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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우의 조각-명상조각, 명상의 관념을 표상한/ 고충환

sosoart 2014. 9. 23. 14:26

박상우 / 명상조각, 명상의 관념을 표상한

고충환

박상우의 조각


명상조각, 명상의 관념을 표상한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보통 조형의 형식논리로 치자면 크게 구상과 추상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추구하는 태도와 철저한 형식논리를 지향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재현의 논리와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제반 형식요소에서 조형의 본질(조각의 경우에는 특히 양감과 질감, 물성과 공간감)을 추구하는 경우로서, 각각 사실주의 내지는 자연주의와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대비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제삼의 경우로서 구상과 추상 사이,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에서 일정한 자기형식을 추구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감각적 닮은꼴의 지평에서 모티브가 될 만한 사물대상을 취하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재현하는 대신, 이를 일정한 형식논리며 추상의 논리로 재해석해 전이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외관상 추상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순수한 추상이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순수한 형식논리의 소산으로서보다는 어떤 알만한 사물대상을 암시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고, 추상의 형식논리 속에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형상을 품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Meditation Center 408, 스테인리스 스틸, 380×1220×600cm

 


박상우의 조각이 그렇다. 작가의 조각은 외관상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미니멀한 형식논리로 풀어낸 추상조각처럼 보인다. 여기에 목재와 석재 그리고 최근에는 스테인리스스틸 소재 고유의 물성을 부각한, 그럼으로써 조각의 본질과 조형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충실한 조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다만 그 뿐인가. 작가의 조각은 다만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과 조각의 본질에서 조각의 됨됨이를 찾은 소위 형식주의와 환원주의의 소산이며 결과인 것인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00처럼 보인다는, 다소간 유보적인 기술에 주목할 일이다. 작가의 조각은 다만 조각의 본질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충실한 번안처럼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소위 모더니즘 세대답게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수용하지만, 그 수용이 전면적이기에는 뭔가 역부족인 면이 있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철저한 형식주의자가 되기에는 뭔가 체질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일정 부분을 수용하면서도 그 수용이 전면적이지는 않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일종의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그리고 이런 이중적인 태도에서 작가의 조각을 특징짓는 일말의 긴장감이 유래한다. 


心鏡 403, 스테인리스 스틸, 270×1000×600cm

 


그렇다면 형식논리와 추상을 자기논리로 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과 함께 작가의 조각을 특징짓는 또 다른 한 축은 무엇인가. 바로 암시와 재현이 그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기하학적 형태소들의 조합 내지는 집합으로 이뤄진 작가의 조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붕이 보이고 처마가 보이고 기둥이 보인다. 계단이 보이고 통로가 보이고 관문이 보인다. 창이 보이고 제단이 보이고 집이 보인다. 여기서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를 호출해보면 문제는 뚜렷해진다. 바로, 명상이 그것이다. 여기서 명상 자체는 관념적인 대상이며,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고 비형상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를 형상으로 옮기기 위해선 일정한 미학적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표상이 그것이다. 해서, 작가의 작업은 이런 명상의 관념을 형상으로 옮긴 표상이며, 명상의 비형상을 형상으로 옮긴 표상이다. 명상의 표상이며, 명상의 공간 내지 명상을 위한 공간을 표상한다는 말이다. 제단과 사당, 기념비 내지는 기념관을 떠올리게 하는, 다소간 건축적인 구조가 두드러져 보이는 조형을 매개로 명상의 관념을 표상한 것이면서, 일종의 명상 센터를 구조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실제로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조형은 명상센터를 축도한 건축모형을 닮았다). 


그 구조는 한눈에도 중앙집중식 구도가 강하고, 좌우대칭 구도가 두드러져 보인다. 군더더기가 없는 최소한의 형식과 함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이 형태는 정신에 집중하고 명상에 매진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형태로 옮긴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아이콘에서 그리고 기념비 내지는 기념관에서 그 선례를 볼 수 있다. 정면성의 법칙 역시 이 기획과 무관하지가 않은데, 마치 일종의 사물 초상화를 찍듯 사물대상의 됨됨이를 정면에 집중시키고 중앙에 집중시켜 시선을 모으고 정신을 하나로 흐르게 하는 것. 이 구도며 기획 모두는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이고 비형상적인 명상의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찾아낸 것으로서,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층위로 불러내는 것에서 예술의 존재의미를 찾는 전통적인 미학적 입장이며 태도(특히 폴 클레)와도 통한다. 


이제 그 세부를 들여다보자. 먼저, 집 형상은 명상의 몸이며 정체성의 산실이다. 작가의 주제의식인 명상의 관념을 낳은 산실로 보면 되겠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그 산실에는 계단이 있고 기둥이 있다. 아님, 그 변형되고 변주된 형태가 있다. 여기서 계단은 상승이며 승화를 상징하고, 기둥은 명상의 좌표며 푯대를 상징한다. 기둥 위에 새가 앉아있는 솟대의 전통적인 도상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계단은 알다시피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게 해주는 이행을 암시하며, 기둥은 이곳과 저곳을 연이어주는 경계를 함축한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행하면서, 성속을 아님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나지게 하는 것. 


여기서 계단과 기둥으로 상징되는 이행과 경계의 관념 내지는 실천논리에 주목할 일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예술가는 무당이었고, 경계를 주관하는 자였고, 매개자이며 중재자였다. 조형예술의 상당한 부분들이 이런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과의 관계며 경계며 매개와 관련되는 것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은 작가의 조형 속에도 그대로 투사되고 있는 것. 그리고 여기에 문의 도상이 호출된다. 이행하기 위해선 관문이 있어야 하고 통로가 있어야 한다. 바로 존재가 거듭나는 것을 상징하고, 전통적인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여기서 명상의 본질과 만나진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존재가 거듭나지는 것이다. 존재는 어떻게 거듭나지는가. 내가 깨어지는 것이다. 헌 나를 벗고 새 나를 덧입는 것이다. 바로, 내 속에서, 나의 내면으로부터 의식이 깨지면서 재생되는, 일종의 의식의 유목이 일어나는 것이다. 


心鏡 402, 검정 화강암, 350×600×820cm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명상을 표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행과 유목으로 하여금 명상의 관념을 지지하고 보충하게 한다. 이행과 유목 자체를 명상에 부수되는 개념으로 봐도 되겠다. 여기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땅에서 하늘로, 감각적인 세계에서 관념적인 세계로, 속에서 성으로 이행하게 해주는 이 모든 일들은 다만 의식 속에서의 일이며, 작가의 조형은 바로 그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집(일종의 명상센터)이라는 고정된 형태 속에 표상해 들인다. 작가의 조형은 말하자면 명상을 표상하고, 존재가 거듭나지는 내면의 계기를 표상하고, 세계가 재생되는 의식의 유목을 표상한다. 


그리고 그렇게 물과 빛의 도상학이 호출된다. 의식은 물처럼 흐르고, 빛처럼 편재한다. 작가의 조형 중 특히 평면조형에서 빛은 중앙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파장이며 방사의 형태로 나타나고, 이로써 집의 중앙집중식 구조며 구도를 완성하고, 정신의 정점을 결정한다. 그리고 조형과 조형 사이, 집과 집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관념적 세계와 감각적 세계 사이, 성과 속 사이, 그리고 나와 너 사이로 물이 흐른다. 그렇게 흐르면서, 범람하면서, 그리고 때론 역류하면서 물은 명상의 유기적이고 우연한, 비결정적인, 가름하고 가늠할 수 없는, 어쩜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는(물이 흐르는 길 즉 도를 도라고 부를 때,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명상의 또 다른 한 측면이며 속성을 완성한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