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시집『뿌리에게』(창비,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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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책가방을 짊어지고 다닐 때부터 왜 입동이 양력으로 11월에 있으며, 입춘이 2월에 소속되어야 하는가를 의심했지만 누군가에게 제대로 물어본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렸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나라라는 사실과 함께 일년 열두 달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고 믿은 까닭이다. 3,4,5월은 봄, 가을은 9,10,11월이라 철석같이 믿었고 왼 손에 들었던 책가방을 놓을 때 까지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의 체온에 스치는 바람의 온도와 햇살의 농도를 잣대로 그 주관적 기준을 말하자면 때로는 9월도 여름이고 11월도 겨울이었던 해가 다반사였음을 체득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땅의 가장 큰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였던 '사계절이 뚜렷하다'란 말이 두루뭉실해져 대체로 봄은 여름 보다 짧았고, 겨울은 가을 보다 더 길었던 세월을 견디며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예 나희덕 시인의 말처럼 11월은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이라 하는 편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황지우 시인도 '11월엔 생이 마구 가렵다'고 했다. 11월의 나무 역시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있다고 했다.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나는 마당에 우리의 생도 가렵지 않을 리 없겠지만, 저 나무처럼 '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눈물 흘리며 감사'하면서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로 초롱했던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앙상한 나무들의 직립처럼 느껴지는 도끼의 달인 11월의 진입을 코 앞에 두고 시월의 마지막 밤을 유난스레 애닮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아이의 손처럼, 이별을 앞두고 맞잡은 연인의 손처럼 그렇게 가을은 깊고 진해지다 어느 순간 손을 탁 놓아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임을 잘 알기 때문이기에 말이다. 11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문득 생각나는 계절이다.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만으로 건너가야할 가을과 겨울 사이다. 내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래서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지, 추정 대차대조표는 난색이다.
11월엔 상여금을 챙겨주는 회사도 없고 나무는 실과의 단맛을 덤으로 주지도 않는다. 수학능력시험이다 뭐다 해서 삶의 한파를 예비하는 시련을 안겨주고, 우리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김장을 서두른다. 그리고 견뎌야할 게 계절만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길게 지속되었지만 비틀린 모가지는 바로 펴지질 않는다. 새벽과 봄날은 꼭 와야하고, 또 올테지만 '겨울을 이길만한 눈동자'의 수정체가 가장 빛나야할 시기에 그 빛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권순진
Memory Harbour - Alison 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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