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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이선영- 윤영문(Ted Yoon) / 잠재성과 실재성 사이의 공명

sosoart 2013. 12. 26. 22:45

윤영문(Ted Yoon) / 잠재성과 실재성 사이의 공명

이선영

잠재성과 실재성 사이의 공명

  

이선영(미술평론가)

     

닻과 부표 등을 형상화한 윤영문(Ted Yoon)의 작품들은 항해와 정박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원한 정주가 아니라, 임시정박--‘Temporal Anchorage’(전시부제)--이다. 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건축을 전공하다가 도자예술로 진로를 바꾼 후, 본격적으로 한국의 도자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 온 젊은 작가에게 정처 없이 떠도는 이미지는 우선 희망으로 다가오지만, 그 희망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임시정박’이란 과도기에 놓여 있는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며, 부표에 고치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마지막 방의 작품은 미지의 변신에 대한 희망 반, 불안 반의 심리가 투사되고 있다. 3개의 섹션으로 나뉜 전시장은 닻과 부표, 그리고 고치 이미지로 구별된다. 그 세 가지 소재들은 모두 기(器)에 바탕을 두는 도자예술과 교차되는 형상이다. 이 ‘그릇’을 통해 희망이 담겨지고 나누어지고, 숙성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의 무게], [수정된 희망], [임시정박] 등으로 제목이 붙여진,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닻은 화려한 색의 마블링과 돌기들로 뒤덮여 있다. 닻이지만 하나의 기능이나 형태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의 닻에서 색은 섞이고 형태는 자라난다. 정박을 위한 묵직한 닻은 새의 깃털을 암시하는 돌기들에 의해 반전된다. 돌기가 없는 원래 형태의 닻에 가까운 묵직한 작품은 비상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룬다. 2011년경 닻의 이미지가 그의 작품 목록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캐스팅 기법으로 제작되어 닻의 본래 기능이 배반된 형태였다. 정박에의 욕망은 있지만 그것은 현재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고정되어 있으면서 떠있는 부표 또한 양면적이다. 부표는 망망대해의 항해자들에게 기준이 되어 주지만, 명실상부한 건축적 구조를 갖춘 등대와 달리 임시적인 장치이다. 그것은 명확한 좌표계 속에 자리하면서 강한 빛을 발산하기 보다는,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빛나는 촛불 같다. 그것이 만약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아주 소박한 차원이다. 

 


[수정된 희망]

 

그것은 날개로 변신중인 닻보다도 더욱 임시적으로 보인다. 닻에서 부표로의 변화는 더욱 임시적인 실존을 반영한다. 부표들은 그물망 여기저기에 엮여 있다. 떠있기 보다는 옴짝달싹 못하는 애매한 상태로 보인다. 그것들은 자신의 역할을 십분 발휘하기 보다는 억류되고 방치된 상태를 암시한다. 닻으로 대변되는 정주에의 희망은 꺼진 촛불 같은 부표들로 인해 불확실함으로 반전된다. [포착]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부표가 희망을 상징한다면, 그물망에 끼워진 부표들은 희망을 포획하고 싶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방에 웅크리고 있는 것들은 고치의 이미지이다. [갖춘 탈바꿈](Complete Metamorphosis)이라는 제목에는 변신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다. 그것들은 부표와 형태가 비슷하지만 비스듬히 또는 수평으로 설치된 나무 거치대 위에 언제일지 모를 부화를 기다린다. 희망이 있는 저편으로의 항해라는 공간적 이미지는 시간 화 된다. 고치는 미지의 시간을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또한 앞서 배치된 닻이나 부표처럼 임시적이고 잠재적이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희망이고, 그만큼의 불안이다. 관객이 앞뒤로 뚫린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부표/고치에는 정중동(靜中動)의 이미지가 있다. 고치는 겉으로 보면 움직이지 있지만, 그 내부에서는 계통 발생적 진화과정을 개체의 차원에서 되풀이한다. 비스듬히 놓인 나무 막대기에 붙어있는 고치는 잠재성이 현실화되기까지 통과해야할 불안정한 환경을 암시하는 듯하다. 윤영문이 거쳐 온, 건축에서 도자로의 전향 과정 자체가 불안정한 여정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까지 건너와 살펴본 도자 분야 역시, 그자체로 희망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 오면 한국의 전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을 것이다. ‘그릇 만들기’와 ‘예술 하기’로 양분된 한국의 도예계는 흙과 불을 다루는 원초적 예술로서의 도자가 아닌, 파편화된 분업 시스템의 일단일 뿐이다. 

