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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철주 - 꿈꾸는 산수,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한/ 고충환

sosoart 2014. 9. 11. 21:09

석철주 / 꿈꾸는 산수,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한

고충환

석철주의 회화


꿈꾸는 산수,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한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생활일기 시리즈, 존재의 원형을 그리워하다. 흔히 마르셀 프루스트의 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시간의 추이를 따라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을 좇아서 사건이며 현상을 서술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탓이다. 알다시피 의식은 시간에 맞춰 흐르지 않는다. 작가의 의식 속에서 시간이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것. 그렇게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시간이며 의식 속에서 작가는 자기를 자신의 유년으로 되돌려 보낸다. 바로 마들렌 과자를 한입 베물 때 나는 소리와 입 안 가득 퍼지는 향이 잊힌 유년의 기억을 떠올려 준 것이 시간여행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시간여행을 감행하게 해주는 계기를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 


생활일기08-11, 130x130cm, 2008


프루스트에게 시간여행을 감행하게 해준 계기가 마들렌 과자였다면, 석철주에게는 장독대가 있다. 작가에게 장독대는 그저 정물 이상이었다. 유년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의 원형이었다. 장독대는 유년의 작가에게 놀이터였고, 특히 숨바꼭질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한번은 장독 속에 숨었다가 깜박 잠이 들었고, 온 가족이 작가를 찾아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다. 더 멀리 보내기 위해 장독대 위에서 연을 날리다가 곧잘 뚜껑을 깨먹기도 했는데, 그 일로 어머니는 한 번도 탓한 적이 없었다. 그저 궁색한 살림살이에 미안해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장독대 위에 물이 담긴 흰 사발을 얹어놓고 빌곤 하셨다. 작가에게 장독은 이처럼 유년의 추억이며 정안수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주물이나 성물이라고까지 할 수야 없겠지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어머니의 기원이 작가의 인성이며 인격을 형성시켜준 것임을 생각하면 성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작가로 하여금 시간을 거스르게 해주는 것임을 생각하면 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장독대의 추억은 작가의 의식 속에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성인이 된 작가는 장독이며 옹기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그림 속으로도 들어오기에 이른다. 


일련의 생활일기 시리즈 그림들은 이렇게 그려지는데, 장독이며 옹기 그림이 메인이 되고, 여기에 실패와 실, 골무와 버선을 소재로 한 규방 시리즈가 부수된다. 그리고 달 항아리 그림도 크게 보아 이런 생활일기 시리즈로 범주화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소재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는 여성의 성적 특수성이다. 물론 달 항아리가 약간 애매한 경우이긴 하지만, 여하튼. 웬 성 정체성이냐고 하겠지만, 보기에 따라서 성 정체성이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계기이며 동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작가가 다름 아닌 이상범의 수제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흔히 미술사에서 청전 이상범은 심산 노수현과 비교된다. 여성적인 산수와 남성적인 산수의 비교가 그것이다. 사제 간에 재료도 기법도 판이하지만, 작가는 스승이 그린 그림의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특유의 감수성을, 말하자면 여성적 감수성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여성적 감수성에서 몽상의 시학을 위한 계기를 찾는 바슐라르 가스통의 경우도 도움이 되겠다. 특히 마치 꿈을 꾸듯 산수를 몽몽하게 그린 작가의 신몽유도원도 시리즈는 제목도 그림도 몽상의 시학 그대로를 그림으로 옮겨놓은 듯 하지 않은가. 

이렇게 작가는 생활일기로 명명된 일련의 옹기 그림을 매개로 유년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존재에 대한 원형적 그리움을 그려놓고 있었다. 


자연의 기억 시리즈, 자연이 품고 있는 생명을 캐내다.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들이며 분방한 스크래치들이 모노톤으로 그려진 화면 내부로 침잠하는 것도 같고 화면 위로 부유하는 것도 같은 일련의 그림들이 얼핏 형식실험의 연장에 있는 추상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비정형의 얼룩처럼 보이는 것들이 만개한 꽃 같고, 분방한 스크래친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불현듯 풀잎으로 다가온다. 비정형의 그림인 만큼 풀잎도 꽃잎도 결정적이지는 않다. 그림은 시시각각 변하고 볼 때마다 다르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비정형의 얼룩이며 무분별한 스크래치로 보이다가도,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잎이며 민들레 홀씨가 표표히 흩날리는 들판 같다. 


