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 LIBRARY/미술- 이론·비평·컬럼·작가

방준호-존재의 그리움,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에 가고 싶다/ 고충환

sosoart 2014. 11. 1. 23:38

고충환 

 

방준호 / 존재의 그리움,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에 가고 싶다

고충환

존재의 그리움,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섬에 가고 싶다


작가의 작업실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있다. 다부리? 바로 다부동 낙동강 방어선 전투로 유명한 곳이다. 실제로 작업실에서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부동 전투 전적비가 올려다 보인다. 치열했던 전투만큼이나 사람도 많이 죽었다. 모르긴 해도 귀신도 많을 것이고 기도 셀 것이다. 많고 센 것은 귀신이나 기 말고도 또 있는데, 바람이 그것이다. 한쪽으로는 국도가 나있어서 연신 차들이 내달리고, 반대편에는 샛강을 끼고 흐르는 산으로 가로 막힌 사이에 작업실이 위치해 있다. 실제로 지세가 골짜기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내달리는 차와 함께 바람이 거센 편이다. 한마디로 작가의 작업실은 고립무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예사롭지가 않았다. 작가는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곳에서 바람에 민감한 돌조각을 하고 있었다. 돌조각을 하는 내내 풀풀 날리는 먼지가 그곳이 다름 아닌 바람이 드센 곳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돌을 소재로 바람을 조각하고 있었고, 먼지를 조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바람에 실려 온 귀신도 조각하고 있었다. 


두 나무

 


바람은 실체가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감 잡기가 어렵다. 바람의 실체를 감 잡기 위해선 바람에 부닥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살갗이나 나무 그리고 먼지 같은. 살갗이나 나무 그리고 먼지에 와 닿는 촉감이며 질감에 의해서 비로소 바람의 실체를 실감할 수가 있다. 바로, 바람은 어떤 매개에 의해서만 실재할 수 있고, 매개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가 있다. 바로 가시와 비가시의 문제이며,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그리고 그렇게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의 층위로 불러내는 기술을 의미하는 예술의 존재이유와도 통한다. 작가의 경우에 매개에 해당하고 가시에 해당하는 것은 나무다. 대개는 한쪽으로 휘는 나무를 매개로 그 자체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바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관상 나무를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사실은 그 이면에서 바람의 형상을 조각하고 있었고 바람의 소리를 조각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 예술이라고 했다. 이처럼 예술이 암시하는 것에는 형태도 있고 소리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휘는 나무를 매개로 바람의 형태를 암시하고 있었고 바람의 소리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바람에 휘는 나무는 언제 어떻게 작가의 조각 속으로 들어왔고, 또한 그 속엔 어떤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탑재돼 있는 것일까. 언젠가 작가는 작업실에서 드센 바람에 미친 듯이 흔들리는 나무를 보았고, 종래에는 한쪽으로 흐르듯이 휘는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그 꼴이 꼭 자기를 보는 듯했다. 바로 나무는 자신이었고, 바람은 세상이었다.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바람은 세파였고, 그럼에도 뿌리 뽑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무는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무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라는, 언젠가 누군가가 무심결에 툭 던진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가 않는다. 나무는 나무일 뿐, 바람은 바람일 뿐이라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바람에 휘는 나무가 안쓰러워 보였고, 그 꼴이 꼭 자기를 보는 듯 했고, 그리고 그렇게 그 꼴에 자기의 감정이 이입된 탓이리라. 그러나 사실 이런 세파에 휘는 나무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가가 조각으로 표현한 나무는 드세기보다는(기처럼) 부드럽고, 그로테스크하기보다는(귀신처럼) 서정적이고, 공격적이기보다는(세파처럼) 우호적이다. 

사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에는 이유가 없다. 바람이 드세다고 보는 것도 나무를 안쓰러워하는 것도 다만 인간의 감정이며 생각일 뿐이다. 자연은 그저 자연인 것. 그럼에도 자연에 감정 이입되고 동화되는 것이, 그리고 종래에는 자연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다. 문제는 드센 바람과 안쓰러운 나무로 와 닿는 자연현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숭고의 문제가 개입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연현상에 맞닥트렸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숭고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자연이 여전히 신비주의의 대상이며 경외감의 대상으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숭고의 감정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바람에 휘는 나무를 조각하고 있었고, 나무를 휘게 만드는 바람을 조각하고 있었다. 바람에 휘는 나무를 매개로 사실은 삶을 조각하고 있었고, 사실상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자연에 대한 숭고의 감정이며 경외감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정적인 질료인 돌 속에 이런 삶이며 자연을 향한 숭고의 감정을 갈무리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가 바람에 휘는 꼴을 제외하면, 그리고 보기에 따라선 그 마저도 포함한 작가의 조각은 비록 자기를 온통 흔들어놓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서정적이고 우호적일 수가 있었다. 돌을 흙 주무르듯 하는 조각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역량일 수도 있겠고, 그저 힘겨루기라고 할 수만은 없는 기를 다스리는 남다른 능력(이를테면 자신의 기와 지세가 하나로 통하거나 흐르게 하는 식의)일 수도 있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과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를테면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자연을 경외의 감정으로 대하는 식의)에 기인한 것일 터이다. 

