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sosoart 2013. 10. 28. 10:14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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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올 때마다 나는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헙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우정이며 현대의 정서며 그런 것들이 뒷날 내 노트에 담겨져 시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시는 너무나 불우한 메타포의 단편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소리 빛날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우어줄 것인가.'

 

 이는 1957년작 ‘폭포’의 시작메모로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의 간절한 평화 염원 메시지다. 일제 말기 동생이 학병으로 징집되는 속에서도 만주에서 연극을 했던 사람이 김수영이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의관의 통역을 하며 거즈를 개키던 사람이 김수영이었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기다리던 여인에게 바람을 맞자 술을 진탕 마시고 완전 뻗었던 사람이 김수영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쪼잔함’에 스스로 화가 나있다.

 

 현실에 분개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비애, 자조, 궁색함이 낭자하다. 이건 확실히 자기반성이나 성찰의 태도와는 다르다. 멈칫멈칫 우물쭈물하다가,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다가 결국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탄식으로 마무리한다. 48년 전 김수영이 그랬듯이 불운한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시대를 우울하게 살아간다. 불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뻣뻣한 내 뒷목덜미가 다시 댕겨온다.

 

 

권순진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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