃이 핀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날보다 한 사나흘 쯤 일찍 핀다. 어떨 때는 거의 동시에 피기도 한다. 봄에 피는 꽃들은 날씨만 좋으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조금 놀다가 살구나무를 바라보면 아까와는 다르게 보인다.
살구나무 아래 서 있으면 꽃피는 소리가 ‘사사사사사’ 들리는 것 같다. 아니, 정말 들린다. 살구꽃은 또 툭툭 터지는 옥수수 튀밥 같다. 그래서 아이들은 살구꽃을 옥수수 튀밥꽃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살구꽃이 환하게 피어나면 아이들은 그 살구나무 밑에서 긴 갈래 머리를 나풀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환하게 핀 살구나무는 벚꽃보다 먼저 꽃잎을 날린다. 처음에는 이따금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꽃그늘 아래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면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 - 며칠이 지나면 꽃잎들이 우수수수 떨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머리에 이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어떤 아이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떨어지는 꽃잎을 입으로 받아먹기도 한다. 사사사사사 피던 살구꽃이 바람이 불어 우수수수 지면 교실까지 꽃잎들이 붕붕 날아들었다. 공부하는 아이들 책상 위로 꽃잎이 날아와 앉으면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살구나무를 바라보았다.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하얗게 날아다녔다. 살구꽃이 피면 나는 살구나무 꽃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놀았다. 어느 해에는 예쁜 여선생이 새로 왔는데, 둘이 친해져서 나는 꽃그늘에 앉아 그 여선생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아이들이 내 편지를 가지고 그 여선생을 향해 뛰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봄이어요./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숨막혀요./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내 몸은 지금 떨려요./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이러다가는 나도 몰래/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싫어요./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꽃 피기 전에 올 수 없다면/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꽃 피어나지요.//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제 생각에 머무셔요./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 시집 <그리운 꽃편지>, ‘그리운 꽃편지’ 전문, 김용택 지음
어느 해 나는 그 여선생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그렇다고 그 여선생을 사랑한 건 아니고, 그 때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 것이다. 살구꽃이 지고 나면 새잎이 피고 살구들이 열렸다. 살구가 어른들 엄지손가락 첫째 마디만큼 커지면 아이들이 살구를 따먹기 위해 살구나무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풋살구도 아이들에게는 군것질이 되던 시절이었다. 살구가 커가며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밤낮으로 극성을 부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학교 밑 마을에 있는 아이들이 밤에 학교로 와서 살구를 따 먹었고, 조금만 방심하면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돌멩이나 나무막대기를 던져 살구를 땄다. 살구나무 밑에는 늘 작은 돌멩이에 맞은 이파리들이 널려 있었다. 너무 심하게 살구나무에 돌멩이를 던지다 선생님들에게 들키면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손들고 서 있게 했다. - 나는 미술 시간에 살구나무 아래 손들고 있는 아이들을 그리게 했다. 그렇게 저렇게 선생님들이 살구를 지켜 살구가 완전히 익으면 살구나무 밑에 넓은 포장을 깔고 선생님들이 살구를 털어 각 반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 때 우리 학교 학급수가 열두 학급이었는데, 한 반에 양동이로 한 양동이씩 나누어 주고도 살구가 남을 정도였다. 열매가 열리는 모든 나무가 다 그러하듯이 살구나무도 해걸이를 했다. 올해 살구가 많이 열리면 내년에는 살구가 적게 열렸다. 적게 열린 해에는 살구가 아주 컸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선생이 되어서까지 그 살구나무를 보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살구나무가 꽃을 적게 피우기 시작하더니, 내가 선생을 그만 둔 2008년에는 셀 수 있을 정도로 꽃이 적게 피었다. 살구나무가 늙어 버린 것이다. 살구가 익어 노랗게 떨어져 있어도 아이들은 이제 살구를 먹지 않았다. 땅에 떨어져 노랗게 썩어가는 살구를 볼 때마다 나는 옛날 생각이 나 눈시울이 더워질 때도 있었다. 학교를 그만 둔 그 이듬해 내가 학교에 갔을 때에는 살구나무가 없었다. 늙어, 베어버린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나는 살구나무를 되돌아다 보았었다. 그와 함께 살아 온 40여 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것이다. ‘살구나무’라는 시는 내가 학교를 그만 두기 전에 쓴 시다. 학교 앞을 지나던 어떤 모르는 여자가 학교로 들어와 꽃이 피는 살구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더운지 윗옷을 벗고 있었다. 하얀 팔이 보였다. 옛날 내가 편지를 썼던, 하늘거리는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살구나무 아래를 지나던 그 여선생이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다.
출처: 국민은행 KB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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