이렇게 작가의 조각에 등장하는 나무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고, 나무들은 사람들을 상징한다. 바람에 휘는 나무에서 불현듯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작가 개인의 자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바람에 휘는 나무와 세파에 내던져진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비단 작가만은 아니란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쉽게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어느 정도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서사조각이다. 그 속에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조각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조각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나무들은 대개 한 방향을 향하는데, 서있는 나무가 얼굴(아님 몸?) 같고 바람에 휘는 나뭇잎이 풀어헤친 머릿결 같다. 알다시피 나무는 식물이다. 그리고 식물은 붙박이다. 그렇게 비록 몸은 세상에 붙박이로 붙박여 있지만, 나무는 세상 끝까지 자기를 보낼 수가 있는데, 바로 꿈꾸기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휘는 나뭇잎에 그 꿈을 실어 보낸다. 한 자리에 붙박은 채로 세상 끝까지 자기를 실어 보낸다는 것, 그것은 그대로 질 들뢰즈의 의식의 유목을 떠올려주지 않는가. 참고로 들뢰즈는 의식의 유목을 실천하는 논리적 장치(논리기계)랄 수 있는 리좀 역시 식물의 뿌리(비록 식물의 줄기 내지 수목의 논리와는 비교되고 심지어 대비되기조차 하지만, 여하튼)에서 그 착상을 얻어오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의 나무는 나뭇잎 끝자락에 자기를 실어 보내는 식으로, 꿈꾸기에 맞춰 자기를 연장하는 식으로 바람이 불어가는 곳으로 자기를 보낼 수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나무? 그건, 바로 그리움이다. 한자리에 붙박은 채로 자신을 멀리 보낸다는 것, 그것은 그리움일 수밖에 없다. 한자리에 붙박여 먼 곳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머릿결을 풀어헤친 나무의 형상은 그대로 그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꼴 그대로 존재를 닮았고 삶을 닮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 만든(어쩜 남이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를) 틀에 갇힌 삶을 산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 아닌 것을 꿈꾸고, 자기 아닌 곳을 그리워한다.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라는 보들레르의 독백은 그저 자기 독백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작가는 바람에 휘는 나무를 소재로 세파에 맞서는 존재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었고, 자기 아닌 것과 아닌 곳을 꿈꾸는 존재의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바로 작가의 조각이 부드럽고 서정적이고 우호적으로 와 닿는 이유가 해명되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바로 작가의 조각이 존재의 그리움을, 아마도 원형적 그리움을 자기 속에 품고 있었던 탓이다. 


홀로 나무

 


작가의 조각은 이처럼 그 속에 삶의 서사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의 조각은 서사조각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풍경조각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위해선 장이 있어야 하고, 서사를 풀어 놓기 위해선 배경으로서의 풍경(아님 정경 아님 상황이라도)이 전제되어져야 한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는 바람에 휘는 나무가 등장하고, 나무가 건너는 강이며 산이 등장하고, 나무가 자기를 보내는, 그리고 그렇게 나무가 가 닿는 섬이 등장한다. 그 섬은 말하자면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로서보다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섬이며, 유토피아일 수도 원형적 그리움일 수도 그리고 때론 진아(불교에서의 진정한 자기)일 수도 있는 관념적인 대상으로서의 섬이다. 나무는 대개 자기의 연장된 나뭇잎을 그 섬에 보내지만, 때로 나무는 배를 타고 그 섬에 가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바람에 휘는 나무는 세파에 맞서는 존재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리고 배는 삶을 상징한다. 부연하자면,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는 천상천하유아독존 곧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 홀로, 라는 존재의 절대고독을 상징한다. 어쩜 이 절대고독 앞에서 삶은 허상인지도 모르고 환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환상은 존재가 자신의 고독과 독대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어쩜 장자몽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바람에 휘는 나무를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서사조각으로 그리고 풍경조각으로 범주화된다. 비록 그 내용이 세파에 맞서는 존재며, 존재의 원형을 향한 그리움(그러므로 원형적 그리움), 그리고 저마다의 고독과 독대하는 존재와 같은 다소간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를 담고 있지만, 정작 실제의 조각으로 나타난 형태를 보면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서정적이기 조차 하다. 그 이유며 의의에 대해선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리고 여기에다 덧붙이자면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옷을 표백하고 박제화 하는 과정을 통해 옷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기호의 실체를 다룬), 행위예술(자신을 살아있는 조각으로 제시한)과 대지예술(논밭을 차광막으로 덮씌운)마저 종횡해온 그동안의 작업에서 예술과 삶과의 상호내포적인 관계(예술이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라는)에 대한 일관된 관심과 치열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런 조각(삶의 실재를 서정적인 질료 속에 함축해낸)도 가능해지지 않았나 싶다.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