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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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최근 11번째 시집「여행」을 내고 올해 등단 4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의 말이다. 40년 동안 쓴 자신의 시 가운데 가장 소중히 여기며 늘 가슴 속에 담고 다니는 시가 시인이 50세 무렵에 쓴 ‘산산조각’이라고 한다. 룸비니 동산은 싯다르타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네팔 남동부에 위치해 있는데 시인은 그곳에 여행을 가서 기념으로 부처님 조각상을 하나 사왔나 보다. 그런데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 깨트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서랍에 넣어둔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이려고 할 때 불쑥 부처님 말씀이 생각났고, 그 지점에서 이 시가 태어났던 것이다.
법정스님은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깨진 종일지라도 종소리를 울리는 한 종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못난 그대로 나 자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의 희망과 꿈을 종에 비유한다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나 좌절로 그 종은 수시로 깨어졌고 깨어지고 있고 또 깨어질 것이다. 종이 깨져 조각날 때마다 끝장이라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다. 그런데 금이 가고 깨어진 종을 종매로 치면 깨진 종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깨진 종의 파편을 치면 종의 형체는 산산조각 났을망정 그 조각조각에서 작지만 나름의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깨어진 종이든 산산조각난 종이든 종이 지닌 본래의 속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꿈이 산산조각나고 삶 자체가 파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각 난 절망의 파편을 꿰맞추어 다시 꿈을 복원시킬 수도 있겠지만, 조각난 꿈의 파편을 수습하여 새로운 삶을 부여안기도 하는 것이다. 절망과 남루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어도 좋을 일이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말씀을 평생 가슴에 품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꺼내보며 위로와 용기의 거울로 삼았다고 한다.
삶에서 불행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산산조각 난 절망적 상황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건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나를 이끈다. 솔직히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썩 빼어난 작품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이 한 편의 시가 삶의 지침이 되고 위안이 되고 다시 살아가는 힘을 준다면, 어찌 늙을 것이며 누구에겐들 좋은 시라 아니할 수 있으랴.
권순진
영화 '길'(La Strada) 중에서 젤소미나(Gelsom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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