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 ┃이부강 / 흔적의 깊이를 가늠하는 회화
김성호
카탈로그 서문
흔적의 깊이를 가늠하는 회화
김성호(미술평론가)
이부강의 작업은 흔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작가의 내밀한 개인 소사이기도 하거니와 동질의 의식을 함유하는 공동체의 서사이기도 하다. 이부강은 확언할 수 없는 시공간의 흔적을 찾아 그것을 회화로 재구성한다. 그것은 파편적인 개인사인 동시에 보편적인 한 집단의 총체적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는 누군가가 남긴 시간의 지층이나 흔적에 대한 감흥을 표현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이러한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달리 말해, 그의 흔적 찾기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온 기억을 더듬어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의 이웃들, 혹은 익명의 한 집단 공동체로부터 공동의 기억을 건져 올리는 것이다. 즉 '흔적의 깊이를 가늠하는 그의 회화'는 기억의 재생을 통해 현재적 '나'와 과거의 '우리'를 연결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퇴락한 시간의 껍질들과 '기억을 더듬는' 저부조의 회화
세계를 대면하는 예술가가 자신만의 작업의 좌표를 찾아나서 원하는 예술의 열매를 따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회화의 대상'을 자신의 주변에서 찾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작업의 좌표를 향한 행진은 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현재의 작업 속에서 순간의 열매를 성취하면서 미래의 열매를 향해 나아갈 따름인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던 미적 가치가 훈련된 감성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예술가의 입장은 어떠할까? 그가 질문하고 있듯이, 이러한 순간에도 그는 '감각과 재료를 새롭게 조직'하여 새로운 느낌의 그 무엇을 창출하고자 부단히 실험하는데 집중할 뿐이다. 거창한 회화적 담론이나 지적 허위의식은 그의 관심 밖인 까닭이다.
2012년부터 본격화된 그의 새로운 시리즈는 낡은 베니어합판을 한 꺼풀씩 얇게 벗겨낸 껍질의 파편들을 새로이 조합함으로써 기억의 층(layer)을 재구성하는 것이다.그의 작품에서 표면은 작가의 내적 감정을 머금은 상태로 발현된다. 즉 기억의 재구성과 가공의 집요한 노동력이 표면 안팎에 침투하면서 아스라한 '기억의 흔적'이 '지금, 여기'의 표면 위에 선명히 떠오르는 것이다. 특히 페인트칠이 된 합판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벗겨지고 퇴락해진 채 그가 기록하는 기억 단층들에 잠입한다. 버려진 것, 잊혀져버린 것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퇴락의 흔적들은 '기억을 더듬는 그의 작업'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소재이다. 그것은 그에게 '기억 안의 추억'이자 강렬한 감흥을 던지는 풍크툼(punctum)같은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작가 이부강에게 있어 퇴락한 시간의 지층이 드러난 회화적 표면은 작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드러내는 기제이다. 그에게는 조형적 구성의 문제보다는 조형적 표현의 미학이 더욱 중요하게 간주된다. 버려지고 망실된 합판은 그 자체로 구성이기보다는 표현의, 중심이기보다는 비중심의 미학을 소생시킨다. 시간의 물성을 고스란히 담은 발견된 오브제는 그에게 있어 '퇴락한 시간의 껍질'인 동시에 표현주의 언어의 주요한 질료가 된다. 따라서 그것을 저(低)부조의 회화로 되살려내는 그의 작업은 망각된 우리의 기억을 더듬게 하는 한편, 우리를 예측할 수 없는 어떠한 심리적 방향으로 이끈다.
특히 그의 추상 작업에서는 오브제의 물성 자체가 표현주의적 추상의 바탕을 구축함으로써, 그의 구성적 추상의 조형 언어를 표현주의적 추상 안에서 펼쳐지게 한다. 그것은 시간의 파편들을 재조합하는 그의 추상으로부터 우리가 저마다의 내러티브가 자라나는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바탕이기도 하다.
집요한 노동력으로 재구성하는 시간의 흔적
그의 추상 작업은 베니어판 껍질의 파편적 재조합, 판화적 전사기법, 부분적 페인팅과 같은 콜라주(collage)의 형식과 더불어 스크래치와 떼어내기와 같은 데콜라주(decollage)의 방식이 교차하는 화면의 물성에 집중하면서 집적된 시간의 해체와 재구성을 감행하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찾으려고 실험을 거듭한 그의 회화적 노력들이 도달한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미술사 속 거장들의 영향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추상 실험은 동시대미술가들에게 있어 공통된 일종의 한계였다.