그림을 잘 보기 위해서 그리고 사태를 잘 인식하기 위해선 사물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바로 심적 거리 내지 미적 거리를 견지해야 한다. 그렇게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보면 그림은 추상처럼 보이고, 사진처럼 보이고, 심지어는 모노톤으로 절제된 색감으로 인해 수묵처럼 보인다. 추상과 사진 사이, 수묵추상과 수묵형상 사이의 형식적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에서 바람이 감지된다고 했다. 이로써 비록 그림 자체는 정적이지만 마치 그림이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덩달아 그 바람이 볼 때마다 그림을 조금씩 변형시키는 것 같다. 그림에 무슨 알 수 없는 조화라도 부린 것일까. 


그림 속에 바람이 불기 위해선 말하자면 그림이 움직이기 위해선 그림 속에 여백이 있어야 한다. 풀잎과 풀잎 사이에 공간이 있어야 하고, 들판과 꽃잎 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 속에 여백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비록 작가의 그림에 통상적인 여백은 없지만, 사이공간을 매개로 여백을 부려놓고 있는 것. 그래서 그림은 정적이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찬 공간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이 보이고, 빡빡하지만 헐거워 보이고, 평면이지만 원근적인 깊이가 감지된다.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착시라기보다는 암시를 통해서 실현한다. 어쩌면 예술은 암시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가시적인 것(이를테면 비정형의 얼룩과 무분별한 스크래치)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이를테면 꽃잎과 풀잎으로 무성한 들판)을 암시하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 암시의 기술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고 있고, 그렇게 체득한 것을 그림 속에 부려놓고 있는 것. 나아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과의 관계로 치자면 자연을 그리면서 자연의 형상보다는 현상을, 고정된 순간의 포착보다는 변화하고 이행하는 과정을,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보다는 자연이 품고 있을 생명을 암시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자연의 기억 시리즈는 생명에 가닿는다. 자연은 자신이 생명을 품고 있음을 기억한다. 한때 생명을 품고 있었음을 기억한다. 무슨 말인가. 왜 과거형인가. 작가는 풀잎 그림에 화분 그림을 오버랩 시킨다. 풀잎 그림은 자연이지만, 화분 그림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을 곁에 두고 싶은, 사실상 자연을 상실한 인간의 욕망이 만든 자연의 대리물이며 인공자연이 화분이다. 그래서 화분은 자신이 한때 속해져 있었을 자연을 기억하고, 인간은 인간대로 상실한 자연을 추억한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사진 같다고 했다. 나아가 그림은 엑스레이 필름 같다. 엑스레이 필름? 주지하다시피 엑스레이 필름은 몸의 표면을 투과해 몸속을 보여준다. 바로 화분의 과거지사인 자연을 증거하고, 인간이 상실한 자연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이 진즉에 품고 있었을 생명을 암시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자연은 그 자체가 생명이지만(비록 기억으로 환기해낸 것일지언정), 생명과 관련해 자연은 일정한 상징적 의미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름 모를 꽃잎 같은 존재들, 따로 가꾸는 손길이 없어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매번 흔들리면서 다시 일어서는 들풀 같은 존재들, 바로 민초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의 기억 시리즈를 통해서 인간이 상실한 자연을 증언하고, 민초의 사회학적(아님 존재론적?) 의미를 부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본성으로서의 생명을 주지시킨다. 


신몽유도원도 시리즈, 다시 꿈을 꾸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이상향을 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그림이 몽유도원도다. 몽유도원도는 꿈을 그린 것인 만큼 그리고 이상향을 그린 것인 만큼 현실 속 풍경은 아니다. 그 풍경은 관념 산수와도 통하는데, 현실 속 풍경이 아니라 당시 사대부 문인화가들 저마다 생각하는 유교적 세계관이며 자연관 그리고 우주관을 산수에 투사해 그린 것이다. 꿈을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이상향을 그린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그리고 석철주는 이 몽유도원도를 다시 그린다. 하지만 재료도 기법도 판이하다. 다른 점은 또 있는데, 관념 산수(관념을 현실처럼 그린)를 거꾸로 적용해 그렸다. 북한산과 같은 현실 속 풍경을 마치 꿈꾸듯 그렸고, 꿈속에서 본 풍경처럼 그린 것이다. 현실을 꿈처럼 그렸다? 현실에서 꿈을 본다? 좀 비약을 하자면, 비록 비루한 현실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 속에서의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다? 꿈이 아니라면 현실은 어떻게 건너갈 수가 있는가. 여기서 미학이 아니라면 삶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을 굳이 인용해야 할까. 혹 현실과 꿈이 그 경계를 허무는 장자몽은 꿈(아님 사실상 같은 말이지만 이상)으로서 현실을 건너려는 도교적 은일사상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보기에 따라서 작가는 니체와 장자의 적자처럼도 보인다. 