 

전통의 문제는 더욱 심란하다. 종전 후 완전히 제로로부터 시작한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고 얼마 전부터 관심을 쏟았을 전통 예술은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도 찾아내야 하는 미지의 가치일 뿐이다. 전통에 대한 관심조차도 문화상품 내지 관광산업의 일환으로 전락해 가는 경향이 있다. 전통이나 기능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서, 도자로 ‘예술 하기’ 또한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현대미술의 어법을 도자예술의 버전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충분치 않은 것이다. 그것은 실험적 현대미술이 일련의 정제된 기술을 통해 장식화 되는 것만큼이나 무가치하다. 물론 이러한 현실적 취약함은 희망으로 반전될 수 있다.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누구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몸과 직접 상호작용하는 흙이라는 매체의 솔직함이 좋다는 작가는, 현실의 벽에서 실망을 할 때 마다 흙을 처음 만졌을 때의 경이로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포착](부분)

 

자전거를 직접 만들어 타고 다닐 정도로 자전거 광이기도 한 그는 몸과 직접 상호작용하는 원초적 질료에 아직도 매료되어 있다. 그 미지의 가능성을 그가 믿고 있다는 것이 이 전시가 말하는 희망의 내용이다. 밟은 페달만큼 달려주는 자전거로 두루 국내 여행을 하면서 발견한 한국 고건축의 소재 역시 작품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대립], [관찰자], [번뇌], [탈피], [비상], [부러진 날개]같은 이전작품에서, 일종의 모듈같이 이런 저런 조합을 이루는 은유적 형태는 고건축의 지붕 장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전통이고 현대이고 간에 그것이 진정 희망할만한 귀중한 가치라면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것이다. 재현이 아니라 생성이다. 생성을 통해 동일성은 차이로 도약하며, 주체는 사건화 된다. 재현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꾀했던 현대의 철학자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재현의 보수적 질서와 창조적 무질서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강조한 바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재현 앞에서는 차이를 통해 긍정된 세계는 달아나기 마련이다. 재현은 단 하나의 중심만을 지닌다. 반면 운동은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한다. 

 

닻과 부표를 거쳐 마지막 단계에 ‘임시 정박’ 중인 고치의 이미지에는 발생과 변형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러나 현대는 시스템의 사회이다. PC나 인터넷을 넘어, 손안의 인터넷 시대가 개막된 후 환원주의의 흐름은 더욱 거세졌다. 모든 것이 매뉴얼 화 되고 조목조목 자본화되며, 그 안에 포섭되지 못(안)하면 존재 자체가 불확실해진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버전으로 확대되고 있는 또 다른 전체주의를 보다 민감하게 느낀다. 모험적인 사업가들 뿐 아니라, 예술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불확실성의 영역은 기성의 코드가 복제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코드가 생성되는 영역이다. 새로움은 계의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만들어진다. 바깥은 단순히 소외나 박탈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가 아닌 미지의 곳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떠나는 이들에게 유토피아 같은 희망의 지형학이다. 희망의 유토피아는 미지의 것을 사랑하는 예술가와 친숙하다. 자신의 시대와 불화하였던 예술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 세상의 지도가 유토피아라는 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지도를 들여다볼 가치란 전혀 없다’고 외친 바 있다. 

 

아늑한 안쪽에만 정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창조된 것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생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작가라는 존재는 계속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없음은 안주이자 포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함을 또 다른 가능성으로 전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이들은 많지 않다. 윤영문이 먼저 선택했던 건축은 시스템의 총화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가 6년 전에 처음 흙을 만지게 되었을 때, 구조에서 발생으로 관심이 옮겨가게 된다. 신이 흙을 빗어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을 때 창조주는 건축가이기 보다는 도예가라는 모델에 가까웠다. 발생된 것은 구조로 고착되기 마련이지만, 예술은 늘 발생기의 그 신선함을 되찾으려 한다. 태초의 그 신선한 기운으로의 복귀는 예술 뿐 아니라 종교적 제의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몸과 마주하며 상호작용하는 흙은 원초적 질료로서, 그 무엇으로도 빗어질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다. 그것이 가마에 들어가 단단하게 고정되는 순간에 조차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몇 퍼센트의 불확실성이 남아있다. 

