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 시집『옛 애인의 집』(솔,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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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길 위에서 만난 숱한 사람 가운데서도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내는 대상이 시장 사람들이다. 장날 장바닥에서의 인정과 흥정 사이에 오가는 낯익은 사투리들은 언제 들어도 정겹다. 그걸 주워 다듬지 않고 탈탈 털어 그대로 시로 엮는다 해도 시래기 국 같은 시가 한 편 되겠다. ‘겁나게와 잉 사이’도 지리산 자락에 ‘독거’(지금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 살기 때문에 독거라 할 수 없겠지만)하는 시인이 그런 날것들을 주워 잘 말려 끓인 한 사발 구수하고 뜨끈한 국과 같은 시다.
전라도 사투리는 대체로 ‘허벌나다.’ ‘으매 이게 누구여 권 선상 아니다요 겁나게 방갑소잉’ 동행한 한 여인에게는 '나짝이 쪼까 반반허요' 입담 좋은 다른 한 친구에게는 ‘주댕이가 허벌라게 양글구만이라이’ 십여 년 전 일인데 그때만 해도 ‘겁나게’의 속뜻을 몰랐고, ‘겁나게와 잉 사이에’ 무엇이 날아다니는 줄은 더욱 알지 못했다. 전라도 말의 ‘겁난다’는 많다는 뜻이다. 많으면 왜 겁날까. 뭐든 많으면 덜컥 겁부터 나는 데엔 모르긴 해도 무슨 역사적 배경이나 속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전라도 곡성이 고향인 작가 공선옥의 어느 글에는 ‘집안에 물건들이 쌓여 가면 겁나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겁나고 내 지갑에 갑자기 많은 돈이 생기면 겁나고....’라는 구절이 있다. 많고 크다고 맥없이 입이 벌어질 일은 아닌 모양이다. 삶의 순간마다 겁나는 일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 생에서 이 ‘겁나게’란 예방주사 같은 말로, 면역되고 감당해야할 무게도 만만찮을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을 통해 민초의 삶이 어루만져지고 헹구어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에도 허공에다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느낌의 어투다. 가만 보니 ‘귀천’에서의 별사인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의 순 전라도 버전이 아닌가. 어쨌거나 짜드라 좋을 것도 없는 생이지만 나도 그렇게 생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세상의 어처구니와 소란이 그 분위기를 돕지 않는 것 같다. 온갖 특혜와 끗발을 다 받고 누리면서 교만하게 살아온 문창극 같은 사람의 구질구질한 '해명'을 아침마다 들어야 하는 세상이 정말 겁나게 싫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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