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대(竹) / 임 보

sosoart 2014. 5. 17. 23:47

 

 

 

대(竹) / 임 보

 

 

누에가 그 맑은 몸으로

은사의 가는 실을 뽑아내듯

대는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다

 

그것을 못 믿겠거든

달이 밝은 밤 잠시

대밭에 나가 홀로 서 있어 보시라

 

아가의 손 같은 작은 댓잎들이

서로가 서로를 어루만지며

흰 달빛에 맑은 바람을 걸어

얼마나 신묘한 소리를 짜내는지

 

그래도 못 믿겠거든

저 단소나 대금의 가락을 들어보시라

대의 몸에서 풀려나온

영롱한 소리의 실에

그대의 귀가 깊이 묶이지 않던가?

 

대가 몸을 그렇게 비운 것은

한평생 자신의 빚은 소리의 실타래를

그 속에 담아 두기 위함이다

 

- 시집『자운영꽃밭』(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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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도가 과일이 아닌 야채이듯 대도 나무가 아니라 외떡잎식물인 풀이다. 그래서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비어있고, 그 빈 몸이 울림통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윤선도의 <오우가>에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라고 했는데, 식물학적으로는 여러해살이풀로 야자 등과 함께 ‘특수 풀’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사군자의 하나인 대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그래서 ‘대쪽같은 사람’이란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군자의 행실에 비유된다.

 

 하지만 ‘대’는 ‘모순의 식물’이기도 하다. 대의 곧은 속성도 인정하지만 대쪽에다 칼을 대어보면 이내 짝 갈라지는 성질이 끈기와 인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구나 살살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을 보면 대는 강직보다는 오히려 유연함이 그의 천성에 가깝다. 또한 속빈 대에서 선비의 겸허를 말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죽순의 고속성장에서 욕심이 읽혀지기도 한다. 대가 속을 비운 건 성장의 빠른 속성 탓에 미처 속을 채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빈속의 약함을 견디기 위해 도중에 마디를 만들게 된다. 겸허나 무욕이 아니라 성급함과 욕망의 식물일 수도 있는 근거인데, 임보 시인은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시인은 어린 시절을 전라도 곡성 초가삼간에서 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온통 대숲으로 가득했던 집에서 여름 한철은 시원하게 지냈지만 겨울엔 종일 볕이 들지 않아 오들오들 떨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대는 확실히 청량감을 주는 식물이다.

 

 지난 일요일 담양 ‘죽녹원의 빽빽한 대숲 속을 걷는 동안 머리가 맑아지고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체험했었다. 대자리나 죽부인에서도 그리 쓰이지만 참으로 삽상한 청량감이었다. 실제로 죽림욕은 산림욕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대숲에서 뿜어 나오는 음이온은 혈액을 맑게 하고 저항력도 증가시키며, 공기 정화능력도 탁월하다고 한다. 또한 대숲은 밖의 온도보다 4~7도 정도 낮다고 하는데 이는 산소 발생량이 높기 때문이다.

 

 그 청량감은 대숲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에서도 발원한다.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어우르며 서걱대는 댓잎 소리, 단소나 대금의 가락에서 풀려나온 영롱한 소리에 ‘귀가 깊이 묶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 속을 통째로 비운 속뜻을 잘 알 수는 없으나 가끔 도심의 골목길 점집 앞을 지날 때 감지되는 신묘함도 같은 통속이리라. 숨이 멎는 순간까지 제일 늦게 닫힌다는 귀를 열어 세상의 울음 다 듣고 5월 죽순이 마구 올라오는 소리까지 마저 들어야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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