그것은 도시의 변두리 풍경이거나 실내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을씨년스러운 도시 변두리는 개발이 멈춘 낙후된 공간이지만, 동시에 시간이 멈춘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파편들의 조합을 통해서, 더러는 전사의 기법을 통해서 시간의 지층이 화면 위에 사실적인 모습으로 구축되어가는 그의 기억의 풍경들은 후에 샌딩머신으로 갈리면서 시간의 변화에 따른 세월의 흔적을 다시금 각인해낸다. 여기에 다시 색을 입히고 벗겨내는 과정들이 작가가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의 작업은 해체된 것들을 모아 기억의 흔적을 복원하고 이내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해체하는 일련의 구축과 해체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서 시간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꼴라주는 전체를 지향하는 파편들의 질서 맺기이며,데콜라주는 그러한 파편들을 나와 너의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해체이다. 이 대비적 방법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서 그는 개인과 공동체의 시간의 흔적을 복원하고 이내 그 속에서 자신의 '시간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요청되는 재구성과 해체의 반복되는 조형언어의 주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덧붙여 여기에 요청되는 것은 수고스러운 노동이다. 거의 장인의 기술에 견줄만한 세밀함과 정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물론 그는 기억의 사물과 대상에 대한 그대로의 재현을 시도하지 않는다. 참조된 사진 이미지로부터 탈각과 재조합이 관건인 만큼, 유연하게 재현을 받아들이지만, 가장 기초적인 재현적 표현을 위해서라도 베니어판의 파편들을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치해나가는 일은 항상 갈등과 선택의 순간들이 교차하며, 창작에 투여하는 인고의 시간을 요청한다. 꼼꼼한 화면 구성과 지루한 공정이 필수적인 그의 작업은 채워져야 할 것과 비워야 할 것에 대한 화면 경영을 집요하게 밀고나가야 하는 더디고 고된 작업이다.
상상으로 채워가는 기억의 여백
그가 망실되고 훼손된 파편들을 가지고 망각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그는 사라진 공동의 기억을 재생시키면서도 자신의 기억에 기초한 채 주관적 해석으로 풍경들을 재해석해낸다. 기억이란 항상 단편적인 것이라서 그것은 사실을 왜곡시키기 쉽다. 그것은 기억이 지니는 맹점이자, 예술로 풀어가는 크나큰 가능성이다. 그의 작품에서 공동의 기억이란 언제나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재생되는 주관적 해석의 틀 위에 놓여있다. 따라서 사회 공동체의 기억으로부터 텅 빈 여백이 발생한다. 이 여백을 그는 무엇으로 채우는가? 그가 발견된 오브제로 재현적 조형을 실천하면서도 구태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텅 빈 여백을 메우려는 그의 '상상력'이다. 우리의 기억이란 결국 과거를 자신의 주관으로 해석한 파편들의 소환(소환)이다. 공동체의 기억으로부터 부재한 것들의 부활과 재생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상만큼 자유로운 것이 없다. 역사학이 아닌 예술에서 이러한 기억 되살리기는 상상으로 채워진다. 슬레이트 지붕을 올렸을 아버지의 고단함, 햇볕이 내려쬐는 비좁은 마당 위 빨래줄에 걸려 걸려있는 양말을 서둘러 걷어 싣는 입시에 지친 아들의 초조함, 쪽방에 불을 지피고 있는 어머니의 연민 등 그의 화면에서 그가 상상했을 법한 내러티브와 장면은 이곳저곳에서 감지된다.
물론, 그의 상상은 재현을 위한 상상이라는 점에서 상상의 실천에 있어 일정부분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상상으로 채워가는 기억의 여백은 그의 작업을 읽는데 있어 매우 주요한 미학이 된다. 회화이면서 저부조의 조각이며 오브제미술이기까지 한 그것은 다양한 장르적 미학을 포함하면서, 이러한 심리적 전이의 효과를 유발하는 존재론적 미학을 함유한다. 자신의 기억을 통해 공동체의 기억을 더듬고 그것의 흔적의 깊이를 가늠하는 그의 회화가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흔적의 깊이를 가늠하는 회화」, (이부강 개인전, 2014. 11. 18~24, 대안공간눈)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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