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듣는 밤/ 최창균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소리
참으로 많은 생을 불러 세우는구나
제 생을 밀어내다 축 늘어져서는
그만 소리하지 않는
저 마른 목의 풀이며 꽃들이 나를
숲이고 들이고 추적추적 세워놓고 있구나
어둠마저 퉁퉁 불어터지도록 세울 것처럼
빗소리 걸어가고 걸어오는 밤
밤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 문 앞까지 머물러서는
빗소리를 세워두는구나
비야, 나도 네 빗소리에 들어
내 마른 삶을 고백하는 소리라고 하면 어떨지 몰라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로나
내 생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떨까 몰라
빗소리에 가만 귀를 세워두고
잠에 들지 못하는 생들이 안부 묻는 밤
비야, 혼자인 비야
너와 나 이렇게 마주하여
생을 단련 받는 소리라고 노래하면 되지 않겠나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마냥 들어주면 되지 않겠나
-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창비,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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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풍경을 차단하는 듯 보이지만 더 많은 풍경을 불러오고 ‘참으로 많은 생을 불러 세운’다. 고향 언덕길이 보이고 찢어진 우산으로 비바람을 막아보려는 힘에 겨운 모습도 흐릿하게 재생된다. 학교 국기 게양대 앞 화단에 막 피기 시작한 백일홍과 분꽃 채송화 봉선화 꽃무리를 격하게 뒤흔든다. 빠르게 시공을 건너뛰어 도회의 네온 불빛 사이로 술 취한 사내가 빗속을 비틀거린다. 강력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부셔 하며 아스팔트 위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빗방울을 본다. ‘빗소리 걸어가고 걸어오는 밤’ 그런 밤에는 잠을 쉬 이루지 못한다. 잠결에도 누에가 뽕잎 뜯어먹는 소리로 귓전이 스산하다.
‘어둠마저 퉁퉁 불어터지도록’ 밤을 관통해 자박자박 내리지만 머지않아 이 비는 그치리라. 오는 것은 가게 마련이고 또 가야한다. 오는 게 가지 않으면 새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양동이로 퍼붓듯 내리는 비도 일단 그치고 나면 그 빗물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만약 그 빗물이 하수구와 개천으로, 그리고 강과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 오는 대로 쌓인다면 세상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사람들은 둥둥 떠다니게 될 것이다. ‘내 마른 삶을 고백’하고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라도 ‘생을 단련 받는 소리라’여기고 토닥이는 그 빗소리에 생각의 관절이 욱신거릴지라도 ‘마냥 들어주면’ 된다. 가지 않는 빗소리는 없으므로.
그런데 정말 비에도 소리가 있을까. 북채로 북을 때렸을 때 그게 북채 소리가 아니듯 어쩌면 빗소리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 아닐까. 나뭇잎과 바람, 가로등과 아스팔트와 양철지붕과의 협연이라고 하면 어떨까. ‘내 생을 연주한다고 하면 어떨까’ 비오는 날 채 걷지 못한 빨래처럼 내 생의 질긴 회한을 흠뻑 다 젖게 내버려둔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맨정신으로 다 듣고 다 젖을 수 없어 술을 한 잔 마셨다. 마침맞게 이웃에 사는 친구가 허름한 술자리에 나를 불러주었다. 요량없이 휴가 떠난 친구들의 안부가 걱정 된다. ‘비 듣는 밤’은 풀벌레도 울지 않았다. 누군가의 울음을 듣느라 자신의 슬픔은 기어이 삼켜버리는 밤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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