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樂茶軒-문화와 예술/詩가 있는 뜨락

[스크랩] 비의 냄새 끝에는/ 이재무

sosoart 2014. 6. 21. 22:59

 

 

 

비의 냄새 끝에는/ 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夏至)의 여자

 

- 시집『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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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즈음엔 아스팔트를 콕콕 쪼아대는 소나기가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낮이 길어지고 양의 기운이 뻗치기 시작하는 여름날엔 시원한 빗소리로 양양거리는 햇살의 돛대를 잠시 꺾어보는 것이다. 비바람에 밤꽃이 후두둑 무더기로 떨어진들 어쩔 것이며 창문이 흔들린들 무슨 대수랴. 옷이 젖고 신발에 물이 들어오고 일이 더뎌지고 약속이 뒤로 미뤄지고 구경을 좀 망친다 해도 무식하게 쏟아붓는 장마가 아니라면 여름비는 반가워라.

 

 우산을 받쳐 들고 혼자 걸을 때 ‘우산 같이 좀 쓰도 될까요?’ 샴푸 광고에 나오는 묘령, 그 찰랑거리는 여인의 머리가 불쑥 우산 속으로 들어오는 극적인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즐거움은 어떤가.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희박한 개연성에 묶일 필요는 없다. 여름비는 이미 그 자체로 매력적이고도 또렷한 냄새들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다만 후감각을 확장시켜 그걸 끌어내기만 하면 된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감자수제비를 끓이고 멸치국물에 섞인 정구지 냄새, 나는 절반 쯤 감은 눈으로 콧구멍만 벌렁이면 그만이다.

 

 촉수 낮은 등 때문에 늘 어두침침했던 부엌과 그곳의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이고, 어머니가 몰고 다니는 냄새가 먼저 당도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끙, 이윽고 낮술이 그리워진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복식호흡을 한다. 바람결에 빗방울 튀어 살갗이 간지럽다. 질주하는 차의 물살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라,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멎었다. 어디선가 밤꽃 냄새가 폭풍 흡입된다. 

 

 그런데 이건 과부를 잠 못 들게 한다는 비릿한 남자의 거시기 냄새 아닌가. 얄궂어라,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자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가 오다니. 와서는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고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깨물었다 뱉고서 홀연히 사라지다니. 결국 ‘비의 냄새 끝’ 마지막으로 당도한 것이 또 그때 그 사람, 하지(夏至)의 여자란 말인가. 하지만 오늘은 길도 짧도 않은 낮과 밤, 소나기가 없다면 극적인 사건도 치열한 갈등도 없으리라. 아트사커의 함성으로 여는 아침, 기어이 감수성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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