 

 

[갖춘 탈바꿈]

 

윤영문의 작품에서 새로 변신하려는 닻, 포획되려는 부표, 근본적인 탈바꿈을 꿈꾸는 고치의 이미지에서 불확실성의 몫은 중요하다. 그것은 현실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을 말한다. 들뢰즈는 예술작품이 어떤 잠재성 안에 잠겨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잠재적인 것 안의 차이와 반복은 현실화의 운동, 창조로서의 분화의 운동을 근거 짓는다.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와 비율적 관계들은 현실적이지 않고 잠재적이다.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되는 잠재적인 것은 그자체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윤영문의 작품들은 현실적이기 보다는 잠재적인 것에 호소한다. 여기에서 흙이라는 매체는 변화무쌍한 형태를 잠재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한에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특히 거칠고 묵직하게 만들어진 고치 형상에서 잠재성과 실재성은 공존, 공명한다. 

 

잠재적인 것은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이러한 분화가 바로 창조이다. 화이트헤드가 [실재와 과정]에서 말하듯이, 자연이란 결코 완결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 간다. 이것이 자연의 창조적 전진이다. 거친 외관을 가진 고치들은 ‘야생의 존재 속에서 사실들과 본질들은 분화되지 못한 채 들어 있다’(메를로-퐁티) 물론 현실적 상태는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할 수 있다. 항해의 이미지에서 시작된 방이 고치의 이미지로 마무리되는 전시의 역행적 동선 자체가 그것을 말한다. 어떤 괴물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고치들은 에이리언 알(卵)처럼 웅크리고 있으며, 관객이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 나 있다. 부표들을 꿰는 구멍처럼 이편에 하나 저편에 하나가 뚫려 있다. 뱃속에 칠 흙 같은 우주를 품고 있는 듯한 형상에서, 저편의 구멍으로 무엇이 생성될 것이지는 확언할 수 없다. 이 어둑한 구멍의 공간 속에서 질서의 근원이 되는 카오스가 메아리처럼 회오리친다. 이 캄캄한 허공에서 모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현대의 우주론이 말하듯이 둥글게 굽은 우주의 지형학에서 ‘공간의 둘레들은 무한한 허공 자체’(막스 야머)이다. 막스 야머는 [공간개념]에서, 혼돈(chaos)의 그리스어 어근에 ‘하품’과 ‘벌린 입의 쩍 벌어진 틈’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밝히는데, 그것과 카오스에 내재된 놀라움과 두려움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임시정박’ 전의 주제인 희망 또한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다. 희망은 날개이지만 동시에 무게이고, 변모는 진보일 수도 죽음에 가까운 퇴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궁 같은 최초의 집이기도 한 기(器)의 둥근 형태는 삶과 죽음 같은 서로 반대되는 범주를 하나의 차원으로 연결한다. 둥그스름한 기의 형태를 순환하는 듯한 잠재적 움직임은 동양의 윤회 사상을 떠오르게 한다. 화이트 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서아시아-유럽의 사상과 인도-중국의 사상 기조를 대조하면서, 후자 쪽에서는 과정을 궁극자로 보는데, 전자 쪽에서는 사실을 궁극자로 본다고 지적 한 바 있다. 단단한 토대에 근거하며 초월을 향하는 건축에 서양의 이미지가 확연하다면, 현실적 존재를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도자에는 동양의 이미지가 확연하다. 

 


(참고도판) [threshold]

 

물론 구조와 발생이 서로 의존하는 개념인 만큼, 윤영문에 있어서도 건축과 도자는 서로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유닛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형상화한 이전 작품 [threshold]에서 그 관계는 확연하다. 청계천을 모델로 한 그 작품 역시 계획도시의 면모가 아닌, 생성소멸의 측면을 강조했었다. 사실, 위대한 장식예술의 시대에 건축과 장식은 하나였다. 이곳과 저곳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령 윤영문을 여기로 되돌아오게 한 동인이 되었을 그 ‘동양’은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완벽한 정박지가 될 수 없다. 이때 공간은 시간의 범주로 이동한다. 희망은 어딘가로 가야할 공간이기 보다는 기다림에 의해 도래하는 시간이 된다. 항해로 출발한 마지막 방에서 잠재성으로 충만한 고치의 이미지에서 윤회(metempsychosis)는 변태(metamorphosis)와 중첩된다. 거기에는 위상으로부터 위상으로의 성장이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삶과 죽음, 움직임과 정지는 펼침과 접힘 같이 한 과정의 두 면모로 나타난다. 그것은 삶과 죽음 중의 한 국면이 아니라, ‘다양한 변형이나 변태를 겪는 영속하는 살아있는 신체’(라이프니츠)이다. 희망을 향한 항해 역시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출전;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