생활일기14-1, 130x130cm, 2014

 


분명한 것은 작가가 현실을 꿈처럼 그린다는 것이고, 따라서 꿈같은 표면 아래 현실이며 현실인식을 숨겨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그 수면 아래 어떤 현실이며 현실인식이 잠자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우선 그림의 표면을 보고 수면(잠의 겉면?)을 보자.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예사롭지가 않다. 관념이건 실경이건, 산수며 풍경에 대한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하다. 그래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이 그림을 안평대군에게 보여줬다면 그 반응이 어땠을까 싶다.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하다? 이건 그대로 무슨 막이 아닌가. 앞서 사물대상과의 심적 거리며 미적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막을 이런 심적 거리며 미적 거리를 견지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 볼 수는 없을까. 전통적으로 조상들은 이런 적정 거리에 도사들이었고, 창호문과 발과 베일이 그 적정 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들이었다. 


이 장치들은 무슨 의미인가. 안과 밖의 경계 허물기며 통섭과 융합의 실천적 논리를 선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차례 걸러서 보고 한 템포 늦춰서 보면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는, 세계를 자기 식으로 관상하라는, 그리고 그렇게 세계를 보면서 만들라는(개념화하라는) 주문이 아닌가. 꿈처럼 몽몽한 작가의 그림은 그 이면에 바로 이런 주문을 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의식의 이면에 잠자는 무의식의 지층을 캐낸다는, 의식의 흐름을 발굴한다는, 나아가 꿈으로서 현실을 변혁시킨다는(미학화한다는?) 실천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그리면서 이상향을 그린 점이 없지가 않고, 따라서 현실로부터의 도피 내지는 보다 적극적인 경우로는 현실에 대한 변혁의지를 이상향에 담아낸 전통적인 관념 산수와도 통한다. 


그리고 막은 또 있다. 작가는 근작에서 무슨 미세한 조각칼로 섬세하게 떠낸 듯한, 거즈 같기도 하고 픽셀 같기도 한 투명하고 촘촘한 망구조를 그림 위에 덮씌웠다. 엄밀하게는 일일이 그려 넣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종전의 막에 또 다른 막(망)을 보탠다는 의미와 함께 꿈을 보게 하고 만지게 했다. 시각적인 그림의 지평을 촉각적인 지평으로까지 확장시켜 그림을 보면서 만지게 한 것이고, 사물대상의 진상(현상)을 보면서 더듬어 찾게 한 것이다. 그림의 폭이며 회화적 문법의 경계를 심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망은 픽셀 같다고 했다. 앞서 자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보기에 따라선 사진 같고 엑스레이 필름 같다고도 했다. 작가는 말하자면 전통적인 산수를 계승하고 각색하면서 이런 동시대적 미디어 고유의 질감이며 생리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놓고 있는 것이며, 이로써 자신의 그림으로 하여금 동시대성을 담보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로티시즘을 들 수가 있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신몽유도원도 시리즈를 각각 청색과 핑크색 두 버전으로 그려놓고 있다. 물론 일부 다른 색상의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여기서 청색 버전은 일단 대기와 공기의 미묘한 색감이며 질감을 옮겨 그린 것으로 보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청색에서 이상이며 이상향의 메타포를 보아낼 수도 있는 일이다. 여하튼, 문제는 핑크색 버전 쪽이다. 핑크색 산수 그림은 보면 볼수록 에로틱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다 펄 성분을 조금 함유한 경우라면 그 에로틱한 느낌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아마도 빛깔과 색깔이 미묘하게 상호작용하는 탓이리라. 루시앙 프로이트는 그림이 곧 살이며 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작가는 혹 이 핑크색 버전 그림에서 산수를 그리고 꿈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산수며 꿈(그리고 그림)의 육질을 같이 그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서 이야기한 성정체성과도 무관하지가 않은 대목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일련의 신몽유도원도에서 현실과 꿈,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호간의 희뿌옇고 애매하고 몽몽한 경계를, 그리고 더불어서 그 불투명한 경계의 육질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산수화를 차용하고 전유하는 주목할 만한 방법론의 지점을 예시해준다. 

 

출처: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