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 LIBRARY/미술- 이론·비평·컬럼·작가

조선시대의 회화와 조각/ 이현경

sosoart 2014. 1. 10. 11:10

학술 

(73) 조선시대의 회화와 조각

이현경


우리의 미술사를 되돌아볼 때, 조선시대의 미술은 고대와 근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많은 유물로 한국미술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최소 100년에서 많게는 600여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미술은 미적인 감상의 대상뿐 아니라 조선의 역사적 현상을 담보하는 사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한국미술사학회는 지난 12월 7일(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191회 월례연구발표회를 했다. 이날 발표는 특히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산수화, 기로회도와 같은 회화와 무석인과 탑 내 불상 등 조각을 살피면서 이들 작품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성을 통해 당시의 동아시아적 관계를 추적하고 전후대의 조형적 영향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늘 그랬지만, 다양한 역사적 현상과 얽혀있는 이 날의 발표 작품들이 미술사의 시각에서 정치하게 풀려가며 그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정지인(홍익대) 씨는 ‘왕원기(王原祁, 1642-1715)의 산수화 연구’에서 독창적인 방작(倣作)의 세계를 선보인 왕원기의 생애와 화풍을 살펴보았다. 청대 강희제의 총애를 받으며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던 왕원기는 사왕(四王: 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 중의 막내로 그의 할아버지였던 왕시민의 기법을 전수받았다.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장의 작품들을 실견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했던 왕원기는 옛 화가의 그림을 본뜰 때, 기존처럼 한 사람의 화풍만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두 사람 이상의 화풍을 조합하여 보다 개성 넘치는 방작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정통파 화가였던 왕원기는 물론 동기창의 남종화론을 이어받아 동원과 거연의 화풍을 흡수하고, 원말 사대가(황공망·왕몽·예찬·오진)의 표현구도를 충실히 따르며, 특히 황공망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러한 문인화의 전통 아래서도 특히 채색을 강조하여 화가의 역량에 따라 방작도 창의적 형태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화풍은 그의 제자들인 누동파(婁東派)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 누동파의 화풍이 조선말기 화단에 유입되어 김정희와 신위 등에 의해 왕원기의 화풍이 조선에 전파되었다.

오민주(고려대) 씨는 ‘조선시대 기로회(耆老會)의 전통과 기로회도(耆老會圖)의 회화사적 의의’에서 조선시대 덕망이 높은 노인들이 모임을 열고 이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인 기로회도의 성립 배경과 제작 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폈다. 조선시대에는 장수하는 것이 최고의 복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60세의 노인을 기(耆)로, 70세의 노인을 로(老)로 지칭하여 그 장수를 기렸다. 기로회에 참석하는 일은 흔치 않을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는 기로회도는 참여인원수에 따라 제작되었고, 소실의 염려 때문에 여분을 만들고, 대부분 전문 화사를 초청하여 그렸다. 발표자는 기로회도는 우선 기록적인 목적을 가지지만 전문 화가의 손을 통해 탄생하고, 공적이고 사적인 기로회를 통해 많은 수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당대의 회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였다.

조영서(국립고궁박물관) 씨는 ‘조선전기 왕릉(王陵) 무석인(武石人) 연구’에서 조선 왕릉의 석물(石物)의 하나로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무인(武人)의 모습으로 왕릉의 가장 바깥에 위치한 무석인에 대해 알아보았다. 비교적 제작 시기가 확실하여 미술사적 의의가 높은 무석인은 조선 개국 시 고려 왕릉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의갑석인(衣甲石人)으로 불리다가, 예제(禮制)의 정비 이후 무석인으로 정착되었다. 발표자를 따르면 한 쌍을 배치하고 수염으로 노소(老少)를 구분하는 것은 남송대의 제후릉에서 연원하며, 어깨에 짐승 얼굴의 견갑을 착용하거나 포두(袍頭)의 구름무늬는 고려의 불교식 표현에 연원한다. 특히 조선전기에는 상장례에서 사후명복에 대한 예법이 유교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종교적 기능을 불교식으로 보완하였기에 무덤을 수호하는 왕릉의 무석인은 같은 수호의 역할을 하는 불교의 신장상(神將像)의 조형 형식을 빌려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분희(불교중앙박물관) 씨는 ‘조선 15세기 탑 내 봉안 불상 고찰’에서 유독 15세기에 많이 제작되어 탑 안에 봉안되었던 불상들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어느 곳에서 발견되었는지 출처가 확실하므로 기존의 공예사적 입장이 아닌 미술사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우선 탑에 불상을 봉안했던 이유는 선종계열의 경전에 근거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탑묘(塔廟)의 묘(廟)가 모양이라는 모(模)와 상통하며 이 모양은 곧 부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5세기에는 수복장생(壽福長生)이나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바라는 아미타 신앙에 의해 이렇게 탑 안에 불상을 안치하는 것이 유행하였고 귀천에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이 불상을 봉안하는데 참여하였기에 미술사적으로도 뛰어난 불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다.

 

출처: 서울아트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