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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강직함을 지닌, 충청도 선비정신을 쫓아 2

sosoart 2014. 11. 1. 23:42

[예와 강직함을 지닌, 충청도 선비정신을 쫓아 2]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4-10-27 조회수 564

 

 

 

 


- 논산 명재고택
자연 앞에서 뽐내지 않는다

 

 

윤선거는 그의 아들인 명재 윤증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집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서 만날 수 있다. 숙종 때 윤증이 지은 논산 명재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은 자연 속에 어우러져 한옥의 기품을 은은히 풍긴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 함께배우며, 오랜 시간 뜻을 같이 한 벗이다. 윤선거는 윤휴와도 친교가 깊었다. 윤선거가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윤휴의 재능이었다.
그는 “윤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데 고인에 집착하지 않고, 독서와 강의에서 주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실로 사람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표현대로 윤휴는 뛰어난 학자였으나 당시 주류를 이루던 송시열에게 배척당했고, 윤선거와 송시열의 인연은 윤선거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좋은 모습으로 남지 못했다.
1669년에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윤증은 아버지의 행장을 송시열에게 부탁한다. 송시열은 윤증에게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그것을 거절한다. 윤증은 아버지 가시는 길을 편케해드리고자 거듭 송시열에게 부탁한다. 송시열은 마지못해 남의 글을 인용해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한 것을 비난하는 글을 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은 반목하게 된다. 이후 송시열과 윤증이 속했던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갈라진다.
명재 윤증은 평생 벼슬길에 나가진 않았지만, 얼굴 없는 재상으로 불릴 만큼 존경받았다. 1657년부터 1681년까지 명재는 송시열의 문하에 입문해 약 24년 간 사제관계를 지속했는데, 스승과 제자가 안타까운 일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송시열 또한 아끼던 제자를 굽힐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잃었다. 이후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 추대될 만큼 당대 소장 지식인의 신망을 받았다.

 


명재고택 마당 한편에 펼쳐진 장독대처럼 많은 사람이 윤증의 뒤를 좇았다. 봉긋하게 솟은 산세를 하나도 해치지 않으면서 넓게 퍼진 명재고택은 오랜 시간 함께 한 자연과 동무처럼 어우러졌다. 명재의 자손들은 긴 시간 동안 조상의 강직함을 따라 삶을 살며 세월을 간직했다. 그래서인지 밖에서 보면 자연이 고택을 품은 듯 보이고, 고택안에서 보면 고택이 자연을 품어 어우러진 모습이 은은한 향기를 뿜는다.

 


- 논산 노강서원
윤 씨 가문은 지역을 함께 돌보았다

 

 

한 시대를 살며 온몸과 마음을 다해 ‘정신’을 지켰던 윤선거와 윤증의 뜻은 논산 노강서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0호)에서 그의 넋을 기린 후손에 의해 이어졌다.
노강서원은 윤선거의 아버지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숙종 1년(1675) 처음 세워진 후, 숙종 8년(1682)에 임금으로부터 ‘노강’이라는 현판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후에 윤선거와 윤증도 이곳에 함께 모셔졌다.
노강서원 강당(보물 제1746호)은 2011년 12월 30일 보물로 지정됐다.
노강서원은 지붕이 특이하다. 속눈썹처럼 얌전한 모양새의 눈썹지붕이 지붕 아래 달려 있다. 눈썹처마는 지붕 아래 달린 또 하나의 작은 지붕이다.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주고, 건물 외관에 시각적으로도 안정감을 준다.


 

- 논산 돈암서원
배롱나무 꽃피는 곳에서 배움을 찾는다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은 인조 12년(1634)에 사계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건립했다.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낙향하면서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쓴다. 이후 김장생은 양성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한다. 후세에 그의 제자들도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워 김장생을 추모하며 후학을 잇는 데 힘썼다. 서원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창건한 강경의 죽림서원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한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遁岩)’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셔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서원은 뜻을 함께할 사람끼리만 모여 공부했다는 점에서 향교와 다르다. 그래서 서원엔 그 가르침의 축이 되는 이를 모시는 사당이 꼭 있다. 어떤 사람을 사당에 모셨는가를 보면, 그 서원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현재 숭례사와 양성당, 동재와 서재, 정회당, 장판각, 응도당 등의 건물이 서원을 구성한다. 또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등의 서적이 보존되어 있다. 원래 더 많은 자료가 있었는데, 6·25전쟁 때 인민군이 불을 지피는 도구로 책자 등을 사용해 많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돈암서원 문화유산해설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돈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돈암서원에서 만난 문화유산해설사는 숭례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망새를 올려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면 새겨진 글씨가 있어요. 그걸 보면 1786년에 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새긴 것을 알 수 있죠.”진지한 학문을 배우는 곳에 숨은 표정이 짓궂다.
돈암서원 응도당(보물 제1569호)에도 논산 노강서원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눈썹지붕 양식이 있다.

 


양성당을 기준으로 동남쪽에 있는 응도당은 단청을 입히지 않아 오랜 세월의 느낌이 더하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처럼 수수한 느낌을 준다. 응도당은 돈암서원에서 유생을 가르치던 강당이다. 돈암서원을 이전할 때 함께 옮기지 않아 서원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
최근에는 응도당에서 인문학 강좌 등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했던 공간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사한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곳 강당 마루에 앉아 듣는 강연이 다른 매력으로 다가올 것 같기도 하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